[꼬문생각] 하영
“저는 다육이도 죽인 사람이에요.”
“버섯은 죽이는 게 더 힘들어요.”
사장님과 짧은 대화 끝에 식물 킬러는 결국 버섯 재배 키트를 바리바리 싸 들고 집에 왔다. 제 손에 들어오기만 하면 모두 죽어버렸던 식물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식물 킬러는 이번에도 ‘그 힘든 걸 내가 해내지는 않을까’ 불안에 떨었다. 신중히 사용 설명서를 읽고 빈방에 조심스레 버섯을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이번에는 부디 쑥쑥 자라 귀한 버섯이 되길 바라며 버섯과의 첫날을 마무리했다.
나의 버섯은 걱정이 무색할 만큼 무럭무럭 자라났다. 일주일이 되었을 무렵, 비닐을 뚫을 기세로 생장한 버섯을 본 엄마는 비명을 지르며 버섯을 수확해 버렸다. 처음으로 무언가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과정을 온전히 지켜낸 나는 기쁜 나머지 버섯을 요리하지 말아 달라고 엄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물론 엄마는 수확한 지 3시간 만에 불고기전골에 버섯들을 모두 넣어 맛있게 드셨다.
나는 내가 죽인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한다. 그루트(다육이), 토비(라벤더), 해순(넉줄고사리), 도비(다육이), 상배(호야), 춘수(산세베리아). 춘수를 떠나보냈을 때부터 식물 키우기를 관두었다. 반려 식물을 원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나에게는 ‘안전함’이 필요했다. 내가 적절한 시기에 물을 주고 보듬어 준다면(물론 그게 잘 안됐다) 그 생이 다하는 날까지 내 옆에 있어 줄 존재. 모든 게 변화하는 세상에서도 그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는 아이. 그러나 식물 집사가 되기엔 킬러의 재능을 타고났음을 인정한 순간부터 더 이상 식물을 가까이에 두지 않았다.
(비록 불고기전골이 되었지만) 버섯의 생을 지키고 나서야 처음으로 ‘나도 집사가 될 수 있겠구나’ 싶어 성취감에 휩싸였다. 그렇게 일곱 번째 반려식물 바라쿰(아라비쿰)을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나의 자랑스러운 5살 나무, 나의 바라쿰은 아직도 잘 살아있다. 바라쿰은 우리 집에서 가장 햇빛이 잘 들고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 아이를 데려올 때 들은 조언은 딱 세 가지였다. 알아서 자라도록 두기. 물이 부족할 때 나타나는 신호(줄기가 쪼그라든다)만 잘 파악하기. 여름에 에어컨 바람이 센 곳에 두면 겨울로 착각해 동면할 수 있으니 주의하기. 그렇게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이라고는 줄기를 확인하고, (착한 말 양파-나쁜 말 양파 실험을 맹신하므로) 매일 자기 전에 덕담을 해주는 일뿐이다. 다행스럽게도 바라쿰은 아직 초록빛 잎을 빳빳하게 들이밀고 서 있다. 최고 기록이다.
이제 나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저는 식물집사입니다.”
어둠 속에서 부끄럽게 킬러로 살던 나의 과거에 작별을 고한다.
나의 바라쿰, 나의 주인님을 위한 집사로서 남은 생을 바칠 것을 선언한다.
하지만 나의 선언이 무색하게도, 오늘 아침 바라쿰의 잎이 노란색으로 변해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이직에 성공한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시 실직 위기에 놓인 나는 울먹이며 바라쿰을 소개해준 사장님께 연락했다.
“사장님… 우리 아이 잎이 노란색이 됐어요…”
“전부 다요?”
“아뇨, 잎 하나가요”
“종종 그러곤 합니다… 그냥 두면 돼요.”
나는 머쓱하게 핸드폰을 내려놓고 바라쿰을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우리 바라쿰은 방치형이구나… 아직 집사가 많이 부족합니다. 제발 살아만 주세요…
하영 | choibook0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