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문생각] 소이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와 같은 책들은 계급적 디스포리아를 겪은 사람들의 삶을 제시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그들이 경험한 계급 이동, 원(原)가족과의 단절, 그리고 새로운 삶에의 정착 과정은 두 사람의 뛰어난 식견과 문장을 거쳐 누군가에게는 애타게 찾던 언어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좋은 표본이 된다. 그러나 그들의 글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두 사람이 글을 쓰는 시점에 이미 확보한 가난한 삶과 노동자 계급으로부터의 ‘거리’다. 그들은 단절이 아닌 멀어짐으로 자신의 계급 이동을 설명함으로써 노동자 계급의 당사자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가난한 상황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쉽게 휩쓸려버리는 (그래서 스스로의 설득력마저도 불태워버리는) 분노의 불길로부터 물러선다.
그러나 나는 아직 가난의 한가운데에 서 있고, 그러므로 나의 1500자짜리 분노는 아니 에르노와 디디에 에리봉이 아니라, 차도하의 일기에서 시작한다.
“제발 가난에 대해서 함부로 떠들지 마, 제발 그러면서 짐짓 심각한 표정 짓지 마,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가난 배틀은 좋은 의견 교환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정확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순 없다. (중략) 당사자여야만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나는 머리에 힘을 줬다. 그리고 ”그 정도 의견으로는 그 주제를 못 다룰 것 같아요.“ 정도로 내 의견을 전달했다.”[1]
가난하지 않은 아이들 사이에 놓인 운 좋은 어떤 가난한 아이들은 반드시 이런 언어를 가지게 된다. ‘우리’는 그러면, 앞으로 어떤 언어를 손에 쥐게 될까? 또 어떤 감각 속에서 살아가게 될까? 차도하는 세상을 떠났고 질문에 대한 답은 이제 꼼짝없이 내가 겪어냄으로써 얻어야 하는 미래의(다음의) 언어가 되었다.
답을 얻기 위해 나는 언제나 다음이 고프다. 그러나 내게 다음은 질적 향상이나 진보를 보장하지 않는 그저 ‘다음’이다. 나는 가난하지 않은 삶을 동경하지도 않고, 가난한 삶을 증오하지도 않는다. 언제나 더 나은 삶을 바라지만,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확언할 수도 없다. 그래서, 또는 어쩔 수 없이, 나는 한동안 계속 가난할 것이다. 가난해서 외로울 것이고, 지칠 것이고, 미워할 것이다. 이것은 결코 비관이 아니다.
모든 삶과 존재가 그렇듯 나의 존재는 어떤 것으로도 반박할 수 없고 나의 삶은 그 어떤 상상과도 일치할 수 없다. 이건 내 삶이고, 나는 지금 당신의 곁에 있다.
나는 위로도, 동정도, 이해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이런 삶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온 힘을 다해, 진정으로 알기만을 간절히 원한다.
사람들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내 삶을 상상해보려 애쓰는 대신에, 나를 만나야 한다. 내 삶과 존재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더 나은 다음을 위해, 당신들과 언젠가 마주치기 위해 어디에도 있으면서 끊임없이 말할 것이다.
소이 | soi18@gmail.com
[1] 차도하 (2024). 일기에도 거짓말을 쓰는 사람. 42.
참고문헌
단행본
차도하 (2024). 일기에도 거짓말을 쓰는 사람. 위즈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