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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을 가다

[칼럼] 편집위원 민철

설 연휴 마지막 날. 오랜만에 광주에서 혼자 시내버스를 탔다. 익숙한 정류장에서 익숙한 번호를 기다렸지만 20분이 넘는 배차 시간은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서울 버스가 참 좋았구나’ 따위를 생각하다가 마침내 도착한 버스에 올랐고, 금남로에서 내렸다. 전남대학과 조선대학을 잇는 번화가이자 옛 전남도청 소재지였던 그곳. 아직도 80년 5월의 상흔이 남은 그곳에, 광주 민주화 운동 기록관이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우리나라의 민주화”는 물론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주화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전환기의 정의’라는 과거 청산에 가장 모범이 되는 사례”[1]임을 인정받아 2011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되었다. 그리고 그 기록들이 모인 곳이 바로 여기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이다. 이제 광주는 평화롭고 5.18은 민주화 운동으로 공인받았으며 유네스코가 인정까지 해주었다. 그렇게 다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현실은 영화가 아니었고, 내가 본 5.18 민주화 운동 기록관은 단순한 박물관이라기보다도 ‘기억’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1층에서 가볍게 방문명부를 작성하고 난 후에, 약간은 비장한 마음으로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5.18의 역사를 적어둔 벽면을 지난 후, 내가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5.18 당시 사망한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이름과 출생연도, 직업까지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시민’이었다. 다만 한가지, 그들의 사망원인이 총상(견동맥 관통상), 총상(흉부관통), 다발성 타박상이라는 점만 빼면. 그런 그들 앞에 누군가가 가져다 둔 국화 한 송이가 놓여있었다.

1층은 계속해서 5.18의 비극을 조망했다. 시신을 옮기기 위해 임시로 마련한 손수레에는 무엇을 나르던 것인지 ‘요금 1개당 200원’이라고 쓰여있었고, 트럭 뒤에 쌓인 시신들을 형상화한 조형물 앞에선 그것이 인형인 줄 알면서도 눈을 질끈 감고 빠르게 통과해야 했다. 항쟁으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끔찍한 이 사건들을 직접 마주한 심정은 어땠을까? 그래서 광주 시민들은 총을 들었던 것이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다는” 그들의 눈빛이 아직도 형형하다.

그렇게 나는 조금 더 비장해진 마음으로 2층을 향해 올라갔다. 이곳에는 6학년 어린아이의 일기부터 기자들의 취재 수첩, 결의문과 신문까지 수많은 기록이 전시되어 있다. 총을 들지 않는다고 투쟁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이제 투쟁은 ‘기록’으로 확장되고, 이는 다시 ‘기억’으로 이어진다. 각자의 글마다 형식과 목적이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한 가지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간절함’이었다. 우리의 비극을 알리고 싶다는 하나의 열망으로 모인 그 글들은 지금까지 남아 우리를 5.18의 기억으로 초대한다.

하지만 기억을 향한 국가의 억압 역시 집요했다. 시민군이 마주한 절망이 계엄군의 총칼이었다면, 기록과 기억이 마주한 것은 검열이었다. 1980년 6월 2일 전남매일신문 1면에 실린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긴 시는 누군가의 빨간 사인펜에 의해 깨끗이 표백되어 「아아, 광주여」라는 제목으로 실려야 했다. 그리고 그 펜은 계속해서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에서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을 지웠다. 그렇게 광주의 죽음과 피눈물 역시도 지워져 갔다. 그때 시인과 광주 시민이 느꼈을 상실감과 분노는 어느 정도였을까.

그러나 다행히도 그들의 기록은 영영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지금 이곳에서 다시 펼쳐져 새로운 기념의 장을 벌인다. 이것이 ‘기록’과 ‘기억’이 가지는 힘이다. 마침내 이 힘은 5.18을 확장하고, 우리를 인류사의 수많은 비극과 자유를 향한 투쟁으로 이끈다. 3층은 마그나카르타부터 여성 참정권 운동, 넬슨 만델라의 투옥과 용서, 투올슬렝 학살 박물관까지 수많은 투쟁과 비극에 관련된 문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나는 그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1980년의 신음과 그들의 신음을 상상해보았다.


마침내 전시관의 끝에는 다다랐다. 그리고 그곳에는 우리들의 기록이 큰 종이 위에 펼쳐져 있었다. 방명록이었다. 나는 그곳에 괜히 ‘고대문화’라고 적어두었다가, 이내 ‘민철 왔다 감’이라고 고쳐 적어두고 길을 나섰다.


이제 기록관을 나왔다. 괜히 허해진 마음으로 터벅터벅 왼쪽으로 걷다 보니 헬기의 총 자국이 남아 있는 전일빌딩이, 그리고 그 옆으로 시계탑과 전남도청이 옛 건물 그대로 우리를 반긴다. 한때 피로 물들었을 그 공간은 이제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Asia Culture Center)이 되었다. 이제 총소리 대신 현악 4중주가 흐르는 그 공간에서는 매년 청년축제가 열리고, 모자를 뒤집어쓴 소년은 보드를 타고, 커피 한 잔을 손에 든 사람들은 마스크 안으로 웃으며 길을 걷는다. 그러다 가끔 눈을 들어 전남도청과 시계탑과 시체가 쌓여있던 상무대를 바라보기도 한다. 그리고 매년 5월이 되면 그곳은 다시 붐빌 것이다. 그것이 광주 시민들이 5.18을 기억하는 방법이다.

앞으로 시간이 영영 흘러 이 글을 읽는 모두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도, 그때의 광주 시민들은 헤어지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다음 주에 시계탑 앞에서 만나자.” 아니 나는 시계탑이 사라져버려도 말할 것이다. “우리 꼭 시계탑 앞에서 만나자. 꼭.” 그것이 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방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당신을 이곳,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으로 초대하고 싶다.


덧,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종종 아니 자주 무기력해지곤 했다. 이는 여전히 진행 중인 비극을 앞에 두고, 과거의 비극을 적어야 하는 모순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이뿐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이 마음이 그저 비겁한 자기 위로이지는 않은가 계속해서 되물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5.18이 그랬듯, 그들 역시 언젠가 기억과 기념을 이야기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날이 오기를 목 놓아 기다릴 것이다. 그때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용서를 위한 자그마한 지침서II”와 그 부록을 저항할 수 없는 폭력 앞에 맞서 싸우다 쓰러져간 미얀마의 시민들에게 바칩니다.


편집위원 민철 / a40034136@gmail.com



[1] 5.18 민주화운동기록물 등재의의. 5.18 민주화운동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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