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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을 넘어— 비인간과 공존하기

[칼럼] 편집위원 하영

지난 2024년 12월 29일 제주항공 2216편 여객기가 무안공항에서 착륙을 시도하던 중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의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여전히 조사 중이지만, 최초 원인은 조류 충돌로 알려졌다. 국토교통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는 공항 감시 카메라로 항공기가 조류와 접촉하는 장면을 확인했으며, 엔진에서는 가창오리의 깃털과 혈흔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무안공항 인근은 창포호, 무안저수지, 청계만 , 무안갯벌습지보호구역 등 철새 도래지가 집중되어 있다. 또한 2022년 활주로 확장을 위해 실시한 무안공항 환경영향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공항 13km 이내에는 철새 도래지 4곳이 있다. 세계적으로 항공기와 조류충돌의 약 99%가 공항 반경 13km 내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자연재해’라고 부르기 어렵다. 게다가 인근에 머무는 겨울 철새가 전체 조류의 절반임에도 불구하고, 환경영향평가 당시 겨울 조사는 시행조차 하지 않았다.[1]


그러나 항공기의 조류 충돌 위험은 무안공항만의 것은 아니다. 공항에 적합한 입지 조건은 인근에 장애물이 없고 소음 피해가 적은 바닷가인데, 이는 조류가 서식하는 조건과 어느 정도 일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공항으로 추진 예정인 가덕도와 새만금 역시 인근에 철새 도래지가 위치한 곳들이며, 새만금은 무안공항보다도 조류 충돌 위험이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미 국내에 운영 중인 대구공항 또한 무선 폭음경보기를 설치하여 주기적으로 큰 소리를 내어 새를 쫓으며, 상황이 긴박해지면 사살하기도 한다. 또한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의 공항들이 조류 충돌 방지를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일명 ‘허드슨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US 에어웨이즈 1549편 사고 이후 미국은 사고 원인으로 밝혀진 캐나다 거위의 개체수 조절을 위해 대규모 살처분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2] 즉, 대부분의 공항이 취하는 ‘조치’라는 것은 조류를 계속해서 내쫓으며 ‘필요한’ 상황에는 적절히 사살하는 일이다.[3]


인간 동물은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을 짓고, 다시 공항을 짓기 위해 조류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안전하게’ 이용하기 위해 그들을 내쫓는다. 이번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뉴스에 오르락내리락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조류 ‘퇴치’이며, 새들은 항공기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로 묘사될 뿐이다. 그들의 죽음은 애도하지 않는다. 분명 지구의 원주민은 인간 동물보다는 조류와 같은 비인간 동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간의 영역’을 만들고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도시는 인간의 영역?


인간이 거주하기 위한 도시를 건설하는 과정은 수많은 비인간 존재를 ‘보이지 않게 배치’하는 과정과 다름 아니다. 특히, 한국의 발전주의 도시화 과정은 ‘한강’이라는 존재, 그리고 그 안의 비인간을 “국가 영역의 도시계획 아래에 의도적으로 보이지 않게 배치”했다. 김준수(2018)는 한국의 발전국가가 한강에 대한 ‘틀 짓기’를 통해 근대적 수변공간이자 북한의 침투 경로로 활용된 한강에 대해 영토적 경계 짓기를 시도했다고 말한다.


1960~1970년대 한강이 미개발되었던 시기는 매년 서울에 지속적인 홍수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당시 정부의 과제는 홍수에 대한 통제와 안정적인 급수였다. 또한 1970년대에 본격화된 여의도 개발을 실현하기 위한 과제로 떠오른 것이 바로 한강의 홍수와 수위를 조절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강에 대한 통제의 핵심은 홍수 조절과 서울의 취수원 확보였다.[4] 1968년부터 1970년까지 한강개발3개년계획은 약 462억을 투자하여 강변도로를 건설하고, 여의도를 개발하는 등 근대 도시를 건설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또한 홍수 통제와 함께 한강 개발의 중요한 요소는 바로 수질이었다. 1970년대 본격화된 개발과 홍수 피해로 인해 한강의 수질이 매우 악화된 것이다. 이에 당시 제시된 해결책은 “상수도 취수원을 한강 상류 쪽으로 이동시키는 것”과 “상수도 시설을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즉, 개발 과정에서 오로지 인간의 편의를 위해 한강이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변형하려고 한 것이다.


지속적인 홍수와 취수원 확보 문제를 넘어 축적 전략으로서의 한강 개발 담론은 1979년과 1981년에 급격한 변화를 맞는다.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가 확정되자, 1982년부터 본격적으로 한강종합개발계획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한강종합개발계획은 이전과 달리 “한강을 되돌린다”는 담론을 형성하여 수질 악화나 홍수 문제에서 벗어나 “통제 가능한 강”의 모습을 한강의 본래 모습으로 상정하였다.[5] 한강이라는 비인간 존재를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으로 포섭하기 위한 시도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한강은 서울뿐 아니라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를 지나는 엄청난 규모의 강이지만, 발전주의 도시화 담론을 거치며 우리는 한강을 ‘서울의 강’으로 상상하게 되었다. 또한 한강의 다양한 생태와 상-하수도 시설은 다분히 서울을 중심으로 계획되고 조정되어 왔다. 따라서 한강은 단순히 국가와 분리된 ‘순수한’ 자연이 아니며, 국가에 의한 영역화가 꾸준히 이루어져 온 존재이다. 결국 그 과정에서 다양한 물질적·생태적 특성을 가진 한강은 그 맥락이 지워진 채, 발전주의적 전략 속 축적의 대상으로서만 여겨졌다. 즉, 발전주의 도시화 과정에서 국가는 “한강이라는 자연물에 대해 중앙집중화 전략과 공간적 영역화 전략”을 취한 것이다.


인간이 원하는 대로 공간을 영역화하는 또 다른 대표적인 예시는 바로 그린벨트 제도이다. 그린벨트는 개발제한구역으로, 도시의 무질서한 확산을 막고 환경을 보전하기 위해 설정하는 녹지대를 뜻한다. 그러나 1971년 그린벨트가 처음 도입되었던 배경에는 박정희 정부의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공사에서는 도로 폭을 넓히고 직선화 등을 하기 위해 토지 수용이 중요한 문제였다. 이에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은 토지구획사업을 통해 땅을 확보할 것을 지시했다. 이때 정부는 체비지[6]를 팔아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체비지에 대한 양도소득세를 면제하여 적극적으로 판매하려 했다. 그러나 1969년까지도 체비지가 잘 팔리지 않자,[7] 1970년 서울시 연두 순시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구두로 그린벨트 정책 도입을 지시했다고 한다.[8] 그린벨트로 개발제한구역을 만들어 민간 자본이 체비지에 투입되도록 유도한 것이다.


물론 그린벨트 제도의 긍정적 효과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1992년부터 ‘토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한다’ 등의 논리로 인해 본격적으로 그린벨트 해제 담론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실제로 그 이후 그린벨트는 조금씩 해제되었다.[9] 특히 1998년 헌법재판소가 토지재산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이유로 그린벨트 관련 법규인 도시계획법 21조에 대한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린 이후, 서울시 면적의 2.6배에 이르는 그린벨트 면적이 해제되었다. 또한 최초 설정 이후로 그린벨트를 신규로 설정하거나 조정한 적이 없기 때문에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계속해서 조금씩 해제되고 있을 뿐이다.[10] 결국 그린벨트 또한 자연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라그러한 기능을 일부 수행할지라도국가의 이해관계에 따라 구분되고 영역화하기 위함이다.


한강에 대한 포섭 전략, 그리고 그린벨트와 같이 도시와 자연을 구분짓고 영역화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도시를 인간에 의해 완전히 정복된 공간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는 인간이 정복한 ‘도시’와 도시 바깥의 순수한 ‘자연’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이어진다. 그러나 ‘도시’라는 공간과 비인간 존재는 인간의 뜻대로 쉽게 포섭되고 구분되지 않는다.


도시의 비인간: ‘더러운’ 비둘기에 대해


도시화 과정에서 이루어진 비인간 존재에 대한 포섭과 영역화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여전히 비인간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혼종적인 공간이다. 도시의 대표적인 비인간 동물을 꼽자면, 바로 비둘기일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친숙한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비둘기에 대한 인식은 그리 좋지 않다.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 ‘더럽다’, ‘눈이 무섭다’ 등의 여러 이유로 인간은 비둘기를 ‘닭둘기’라는 표현으로 희화화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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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도시의 비둘기들 ⓒ뉴시스

공원에 있는 한 분수에 비둘기가 모여 있다. 비둘기들은 물을 마시거나 몸을 적시거나 가만히 앉아 있다. 그림 설명 끝.

출처: https://www.insight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89287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회색비둘기는 집비둘기의 한 종류이지만, 대부분의 비둘기는 야생종이 아니라 개량된 품종이다. 따라서 한국의 도시에서 발견되는 비둘기는 경주용 비둘기나 양비둘기 등의 교합으로 탄생한 혼종적인 비인간 존재이다. 사실 한국에는 양비둘기라 불리는 ‘토종 비둘기’가 있었지만, 도시의 집비둘기와는 달리 멸종위기종으로 관리되어 2014년부터 환경부가 보전 및 복원 사업을 진행 중이다. 이런 ‘멸종위기종’과 달리, 우리가 도시에서 보는 비둘기는 주로 ‘더럽고’ ‘인간을 무서워하지 않는’ 존재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도대체 비둘기는 언제부터 도시에 살게 되었을까.


사실 비둘기는 본래 평화의 상징으로, 국가 혹은 개인 간 화합의 의미에서 선물로 주고받는 경우가 흔했다. 한국에서는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에 비둘기를 날리기 위해 초중고 학생들의 특별활동으로 ‘비둘기 사육시간’을 마련했으며, 비둘기 레이스를 위해 세계 각국에서 비둘기를 보내기도 했다. 이때 비둘기는 가족과 자연, 그리고 평화의 상징으로 국가의 메가이벤트에 동원될 수 있었기 때문에 ‘비둘기 모이주기 운동’, ‘비둘기 집지어주기 운동’ 등이 확산되었다. 한편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회색빛의 집비둘기가 동원되었지만,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집비둘기의 회색빛이 시각적 효과가 작다”는 이유로 백색비둘기로 교체되었다(이는 오늘날 우리가 회색 비둘기 사이에서 백색 비둘기를 종종 발견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11] 심지어 개막식에서는 시작과 함께 비둘기를 날렸는데, 경기장 상공을 비행하던 비둘기 일부가 성화대로 날아가 타 죽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12] 이렇듯 국가는 개체 수를 늘리기 위해 각종 사업을 펼치고, ‘미관’을 위해 교체하며 비인간 존재를 동원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동원이 비둘기의 개체 수 증가를 야기했고, 비둘기로 인한 오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철새로 인한 조류독감 공포가 확산되며 비둘기를 비롯한 조류는 ‘질병’, ‘더러움, ‘오염’의 상징이 되었다. 게다가 비둘기 배설물로 인해 탑골공원 원각사탑이 훼손되는 문제가 제기되자, 본격적으로 비둘기는 ‘질병의 매개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에 환경부는 2009년 집비둘기를 ‘유해동물’로 지정하여 환경공해를 막기 위해 연구 용역 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비둘기에 대한 사회적 거부반응과는 달리 개체 수 조절을 위한 구체적 방안 등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각 지역에서는 타지역으로 비둘기를 쫓아내는 방식을 주로 취했다. 여전히 비둘기에 대한 대책은 곳곳에 걸린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 현수막 따위에 불과하다. 결국 결론은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말고 ‘야생’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비둘기에게 ‘돌아갈 야생’이라는 공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


도시와 야생 사이: 축산업의 동물들


한편, 도시 바깥에서 보이지 않도록 가려지는 또 다른 비인간 동물은 바로 축산업의 동물이다. 이들은 도시 내부에도, 그리고 도시 바깥의 ‘야생’이라 상상되는 공간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공장식 축산은 “‘규모의 경제’[13] 원리에 입각한 제조업의 대공장 모델을 ‘동물 농사’에 적용한 것이며, 대규모의 단일종 동물을 비좁은 시설에 감금하여 표준화된 절차로 사육한 후 대량 ‘수확’”한다.[14] 축산업에서 사육당하는 비인간 동물은 시멘트, 철제 발판 등으로 만들어진 우리에 욱여져 어둠 속에 방치된다. 또한 그들은 ‘맛있는 고기’가 되기 위해 신체적 한계에 이를 때까지 품종 개변을 당한다. 젖소의 유방은 몸이 버티지 못할 만큼 많은 젖을 생산할 때까지, 칠면조나 닭은 자신의 가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때까지, 돼지가 자신의 네 발로 체중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까지. 또한 오리의 부리는 마취 없이 절단되어 질병에 쉽게 노출되며 먹이를 섭취하고 깃털을 고르기 매우 힘들어진다. 결국 축산업 농장의 동물들은 농양, 타박상, 정신질환 등을 앓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은 공장식 축산업이 유달리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농장 동물들에게 가해지는 품종 개변과 그로 인한 고통은 모두 대량생산과 공급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동물에게 장애를 입히는 일은 “동물산업에서 행해지는 작업과 이윤창출에 반드시 필요”하며, “인간의 이용목적을 위해 기계처럼 고기와 우유, 계란을 생산하도록 만들어”지는 것이다.[15]


비인간 동물에 가해지는 불필요한 착취와 고통은 이윤·자본 축적을 1순위의 목표로 삼는 자본주의 경제 속에서 발생한다. 자본주의 이전 전통사회에서 길들여진 비인간 동물은 ‘놓아기른다’는 의미의 목축{animal raising} 대상이었을 뿐, 가축의 수를 인위적으로 증가시키기 위한 목적이 우선은 아니었다. 특히 농경민에게 가축의 증가는 먹여 살려야 할 ‘식구’의 증가와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농경이 발달하여 쌀 문명권에 속했던 동아시아는 목축 활동이 미약한 편이었다. ‘축산’이라는 형태가 발전하기 시작한 북유럽 또한 소와 돼지 등의 목축을 겸했으나, 전통사회와 마찬가지로 자급·생계농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상인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도시인의 소득 증가는 낙농품에 대한 수요 증가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우유를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젖소 품종 개변이 시작되었고, 쇠고기 소비가 증가하며 육용 개변도 본격화되었다.[16] 또한 1930년대 미국 양계업을 시작으로 밀집된 장소에서 감금하여 키우는 공장식 축산업의 형태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국의 축산업은 “근현대 한국경제의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빠른 속도로 산업화되면서 나타난 사회·경제적 모순을 품는 한편, 세계 농축산 기술체계와 자본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17] 공장식 축산업은 자원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는 동시에 최대한의 상품을 생산하려는 자본주의 경제적 목적에 부합한다. 국내 육류 소비량은 2022년 쌀 소비량을 추월하였고,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소비량을 감당하기 위해 축산업은 ‘효율’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비좁은 축사에서 밀집 사육되는 비인간 동물에게는 비육을 위한 사료가 주어지며,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그들은 법적 규제 연령에 도달하면 곧바로 도축된다.


한편 공장식 축산업은 가축전염병과 살처분 문제와도 직결된다. 비좁고 햇빛이 들지 않는 공간에서 밀집된 채로 사육당하는 비인간 동물은 스트레스 지수가 높고 면역력이 약해 질병에 취약하다. 결국 질병을 막기 위해 항생제 투여량이 증가하고, 다시 면역력이 저하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18] 2010년 구제역이 신고되자 인간이 사육하던 소, 돼지, 염소, 양, 등의 동물 중 347만 9,962명(命)이 땅 아래 매장되었다. 감염이나 증상 여부에 상관없이 구제역이 신고된 농장 반경에서 일정 반경 이내에 위치한 농장의 동물은 모두 살처분되었다. 구제역은 어린 개체에게는 치명적일 가능성이 있지만, 성체는 길어야 보름 안에 자연 치유되며 사망률은 5% 이하이다. 실제로 농경시대에도 구제역은 소를 잠시 쉬게 하며 병이 회복되길 기다렸던 질병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살해당한다. 구제역은 더 이상 비인간 동물의 ‘병’이 아니라, 생산성과 경제성 차원의 문제가 된 것이다.


공장식 축산업에서 비인간 동물의 목숨은 ‘생명’이 아니라, 농·어민들의 ‘재산’으로만 여겨진다. 2024년 기록적인 폭염으로 돼지 61,000명, 가금류 996,000명 등을 포함하여 1,057,000명이 폭염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이들이 비좁은 공간에서 폭염에 사망할 때까지 무엇을 겪었을지는 고려되지 않는다. 집계된 수치조차 ‘농어민들의 재산 피해’를 나타내는 지표로써 사용될 뿐이다.[19] 각종 전염병으로 인한 살처분이 이루어질 때도, 이들의 죽음은 재산 피해로 환원되어 농·어민들의 안타까운 사정으로 다뤄진다. 결국 공장식 축산업의 비인간 동물은 생명이 아니라, 그저 재산이다.


또한 이들의 죽음이 ‘질병의 매개’라는 이유로 정당화된다는 점에서 도시의 비둘기와도 맞닿아 있다. 비둘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며 여러 지자체에서 개체수를 줄이기 위해 비둘기를 죽이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또한 비둘기에 대한 혐오의 원인사람을 피하지 않고, 거리를 걸어다닌다 등은 비둘기가 도시의 환경에서 다치고 장애를 입었기 때문에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손상의 역사는 지워진다. 이는 “최적의” 동물만 살아남는다는 인간의 관념과도 연결되는데, 이에 따라 ‘병들고 약한’ 동물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죽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것이다. 결국 도시와 공장식 축산업의 비인간 동물들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동원되다가도, 이들이 ‘약해지고’ ‘병들면’ 죽어도 되는 존재로서 언제든 살해당한다.


공장식 축산업의 실상을 알게 된 사람들은 대개 동물에게 ‘불쌍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 동정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여전히 인간이 다른 종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으로, 그들의 고통을 ‘위’에서 관조하고 동정할 뿐이다. 또한 공장식 축산업에 문제의식을 느낀 인간들은 동물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이들을 ‘야생’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도시의 비둘기에게, 공장식 축산업의 동물에게, ‘돌아갈 야생’이란 존재할 수 있을까?


‘야생’이라는 환상


야생은 주로 ‘인간의 개입이 없는’, 도시 바깥의 산이나 들과 같은 공간으로 상상된다. 하지만 야생동물이 살아가는 공간은 인간 중심적인 분리와 영역화에 따라, 인간이 사용할 공간을 제외한 후 ‘남겨두는’ 것에 불과하다. 아프리카의 ‘야생동물’은 밀렵꾼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관리하는 보호소에 거주한다. 바다와 하늘도 인간의 다양한 활동음파 탐지, 비행기, 어업 등에 끊임없이 영향받고 새롭게 구성되고 있다. 결국 “인간이 모든 곳을 장악하고 있다. 인간은 동물을 위해 어떤 서식지를 보호할지 결정하며,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서식지만 동물에게 남겨준다”[20]는 누스바움의 말처럼, 인간이 상상하는 ‘순수한’ 야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정부가 ‘보호’하는 야생동물(주로 멸종위기종)과 달리, 인간의 영역에 등장한 야생동물도심에 나타난 멧돼지나 동물원에서 탈출한 동물 등은 ‘침투’한 것으로 여겨지며, 포획되거나 살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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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지하철역에서 사살당한 멧돼지 경남소방본부

지하철역 승강장 구석에 사살된 멧돼지가 누워있다. 그림 설명 끝.

출처: https://www.segye.com/newsView/20241030505785?OutUrl=naver


2024년 10월 29일 경남 양산시에 출몰한 멧돼지는 부산도시철도 2호선 호포역 승강장에서 사살당했다. 이 멧돼지에 대한 사살은 ‘난동’을 피우고, 도시를 ‘습격’했다는 표현으로 정당화되었다. 물론 멧돼지는 분명 인간에게 위협을 가했으며, 한 행인이 오른팔을 물려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습격’과 ‘난동’이라는 표현만으로 이들에 대한 사살을 정당화하는 것은 그들이 어떻게 도시에 출현하게 되었는지를 가려버린다.

멧돼지의 개체수가 증가한 배경에는, 일제강점기 호랑이가 착호군[21]을 피해 연해주로 이동하며 멧돼지와 고라니 등의 초식·잡식 동물의 개체수가 급증한 역사가 있다. 그런데 도시화가 진행되며 서식지가 점점 줄어들자, 이들이 ‘인간’의 영역인 도시에 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우리는 도시의 비인간 동물을 ‘야생’으로 돌려보내려고 하지만, 사실상 (인간이 상상하는) 야생의 동물 또한 점점 도시로 밀려드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인간은 “호랑이에게 겨눈 총구를 그들에게 돌”리기 시작했다.[22] 따라서 ‘습격’과 같은 표현은 도시까지 밀려나게 된 그들의 역사를 가린 채 멧돼지를 인간의 영역에 침투한 비인간 동물로 만든다.


인간 동물이 도시에서 비인간 동물과 접촉할 때, 인간 동물의 주된 공간적 실천은 ‘경계 짓기’이다. 더 이상 야생동물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더 높은 울타리를 쌓고, 이동 통로를 차단하고, 서식지를 제거하고, 혹은 멧돼지의 경우처럼 사살한다.[23] 도시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 그러니까 ‘제자리를 벗어난 동물’로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비인간 동물을 인간의 영역에서 배제하고 제거함으로써 도시는 계속해서 인간만의 공간으로 재구성되며 상상된다.


그러므로 비인간 동물을 단순히 ‘야생’으로 돌려보내자는 주장은 결코 그들을 위한 주장일 수 없다. 이는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 자연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환상에 불과하다. 인간 동물의 책임은 인간에 의해 손상되고 재구성된 비인간 동물의 역사를 인정하고, 이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 고민하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코끼리와 같은 야생동물들은 정부의 보호가 없다면(물론 지금도 밀렵꾼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인간에 의해 멸종할 가능성이 높다. 인간의 개입이 없는 순수한 ‘야생’이라는 환상적 공간을 동물의 자리로 설정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 동물에 의해 손상되고 재구성된 역사를 지우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동물의 자리는 과연 어디일까. 우리는 어떻게 비인간 동물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동물의 자리”는 어디일까


생추어리{sanctuary}는 야생으로 돌아갈 수 없는 동물들이 시간이 흘러 죽을 수 있을 때까지 보호하기 위한 공간이다. 일시적인 기간 동안 치료 및 보호 후 다시 돌려보내는 일반적인 보호센터와는 달리, 생추어리는 그들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보호한다. 생추어리는 단순히 심하게 다쳐 야생에서 살아남기 힘든 동물을 보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비인간 동물에게도 착취당하지 않고, 고기가 되지 않고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알리는 데 의미가 있다. 동물권 차원의 생추어리가 처음으로 주목받은 계기는 1986년 미국의 동물보호 활동가 진 바우어가 가축수용소 인근 사체 처리장에서 ‘힐다’라는 양을 구조하여 생추어리 농장을 만든 것이다. 힐다는 몸이 허약해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산 채로 버려졌지만, 11년 뒤인 1997년에 생추어리에서 자연사하였다. 진 바우어는 힐다의 묘비에 “동물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의 책임이 바로 우리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적었다.[24]


국내에서 첫 번째로 만들어진 생추어리는 2020년 동물권 단체 DxE 활동가들이 구조한 ‘새벽이’와 ‘잔디’가 거주하는 ‘새벽이생추어리’이다. 그 외에도 ‘달뜨는 보금자리’, ‘제주 곶자왈 말 보호센터’,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등 약 네 곳이 있다. 이곳에는 각각 공장식 축산업에서 구조한 소, 도살 위기에 처했던 은퇴 경주마, 식용으로 길러졌던 곰들이 살고 있다. 현재 국내에는 정부나 지자체가 운영하는 생추어리는 따로 없기 때문에, 네 곳 모두 동물권 단체 혹은 개인이 운영 중이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곳의 동물들에게는 모두 인간에 의해 손상된 역사가 있다는 점이다. 생추어리는 이 동물들이 늙어 죽을 때까지 돌봄을 제공하고 보호하는 공간이다. 만약 생추어리가 단지 동물을 보호하는 공간이라면, 동물원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불과 몇 년 전의 ‘푸바오’ 열풍을 떠올려 보자. 야생 판다 전문가 왕 따쥔{Wang Dajun} 교수는 “인간은 과학적 이유로, 또는 생태학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판다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판다가 가진 귀여운 얼굴과 정치적 중요성 때문에 보호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물론 멸종위기종이었던 판다의 개체수를 회복하려는 노력이나 (어떤 형태든) 사람들의 사랑이 변화시킨 것들이 분명 있다. 야생 판다를 밀렵하는 사냥꾼이 줄었고, 중국은 일명 ‘판다 외교’를 위해 판다의 서식지를 지키고자 1990년대 판다 서식지 벌목을 금지했으며 보호구역을 지정하기도 했다.[25] 그러나 인간이 사랑하는 건 “사람에게 길들여지고, 온순하고, 무해하고, 더 나아가 사람을 닮아가는” 동물이다. 이는 사람들이 개나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을 아끼는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림3].png


[그림3] 푸바오 영상에 달린 댓글

푸바오 유튜브 영상에 달린 한 댓글. “푸바오의 판생에 이렇게 천진난만하고 행복하게 사랑받은 시절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앞으로 살아가면서 이 기억들이 항상 힘이 돼줬으면 좋겠다. 강바오 할부지가 말씀하셨듯, 우리의 영원한 아기 판다 푸바오 사랑해”라는 내용이다. 그림 설명 끝.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8RUrjZoxiW8


인간이 집에서 기르는 반려동물이나 푸바오는 영원히 ‘아기’이다. 아마 시간이 더 흘러 푸바오가 세상을 떠날 나이가 되어도, 우리는 여전히 푸바오를 ‘아기’로 여길 것이다. 마치 우리가 반려동물을 영원히 아기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판다를 포함한 동물원의 동물은, 인간에 의해 손상된 역사와 그들이 동물원에 가기까지 발생한 폭력을 삭제한 채 무해하고 평화로운 동물로서 소비될 뿐이다. 게다가 ‘푸바오스럽지 않은’, 그러니까 사랑받고 소비되지 않는 동물은 열악한 환경에 놓인다. 결국 동물원은 ‘소비’의 공간이며, 그곳의 동물은 인간과의 복잡한 역사가 표백된 ‘상품’으로서 전시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추어리는 인간에 의해 손상된 역사를 간직할 수밖에 없다. 생추어리의 활동가들은 ‘먹히지 않는’ 산업동물을 돌보는 데 익숙하지 않다. 이들을 돌보기 위해서는 ‘농장’으로 등록해야 하는데, 만약 인근 농장에 구제역과 같은 전염병이 신고될 경우 감염 여부에 상관없이 무조건 살처분당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들이 감기와 같은 질병에 걸렸을 때 대처할 방법을 아직 명확히 알지 못한다.


“네 살이 된 1톤이 넘는 소를, 고기가 되지 않을 소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수의사들은 잘 알지 못했다.”[26]


실제로 달뜨는 보금자리의 소들이 감기에 걸리거나 넘어져 인대를 다쳤을 때, 수의사들은 별다른 치료를 해주지 못했다. 한국의 수의학 교재에는 “산업동물은 경제논리에 따르며 개체의 치료보다 집단의 질병관리가 더 중요하며 사람의 건강과 관련해 동물은 살아 있을 때보다 죽은 다음 관리가 더 중요하다”고 적혀 있다고 한다.[27] 돼지와 소와 같은 동물이 ‘늙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며, 그러므로 그들이 질병에 걸렸을 때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결국 활동가들은 그저 동물이 아프지 않길 바라며 최대한의 돌봄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


또한 생추어리의 동물은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여전히 그들의 삶에 개입하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완전한 야생이라는 공간이 존재할 수 없는 시대에, 생추어리는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바로 인간에 의해 손상된 그들의 삶을 얼만큼, 어떤 식으로 회복하고 돌려줄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동시에 인간이 어떻게 그들의 삶에 책임감을 갖고 공존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생추어리도 결코 그 자체로 완성된 공간이 아니다. 그러나 생추어리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가능성의 공간이 될 수 있다. 생추어리를 운영하는 활동가들, 그리고 그곳에 방문한 『동물의 자리』의 저자들은 모두 비인간 동물과의 정동을 경험한다. 인간 동물은 언제나 ‘응시하는’ 존재로서 상상되지만, 생추어리에서 이들은 비인간 동물에게 ‘응시당하는’ 경험을 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인간 동물만이 주체로 존재하던 세계에 비인간 동물도 동등한 주체로 편입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생추어리의 동물들은 산업 구조 속 추상화된 ‘동물’이 아니라, 고유한 개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 생추어리의 동물들은 사소한 습관·좋아하는 음식·성향 등이 모두 다르며, 인간 동물도 이들을 모두 구분해낸다. 그러니까. 생추어리의 동물들은 개별적인 존재로서 인간을 마주하고 함께 관계를 맺는 것이다.


“축사에 갇히지 않은 소가 흙을 밟고 네 발로 겅중겅중 뛰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소가 운동장을 달리고 흙바닥에 누워 쉬는 것만으로도 그 ‘살아있음’이 자랑스러웠다.[28]
“돼지는 다양한 풀을 탐색한다. 냄새로 세상을 느낀다. 진흙 목욕을 좋아한다. 지푸라기가 필요하다. 햇빛 아래서 낮잠 자는 것을 좋아한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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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2025년 2월 3일, 다섯 번째 생일을 맞이한 잔디 ⓒ새벽이생추어리

밝은 낮, 나무가 우거진 풀숲에서 잔디가 서 있는 채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그림 설명 끝.

출처: https://blog.naver.com/dawnsanctuarykr/223745190687


우리는 돼지나 소와 같은 산업동물을 고통당하고, 도살당하고, 고기가 되는 존재 외에 상상하는 법을 모른다. 따라서 먹히지 않고 늙어가는 동물들, 그리고 그들이 사는 보금자리의 존재는 우리의 마음에 균열을 내는 질문일 것이다. 우리는 아직 생추어리가 던지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 다만 자신의 집을 갖길 원하고, 진흙에서 목욕하길 좋아하고, 밤에 마을을 몰래 돌아다니기도 하는 삶의 기쁨을 알아야 할 책임이 있다. 그때서야 비로소 인간 동물이 비인간 동물의 삶에서 무엇을 앗아갔으며 무엇을 돌려줘야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추어리는 동물을 위해 준비된 완성된 공간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위한 “가능성의 공간”이다.[30]


모든 존재는 유해하다


공장식 축산업을 비롯하여 동물을 착취하는 체제에 맞서는 것을 비거니즘이라 부른다. 비거니즘은 공장식 축산업뿐만 아니라 동물 실험이나 동물성 제품, 그리고 크게는 동물에 대한 착취에 저항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인간의 착취는 비인간 동물에 멈추지 않는다. 단일 품종 재배를 위해 다양성이 사라진 작물들, 제초제에 죽어가는 토양과 동식물, 음식이 식탁에 오르기까지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떠올려 보자. 따라서 육식을 완전히 멈춘다고 해서 모든 착취와 고통이 해결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비거니즘이 운동이자 실천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어떤 존재의 고통과 죽음은 당연시되는 체제, 그리고 무수한 생산을 위한 무수한 착취에 조금이나마 균열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영원히 유해할 것이다.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어떤 존재를 몰아내고, 먹고 살기 위해 끊임없이 착취하는 행위는 비인간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지극히 인간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이다. 그 폭력을 ‘비인간적인 것’으로 타자화하며 비거니즘을 ‘인간적인 것’ 혹은 ‘무해한 것’으로 여긴다면, 이는 인간의 이름으로 베푸는 아량과 다름없다. 따라서 비거니즘은 무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나아가 존재의 유해함을 인정하기 위함이다. 예컨대 비인간 동물을 위한 생추어리를 짓는 것은 그곳에 살고 있던 또 다른 비인간 존재를 몰아내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의 책임은 무해함이라는 ‘환상’ 대신 유해함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물론 모든 것을 무해함과 유해함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바라보자는 뜻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체제에 균열을 내고자 할 때, 그리고 그 체제에서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존재와 연대하고자 할 때, 유해함을 기꺼이 마주하고 껴안아야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애초에 모든 존재는 타자에(게) ‘민폐’를 끼치며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거니즘은 단순히 무엇을 먹고 소비할 것이냐의 문제를 넘어, 비인간과의 근본적인 관계 변화를 요구한다. 우리가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행하는 착취와 억압은 결국 비인간 동물을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로 보는 것에서 비롯된다. 동시에 비인간 동물을 동정하기 때문에 베푸는 아량 또한 인간 동물이 더 우월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과 비인간의 불평등한 관계를 성찰해야 하며, 유해함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그 성찰의 전제이다. 어떤 존재와의 관계에서 무해함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할 때, 비로소 인간 동물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우리가 살기 위해 딛고 서 있는 생명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육식보다는 채식을 먹고, 화장품을 구매할 때도 비건 제품을 선택하는 등 일상 속에서 비거니즘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 외출할 때면 목적지 주변에 비건 식당이 있는지 검색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나는 육식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공장식 축산업과 같은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육식의 ‘방식’에 반대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동물이든 식물이든 무언가를 음식으로 취해야만 살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저항해야 하는 것은 “포식 자체가 아니라 포식을 구성하는 특정한 사회적 틀”[31]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저항의 실천으로서 비거니즘을 제안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에게 완전한 채식을 하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당신의 일상 속에서 할 수 있는 실천과 애도에 비거니즘이 하나의 방향이 되길 바랄 뿐이다.


동물의 고통을 말할 때, 혹자는 나에게 “동물을 참 사랑하는구나”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내가 ‘유난히’ 비인간을 애정하여, ‘유난히’ 슬퍼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되묻고 싶다. 너는 무엇을 슬퍼하고, 무엇을 슬퍼하지 않는가. 왜 어떤 타자의 고통과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 되는가. 만약 어떤 착취와 고통이 ‘어쩔 수 없는 일’이 된다면, 그 착취는 언제 어디서나 반복될 수 있다. 그들이 ‘비인간 동물’이기 때문에 정당화되는 착취의 방식이 인간 동물을 향해서도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비인간을 남겨둔다면 어떠한 해방도 올 수 없다.


나가며


어느 날 영화에서 엄청난 수의 동물들이 죽는 장면을 보고 한참을 엉엉 울었습니다. 슬픔인지 분노인지 모를 구토에 가까웠습니다. 온몸에 가득 들어 찬 죽음들이 더 이상 육신에 남지 않을 때까지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그렇게 한바탕 울고 나면 잊기 쉬웠으니까요.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기사를 보았을 때, 그 누구도 새들의 죽음은 애도하지 않는다는 마음이 기어코 비집고 나왔을 때, 그 모든 죽음이 온전히 나의 몫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눈물을 꾸역꾸역 삼켰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껏 죄책감을 토해내기 위함이었던 눈물을, 이번에는 끝내 토하지 않고 꾹꾹 삼켰습니다.


한동안 매일 꿈에 새가 나왔습니다. 그는 그저 나를 응시합니다. 고작 응시당하는 것만으로 나는 울렁입니다. 꿈에서 깨자마자 내가 삼킨 모든 눈빛과 시선을 토해냅니다. 결국 나는 그들의 눈빛조차 담지 못하는 납작한 벽입니다. 먹히지 않고 늙어가는 새벽이를 보았을 때, 그리고 그날 저녁 식탁에서 고기를 먹었을 때. 다시금 토해내고 싶었지만 역시나 참았습니다. 그게 최선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 괴로움과 수치를 감당하는 것이 당신과 함께 살기 위한 애도의 전제입니다. 나의 옹졸한 마음이 감당하지 못하게 된 어느 날, 다시 쏟아내는 한이 있더라도.


이 글을 읽은 당신이 ‘불쌍한 동물’을 ‘동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이름으로 베푸는 ‘아량’은 인간의 이름으로 저질러 온 ‘착취’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수한 착취와 아량 위에 서 있는 인간성을 믿지 않겠습니다.


다만 내가 믿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 동물의 상상력입니다. 우리는 도살당하는 돼지의 고통만큼이나, 늙어 죽어가는 돼지의 기쁨을비록 그것이 지극히 인간의 관점일지라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 동물이 가한 고통만큼이나, 비인간 동물의 삶 속에 존재할 수 있을(혹은 존재하는) 기쁨과 슬픔을 상상하길 바랍니다. 영영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의 고통과 행복을 상상하는 인간 동물을, 그럼에도 믿습니다.



편집위원 하영 | choibook04@naver.com




[1] 새만금신공항 건설을 백지화해야 한다 (2025.02.06.). 경향신문.

[2] ‘버드 스트라이크’ 방지위해 ‘매’ 띄우는 스페인… 한국은? (2025.01.09.). 한국경제.

[3] 최근에는 인근 조류가 천적이라 인식할 만한 맹금류를 선택해 길들이는 방법도 사용되곤 한다. 대규모 살처분이나 총포를 활용하는 방법보다는 생태적 측면에서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4] 김준수 (2019). 44.

[5] 김준수 (2019). 48.

[6] 도시 개발 시, 일정지역을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로 선정 후, 구획 지구 내 지역 주민의 개인토지 점유 면적에 따라 감보율을 적용하여 확보한 토지. 주로 공공시설 설치 등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쓰인다.

[7] 임동근은 이에 대해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야산들을 쪼개서 도시도 아닌데 도시 땅값 받으면서 팔려고 하니까 안 팔리는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출처: 임동근, 김종배 (2015). 123.

[8] 임동근, 김종배 (2015). 123.

[9] 같은 책. 134.

[10] 그린벨트 푼다고 총선에서 이길까? (2024.03.15.). 시사IN.

[11] 김준수 (2018). 79.

[12] 비둘기는 불타고 재규어는 사살.. 동물들의 올림픽 흑역사 (2016.06.26.). 서울신문.

[13] 생산 규모를 확대하여 생산 비용을 감소시키는 것을 말한다.

[14] 송인주 (2018). 226.

[15] 수나우라 테일러 (2020). 94.

[16] 송인주 (2018). 231.

[17] 정민지 (2024). 59.

[18] [날씨와 식탁 ⑤] 기후위기 최전선에 있는 동물들 (2024.10.22.). 뉴스펭귄.

[19] 폭염에 쓰러진 백만 농장동물.. 밀집 사육한 축산업자만 범인일까? (2024.09.03.). 한국일보.

[20] 마사 누스바움 (2023). 389.

[21] 조선시대에 호랑이를 잡기 위해 설치된 부대. 일제강점기에 일본 고위층이 좋아하는 동물의 가죽과 기름을 얻기 위해 호랑이를 비롯한 맹수들을 적극적으로 포획 및 사냥하였다.

[22] [잠깐읽기] 멧돼지 사살 작전이 지속 가능한 해결책일까 (2025.01.23.). 부산일보.

[23] 최명애 외 (2023). 28.

[24] 김다은, 정윤영 (2024). 3%.

[25] 이지연 (2017.12.26.). 당신의 상상과는 달리, 판다는 최악의 환경 마스코트 동물이다 [온라인 게시글]

[26] 김다은, 정윤영 (2024). 19%.

[27] 같은 책. 20%.

[28] 같은 책. 11%.

[29] 같은 책. 80%.

[30] 같은 책. 71%.

[31] 황주영 (2023). 26.




참고문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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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누스바움 (2023). 동물을 위한 정의. 이영래 (번역). 알레.

수나우라 테일러 (2020). 짐을 끄는 짐승들. 이마즈 유리, 장한길 (번역).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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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근 (2015).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 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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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및 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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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온라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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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할부지 시점] ep.131 편집바오가 열심히 찾아온 바오가족 레전드 짤 모음.zip�│Panda World (2023.08.09.). 말하는 동물원 뿌빠TV. 접속일 2025.02.21.. Retrieved from https://youtu.be/8RUrjZoxiW8?si=LOoboKtBQe5oOvW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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