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편집위원 서연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세계와 투쟁한다. 우리가 입고, 먹고, 쓰는 모든 것들은 세계—의 일부분, 혹은 전체—를 파괴한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의 아름다움으로, 고귀함으로, ‘살아감’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폭력성을 감지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혹은 그런 것들을 감지하지 않아도 되는 고통쯤으로 여겨 회피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부지런히 잊어왔다. 살아가기 위해 잊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편으론 살아가기 위해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작가라고 생각한다. 흘러가는 시간 속을 콕 집어 이곳에 생명이 있다고, 혹은 까무러치게 끔찍한 일이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의 글을 읽을 때면 개운하다. 진실이라고는 없는 듯한 세계를 정확히 표현하는 문장을 만나면 자꾸만 몸을 기울이게 된다. 삶의 무게를 함께 들어 달라고, 문장과 문장을 만든 이에게 간청한다. 그 사람은 무언가 ‘더’ 알고 있을 것만 같다고 느낀다. 그러나 면밀히 관찰해 적어내는 일련의 과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숭고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때로 작가들은 가장 끔찍한 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기도 하니까.
나에게 처음으로 인간의 삶이 끔찍하면서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알려준 작가는 한강이다. 한강의 글은 꼭 옥처럼 흰 겉과 선홍빛 과즙을 가진 열매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선이 얇은 단도로 그것을 베어내면 빨간 무언가가 죽죽 떨어질 것 같았는데, 대부분 그의 글은 열매를 베어내고, 그것을 묵묵히 지켜보는 듯했다. 그렇게 아름답고 끔찍했다. 그리고 그는 지난 2024년 노벨 문학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 소식을 지하철역 앞에서 속보로 마주했을 때, 그 멍한 기쁨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스웨덴 한림원은 한강의 수상 이유를 설명하는 글에서 그의 글이 “역사의 희생자들에게 목소리를 내기 위해 이 책은 잔인한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통해 증언 문학이라는 장르에 접근”한다고 표현한다. 나아가, ‘산 자와 죽은 자’의 연결’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소년이 온다』는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을,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하는 소설로서, 부지런히 죽음에 대해 말하고,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말한다. 한림원의 표현처럼, 한강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하고 시적인 산문’을 세상에 내보였다. 국가의 이름으로 저지른 끔찍한 살인들, 그리고 살인을 넘어선 비인간적 행위들, 이 모든 사건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삶을 빼앗기던 사람들의 얼굴로 소설이 가득 찰 때 우리는 역사책 밖에서, 사건 속 인간을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다.
한강의 작품은 비단 처절한 증언으로서 역사적 사건을 회고했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 자체로 사람들의 삶을 앗아간 ‘사건들’이 이 땅에 존재함을 입증했다. 한강은 아주 섬세한 기질로 세계를 바라본다. 어쩔 수 없이 바스라지는 것, 그 찰나의 삶과 죽음에 예민한 감각으로 자신이 ‘써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제까지고 미완의 상태로 남겠지만, 한강은 미완 상태의 답에 다가가기 위해 고통으로 향한다. 한강은 작품을 통해 인간이 살아가며 겪을 수밖에 없는, 아주 미약하거나 때론 아주 강렬한 고통에 몰두한다. 나와 세계, 세계와 인간. 그 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아마 고통일 것이라 속삭이면서 순식간에 우리를 아프게 한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 이전 발표되었던 소설들은, 최근 두 작품처럼 특정 사건을 조명하며, 글 자체로 정치성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감각이 약하다. 『채식주의자』와 『희랍어 시간』만을 놓고 보아도 작품의 무대는 어딘가에 있을 법한 우리의 일상이다. 그래서 최근 두 작품보다 더 개인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하다. 오히려 문체, 그리고 소설을 개진해 나가는 힘이 아주 다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이 모든 작품은 같은 궤도에 있다. 한강은 스스로가 수상 소감에서 이야기했듯, 작품을 관통하는 몇 개의 질문을 꾸준히 밀고 나간 것으로 보인다. 한강은 줄곧 ‘투쟁하는 삶’에 대해 쓰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채식주의자』는 비단 가부장제에 대한 투쟁이나 비거니즘에 대한 제언이 아니라, 나와 세계의 투쟁을 보여준다. 사람이라면, ‘살아감’의 과정에서 크게 발이 걸릴 때가 있다는 것. 그것이 언제 어디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아주 생생한 비명과 고통으로 가득 찬 사건이 될 것임을 묵묵히 고백한다. 『희랍어 시간』은 시간에 의해, 삶에 의해 ‘잃어가는 것들’에 저항하는 두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소설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언술은 간결하지만, 경제적으로 쓰이지 않았으며 시적이다. 그가 푸른색으로, 검은색으로, 흰색으로 세계를 말할 때, 흘러내리는 땀과 그 어수룩함으로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종종 어려움을 느낀다. 같은 문단을 반복해 읽어보게 될 것이다.
한강의 문장은 많은 부분에서 복잡하지만, 몇 번을 발음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그 유려한 복잡함은 세계에 대한 순수한 투쟁이다.
작가는 언어의 경제성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다. 꼭 필요한 말만을 간결하게 써내는 작가들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문학은 언어 체계의 정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주 쉽거나 어려운 말로, 살갗을 파고드는 진실을 써내는 것이 문학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발전사에 문학이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영원히 우리의 삶 속에 살아 있는 것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정점에 이른 언어는 바로 그 순간부터, 더디고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좀더 사용하기 편한 형태로 변화해갑니다. 어떤 의미에서 쇠퇴이고 타락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진전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겁니다. 오늘날의 유럽어는 그 오랜 과정을 거쳐 덜 엄격하게, 덜 정교하게, 덜 복잡하게 변화한 결과물입니다. (『희랍어 시간』, 29)
인간이 가진 기술이 고도화되면 고도화될수록 점점 안락하고 쉬운 방법을 택한다는 것은 우리 염색체에 기록된 생존의 기록이다. 쉽고 간단한 말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지금, 우리가 문학의 매듭을 풀어보려 고군분투하는 것은, 그리고 작가들이 아름다운 매듭을 짓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것은 ‘안락한 생존’에 대한 저항이다. 쉽고 간단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본능에 대한 투쟁이다. 우리가 인간에 대해 알기 위해 과학서를 읽지 않고 문학을 읽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인간을 둘러싼 ‘사실’이 아니라, 우리는 어쩌면 ‘진실’을 알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한강은 ‘정답’이 아닐지도 모르는 ‘진실’을 알기 위해, 그리고 쓰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을 빌리자면 ‘한강은 매번 사력을 다하고 있다.’ (『작별하지 않는다』 해설 중)
고대 희랍어에 수동태와 능동태 말고 제 3의 태가 있다는 것, 지난 시간에 잠깐 설명했지요?
<중략>
우리가 중간태라고 부르는 이 태는, 주어에 재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표현합니다.
(『희랍어 시간』, 18)
그 분투 속 홀연히 『희랍어 시간』이 있다. 소설 속 남자는 희랍어 수업의 강사로, 시력을 잃어간다. 더불어 그 ‘잃어감’에 대한 무한한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여자는 희랍어 수업을 수강하고 있으며, 매우 조용하다. 여자는 언어에 대해 예민한 기질을 가졌다. 음운을 조합하는 것, 문장을 읽어내는 것으로부터 고통을 느끼는 그녀는 어렸을 적 말을 잃은 것처럼, 이혼 후 아이의 친권을 빼앗긴 후 말을 잃는다. 오히려 그녀는 말을 틀어 막았다. 그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어떤 현상이 있다면, 그것의 반(反)현상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나중에 보지 않게 될 수도 있고,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언젠간 말을 잃을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들이닥치는 이런 종류의 불행은 대부분 의도와 관계없이 발생한다. 따라서 수동도, 능동의 태도 가질 수 없다. 사람이 태어나 죽어가듯, 수동적이지도 능동적이지도 않게, 그저 ‘중간태’의 형태로 흘러간다. 그러므로 인간은 잔인하지도, 그러나 선하지도 않은 세계의 손바닥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자기 자신을 잔인하게 만들기 위해서, 또는 선하게 만들기 위해서 투쟁한다. 세계와 싸운다.
한강의 세계에서 인간은 재귀적으로 불행해지고, 때로는 공명한다. 한강은 ‘나’로 인해 불행해지는 인간의 고통을 쓴다.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죽음과 가장 가까운 듯한 인물의 말을 빌려 톡톡히 써낸다. 숨을 쉬지 않겠다고 다짐해도 숨을 쉴 수밖에 없었던 한 여자로, 시력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태양 밑에서 필름을 비춰보았던 남자로, 생명이 가진 고귀함을 잠시 걷어내고, 생명 앞에서 침묵하는 사람들을 그린다. 이는 삶 자체가 어떤 종류의 ‘폭력’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여자가 어렸을 적, 백구가 길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한다. 하반신이 온전치 않은 백구의 마지막을 껴안기 위해 여자는 백구에게 다가갔으나, 백구는 온 힘을 다해 여자를 물어 뜯는다. 여자가 한 번 더 물어 뜯기던 순간, 여자는 기절한다. 그리고 이 처절한 ‘싸움’에서, 나는 한강이 인간과 세계의 투쟁을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왜 그토록 세게,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살을 물어 뜯었을까.
왜 그토록 어리석게, 그녀는 끝까지 그를 껴안으려 했을까. (『희랍어 시간』, 168)
어쩌면 세상은 물어 뜯기 위해 태어난 생명과, 물어 뜯기더라도 껴안아보기 위해 태어난 생명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계는 그토록 폭력적이면서도, 끝내 아름답다. 한강의 소설이 ‘죽음’을 다룬다 하여 그 모든 종말을 예고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강은 끝을 유예하며 계속해서 질문하고 있다. 그런 질문 안에서 세계는 어떠한 의도 없이 굴러가고, 생명은 그 안에서 행복하다가도 금세 부서지고 만다. 남자는 어린 시절 키웠던 병아리가 죽은 뒤 그것을 묻는다. 시간이 지나 그 병아리를 묻었던 자리에 갔을 때, 작은 뼈들은 보이지 않고 까만 흙만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남자는 그 작은 뼈들이 어디로 갔을지 골몰한다. 남자는 시력을 잃어가며, 소실되는 무엇에 이끌린다. 그러면서도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세계에 존재했던 것은 사라질 운명을 타고나는 것이다. 전복 불가능한 세계의 법칙 앞에서 그는 다시금 멈춰 선다. 장면은 순식간에 전환된다. 이탈리아의 카테콤베 묘지, 그 숭고한 추모의 공간에서 그는 구토감을 느낀다.
‘여러분 눈 앞에. 관 속에 보이는 흙을 분석하면 칼슘과 인 성분이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수 천년이 흐르면, 사람의 뼈가 삭아서 이런 흙이 되는 겁니다.’ (『희랍어 시간』, 153)
그는 흙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다고 말한다. 관 속에 유골이 없어진다는 것, 세계 안에서 생명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라는 전복 불가능한 법칙 앞에서 그는 비틀거린다. 그러나 그는 흔들릴지언정 부서지지 않는다. ‘수천 구의 육체들이 뼈까지 깨끗이 삭아버린 거대한 무덤 속에, 그토록 따뜻한 몸을 가진 우리가 모여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모두의 ‘끝’에 놓인 죽음은 섬뜩한 차가움이지만, 아직 살아 있는 우리는 따뜻하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좀체 화해할 수 없는 세계와 우리는 맞붙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피력한다.
『희랍어 시간』에서 여자는 세계에 놓인 수많은 것들과 ‘화해할 수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끝에서 두 남녀는 서로의 심장을 맞대며 공명한다. 얼굴의 가장 연한 곳을 찾아 매만져본다. 고통의 완결로 인해 치유가 피어난 것이 아니라, 고통과 치유는 늘 함께 가는 것이다. 고통과 치유를 같은 선상에 두려고 하는 것이 곧 세계와 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상처받을 인간과, 무던한 손짓으로 인간을 상처받게 할 세계의 싸움에서, 인간은 고통받는 동시에 치유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모든 것을 말한 남자와 모든 것을 들은 여자, 그리고 사랑하는 아이를 보러 학교 앞에 갔던 여자. 그 아이를 어루만진 뒤 여자는 남자의 손에 부서진 안경을 고치러 함께 가자고 쓴다. 수동적으로 상처받고, 능동적으로 이를 해결하려 하는 인간은 분명히 ‘중간태’의 세계를 배신하고 있다.
이제 여자와 남자에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검은 형체 위를 아른거리는 빛을 쏘아보는 기백. 남자가 빛을 보지 못한다면 대신 눈을 빌려주고, 여자가 말을 할 수 없다면 대신 입이 되어주는 것. 끝내 고통과 치유가 함께 갈 수 있음을, 홀로인 세계에 심장을 포개어둠으로써 저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실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희랍어 시간』, 124)
인간의 몸이 상처받기 쉬운 연한 것들로 이루어진 이유는, 그것이 약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껴안기 위함’이었음을 고백하는 한강의 문장 앞에서 우리 역시 공명한다. 지긋지긋한 삶 앞에서 분투했던 나 역시 아직 ‘살아 있다’라는 사실을. 그래서 곁의 누군가를 있는 힘껏 껴안을 수 있다는 간단하고 선명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한강은 죽음을 말하면서도 가장 생에 가까운 작가라고 생각한다. 물어 뜯기는 와중에도 백구를 껴안았던 여자처럼, 곧 그런 마음이 삶의 진실이라면, 한강은 또 하나의 진실을 보여준다. 선명한 진실을 마주한 뒤, 아름다운 결심으로 거듭난 인간 앞에 놓인 것은 폭력의 세계라는 것. 그런 고뇌는 한강의 시에서도 잘 드러난다.
회상
아무것도 남지 않은 천지에도
남은 것들은 많았다 그해 늦봄
널브러진 지친 시간들을 밟아 으깨며
어김없이 창은 밝아왔고
흉몽은 습관처럼 생시를 드나들었다
이를 악물어도 등이 시려워
외마디소리처럼 담 걸려올 때
분말 같은 햇살 앞에 그저
눈 감으면 끝인 것을
텃새들은 겨울부터 아니 그 전 겨울부터 아니아니 그 전 겨울부터
목 아프게 지저귀고 있었다
때론 비가 오고 때론 개었다 세 끼 식사는 한결같았다 아아
사는 일이 거대한 장례식일 뿐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어린 동생의 브라운관은 언제나처럼 총탄과 수류탄으로
울부짖고 있었고 그 틈에 우뚝
살아 남은 영웅들의 미소가 의연했다
그해 늦봄 나무들마다 날리는 것은 꽃가루가 아니었다
부서져 꽂히는 희망의 파편들
오그린 발바닥이 이따금 베어 피 흘려도
봉쇄된 거리 벗겨진 신 한 짝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천지에서 떠밀려온 원치 않은 꿈들이 멍든 숨을 질벅거렸고
그 하늘
그 나무
그 햇살들 사이
내 안에 말라붙은 강 바닥은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모든 것이 남은 천지에
남은 것은 없었던 그해 늦봄
시 안에 남은 것이 많다. 흉몽, 그리고 새의 비명. 끔찍하게 한결같은 삶의 한가운데에서 화자는 ‘사는 일이 거대한 장례식일 뿐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며 세계에 질문한다. 우리의 일상 속에 얼마나 많은 죽음이 있는가. 도처에 죽은 것들을 밟고 사는 인간은, 죽은 것에 의기양양해하는 인간은 얼마나 희망적인가. 브라운관을 가득 채운 ‘총탄’과 ‘수류탄’ 그리고 ‘봉쇄된 거리’를 통해 우리는 이 시의 화자가 계엄과 군사통치 시절의 무엇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혹은 그것을 넘어, 드론과 총탄이 넘나드는 지구 어딘가를 생각하게 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구나 의심했던 날,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라고 단언한 그날을 ‘회상’하고 있는 이 시는 결국, 함께 살아가길 거듭난 인간이 마주한 세상은 늘 그렇듯 잔인하다는 또 하나의 사실을 알려준다. 인간이 사랑으로 거듭나든, 거듭나지 못하든 세계와 싸워내야 하는 존재라는 것 역시 그 사실 중 하나다.
한강의 시에서는 ‘돌’이 자주 등장한다. 시의 화자는 그것을 자주 지켜보고 그 돌에게 말을 건다. 자신의 이야기를 건넨다.
조용한 날들
아프다가
담 밑에서
하얀 돌을 보았다
오래 때가 묻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돌
좋겠다 너는,
생명이 없어서
아무리 들여다봐도
마주 보는 눈이 없다
어둑어둑 피 흘린 해가
네 환한 언저리를 에워싸고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무엇에게도
아프다가
돌아오다가
지워지는 길 위에
쪼그려 앉았다가
손을 뻗지 않았다
생명이 없는 돌에게 생명을 가진 화자가 부러움을 표한다. 왜일까? 화자가 아무리 돌을 들여다보아도, 돌에게는 화자를 마주 볼 눈이 없다. 돌은 생명 없이도 오래 서 있을 수 있다. 그렇게 ‘피 흘린 해’가 붉은 모습으로 환한 돌을 감싸안을 때, 화자는 ‘무엇에게도’ 손을 뻗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피 같은 하늘 아래 있는 돌에게, 어쩌면 자신의 모습처럼 보였을, 혼자 놓인 돌에게 화자는 손을 뻗지 않는다. 화자는 ‘아프’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하고, ‘지워지는 길’ 위에 쪼그려 앉아 있다가도 손을 뻗지 않는다. 아프고, 돌아오고, 지워지는 길 위에 쪼그려 앉을 수 있는 것은 생명을 가진 존재의 특권이다. 그러나 생명을 가지지 않은 존재들은 아프지 않아도 된다. 더하여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지 않아도 된다.
화자가 그 돌에게 ‘손을 뻗지 않았’던 것을 그저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화자가 ‘살아 있지 않은 것’에 손 내밀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화자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지워지는 길에서 돌아오면서도 살아 있는 삶에 머무른다. ‘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흰 돌’은 어쩌면, 상처받지 않은 무구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상태에 접어들 수 없다. 영원히 상처받으리라는 사실이 때로는 우리를 더 아프게 한다. 그러나 한강은 그 ‘돌’을 집어내지 않으면서, 그러나 그것을 애가 닳도록 지키면서, 그것을 보고 돌아오면서, 지워지고 마는 길을 거닐면서 고통하는 것이 삶임을 말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파란 돌
십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내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들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듯했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는 내 (한자)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이 시에도 돌이 등장한다. 화자는 자신을 ‘죽었다’고 표현한다. ‘죽어서 좋았다’며 그 죽음의 상태를 환하고 솜털같이 가벼운 것이라 표현한다. 그리고 그 ‘돌’을 투명한 내가 아래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그 돌을 줍기 위해서는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때 ‘처음 아팠’다고 말하며, 그렇기 위해서는 ‘다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영영 그 돌은 줍지 못한 채로 화자는 눈을 뜨며 꿈에서 깬다. 꿈에서 본 파랗고 고요한 돌은 화자에게 무엇이었을까? 줍기 위해서는 다시 살아야 하며, 아파야 하는 것. 화자는 그것을 주웠거나, 놓쳤거나, 영영 잃었을 가능성을 되짚으며 돌에 대해 생각한다. 꿈 속 화자는 죽은 상태로 환했다면, 세계에서 살아 있는 화자는 알아야 하고 아파야 한다. 파란 돌은 어쩌면 한강이 생각하는 ‘끝나지 않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은 아닐까. 작품이 하나씩 끝날 때마다 질문의 끝까지 다다른다는 그가 찾은, ‘정답’이 아닌 그저 ‘끝’에 있는 항목. 살아 있기 위해 우리는 죽어서는 안 되고, 살아 있어야 하며, 환하고 고요하지 못해도 아프다는 것. 상처받을 것이며,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삶의 진실. 그러나 우리는 그 돌을 보고, 정답을 찾기 위해 싸워볼 수는 있다. 이제 그 돌을 영영 줍지 못한다는 ‘진실’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
『희랍어 시간』 속 두 남녀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각자의 이유로 통증을 느끼며, 고요한 두 사람이 결국 손에 쥐는 것은 환하고 아름다운 죽음이 아니라 생동하는 삶이라는 것을. 태초의 완전무결함으로 돌아가는 치유로 살아나는 신화가 아니라,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채로 살아내는 이야기가 우리가 찾은 지금까지의 ‘끝’이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나름의 필살기이다.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남자가 손을 베이면서도 안경을 쥐었던 발악, 여자가 자신을 재우기 위해 수 킬로미터를 산책하던 것, 구역질을 참으며 사랑하는 아이에게 밥을 먹여주는 모습. 조용하지만 아름다운, 그렇게 거듭나는 생명의 모습이 아닌가.
어두워지기 전에
어두워지기 전에
그 말을 들었다
어두워질 거라고
더 어두워질 거라고
지옥처럼 바싹 마른 눈두덩을
너는 그림자로도 문지르지 않고
내 눈을 건너다봤다.
내 눈 역시
바싹 마른 지옥인 것처럼.
어두워질 거라고.
더 어두워질 거라고.
(두려웠다.)
두렵지 않았다.
인식하던 사물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시야에서 사라질 때. 혹은 시야가 어둠으로 뒤덮일 때 우리는 어두움에 잠식당한다. 외로움과 공포를 동시에 느낀다. 그리고 중간태의 세계는 우리에게 말한다. 아마도 ‘어두워질 거라고.’ 혹은 ‘더 어두워질 거라고’ 그러나 시는 ‘두려웠다’는 진술을 괄호에 넣고 ‘두렵지 않았다’고 진술한다. 그러니 우리는 깨우친다. 어떤 투쟁, 어떤 전복 불가능한 세계 앞에서 두렵지 않은 인간은 없음을. 그러나 두려우면서도 우리는 계속 살게 되는 것이라고. 두렵지 않다고 외치면서 말이다.
하지만 믿을 수 있겠니. 매일 밤 내가 절망하지 않은 채 불을 끈다는 걸. 동이 트기 전에 새로 눈을 떠야 하니까. 더듬더듬 커튼을 걷고, 유리창을 열고, 방충망 넘어로 어두운 하늘을 봐야 하니까. 오직 상상 속에서 얇은 점퍼를 걸쳐 입고 문 밖으로 걸어나갈 테니까. 캄캄한 보도블록들을 한 발 한 발 디디며 나아갈 테니까. 어둠의 피륙이 낱낱의 파르스름한 실이 되어 내 몸을, 이 도시를 휘감는 광경을 볼 테니까. 안경을 닦아 쓰고, 두 눈을 부릅뜨고 그 짧은 파란 빛에 얼굴을 담글 테니까. 믿을 수 있겠니. 그 생각만으로 나는 가슴이 떨려. (『희랍어 시간』 83-84)
『희랍어 시간』 속 남자는 시력을 잃어가는 불가항력적인 불행 앞에서, ‘절망하지 않은 채 불을 끈다’는 것을 동생 란에게 고백한다. 어둠에 가까워지는 눈을 새로 뜨게 하기 위해, 그렇게 뿌연 풍경을 마주하기 위해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살아간다. 시력을 모두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직면하며, 두려움을 견디며 살아간다. 지독한 투쟁 앞에서, 남자는 ‘짧은 파란 빛에 얼굴을 담글’ 자신을 생각하며, 그 생각만으로 ‘가슴이 떨’린다고 표현한다. 남자는 제멋대로 시야를 벗어나는 세계를 힘껏 껴안고 있다. 이윽고 남자는 세계 속 여자를 껴안는다. 처음은 지독한 고백으로, 물음으로, 그러나 어둠을 벗어난 축축한 포옹으로. 결국은 사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다시 한번 더 그 지리멸렬한 세계를 배신한다. 사과 향이 나는 세상으로, 두꺼운 안경이 존재하는 세상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이곳은 어느 쪽으로도발을 내디디기 힘든 장소야.
사방이 어두침침해서,
무엇을 찾기도 힘든 곳일세. 『희랍어 시간』 56
『희랍어 시간』 속 여자가 플라톤의 국가를 희랍어로 읽으며 연신 땀을 흘린다. 세계는 이렇듯 어둡고, 우리를 긴장하게 한다. 매 순간 움츠린 우리는 간신히 진실의 귀퉁이를 읽어내기 위해 사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한강은 온전하게 몰락하는 방법[1]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다시 태어날 수 있길 기도하고 있다. 한강은 슬픈 우리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그 슬픔으로 살아가길 바라고 있다. 한강의 글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것이 어떻게 부서지는지 잘 묘사한다. 그러면서도 그 수많은 깨어짐과 깨어짐 사이, 죽음과 죽음 사이 깨어지지 않는 ‘무언가’가 우리를 살아가게 할 것이라 말한다. 그것이 사랑이든, 고통하는 고요함이든, 때로는 언어로 차마 완결할 수 없는 무언가가 우리 마음 속에 소용돌이치고 있음을 짚어 낸다.
인간의 속은 세계 때문에, 혹은 재귀적 인간 스스로 때문에 ‘말라붙은 강 바닥’이 되고, 그 바닥은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멍들은 희망 앞에서, 일상적이고 고요한 우리의 하늘, 나무, 햇살들 사이에서 남은 것 없이 갈라지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마음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인간은 갈라지기만 하지 않는다. 인간은 갈라지며 피어난다. 그런 희망이 한강의 글에 있다고 믿는다.
회복기의 노래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이건 세계를 껴안을 당신을 위해 부르는 노래다. 이제 당신은 질문 앞에 서 있다.
당신은 무엇과 싸우고 있는가?
혹은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가?
당신이 껴안는 것으로 세계를 배신할 수 있다면 좋겠다. 빛이 지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종종 아주 싱그러운 얼굴로.
편집위원 서연 | waveandwavy@gmail.com
[1] 이소연 문학평론가가 『희랍어 시간』 평론 중 사용한 표현을 차용함.
참고문헌
단행본
강남순 (2022). 데리다와의 데이트. 행성B.
한강 (2013).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문학과 지성사.
신형철 (2022). 인생의 역사. 난다.
한강 (2007). 채식주의자. 창비.
민음사 편집부 (2024). Littor(릿터) 51호-회복하는 문학. 민음사.
한강 (2011). 희랍어 시간. 문학동네.
한강 (2018). 흰.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