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민상 / 전 편집위원
최종 득표율 8.34%로 선거비 보전에는 실패했지만, 20대 남성에서 37.2%, 30대 남성에서 25.8%(방송 3사 출구조사 기준)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은 ‘이준석 현상’의 불씨가 이후에도 어떤 형태로든 지속될 것임을 보여주었다. 다소 비관을 섞어보자면 지난 수 년간 진보정당정치의 숙원이었던 양당제에 기생하지 않는 ‘제3지대’ 독자정치 성립이 라는 면에서, 이준석류의 정치는 21대 대선을 통해 비로소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대선 TV토론에서 이준석의 언어 성폭력이 결국 막판 지지세의 확장력을 크게 저해한 데서 볼 수 있듯, 이 ‘돌풍’이 이준석이라는 인물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것 같지는 않다. 아무리 공감 아닌 이해를 해보려 해도 그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찾아내기는 힘들다. 되레 매력이 없다는 것이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착종된 남성적 성장 내러티브를 체현하는 이재명, 극적인 전향으로 보수정당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해온 김문수와 달리, 이준석의 정치적 정체성은 그가 표면적으로 지양하고자 하는 양당제 정치, 혹은 산업화-민주화로 분열되어있는 한국정치의 무의식을 마구잡이로 인용하면서 형성되는 탓이다.
동탄이라는 ‘벽지’에서의 극적인 승리로 노무현을 소환하고, ‘청년’ 정치인으로는 이례적으로 선거 유세에 부모를 불러 범박한 모성에 호소하며, 다큐멘터리 영화 〈준스톤 이어 원〉 (2025)를 통해 에펨코리아를 하는 모습이나 심지어 코딱지를 파는 모습까지 공개하는 그의 무리수는, 그를 정치사적 연속선상에 정확히 위치시키기보다는 늘 표적을 빗나간다. 이준석에 의해 정치적 수사로 번역된 인터넷 대안우파의 ‘팩트’와 ‘능력주의’ 세계관은 여기서 탈구되며, 그의 이념적 핵에 자리한 것이 로고스가 아니라 정동적 무의식에 가까움을 보여준다. 그는 양당제를 지양하자고 주장하지만, 그의 ‘반항’은 양당 정치의 ‘아들’로서 의사-오이디푸스적인 것으로 통약 가능하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지도 못하고, 어머니를 취하지도 못한다. 그의 ‘이미지 정치’는 정치인 아들때문에 마음이 아파 주차장에서 3시간씩 우는 어머니와, ‘남에게 비굴하지 말라’고 따뜻하게 조언하는 아버지의 상징적 후원과 돌봄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탓이다.[1]
이런 점에서 이준석은 (카스 무데의 분류법을 빌려보자면) 서부지법을 공격하는 등 체제의 형식을 향한 테러리즘을 조직 원리로 채택하는 극우, 혹은 ‘극단 우파{extreme right}’의 일종으로 분석될 수는 없으며, 자유주의자를 자처한다는 점에서 ‘급진 우파{radical right}’로 분류되기도 힘든 신반동주의의 한국적 특산품이다. 김학준은 일찍이 이준석을 ‘제도화된 일베’로 규정했지만 여기서 무게중심은 날로 ‘제도화됨’의 자기반영성에 실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 페미니즘’의 지역성을 근거 삼아 페미니즘 일반의 보편성마저 부정하는 그임에도,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선 ‘젠더 이슈에서 앞서있다’고 주장하는 전략적 자기분열은 ‘제도’에의 정서적 애착을 통해서나나 동일성을 유지한다. 이는 명백히 ‘제도’가 성립하며 그것을 갱신시키는 헌법적 ‘정신’에 대한 해킹이며 위악적인 기생이다. 계엄은 잘못되었더라도 ‘민주당’이 싫으니 김문수에 표를 던진다는, 한국 보수 특유의 역학적 사고는 이준석에 의해 갱신되며 전세계적인 반동주의에 독특하게 합류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준석’이라는 인물의 정치적 운명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그가 제도 속에 안착시킨 ‘청년 남성’의 환상적 행위성으로 하여금 무엇을 불러오고 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섣부름을 무릅쓰고 얘기해보자면, 우선은 명태균 게이트와 개혁신당의 내부 문제 등 정치인 이준석 앞엔 여러 난관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고 사라질 수 있고, 또 대체될 수 있다. 막말로, 상위권 대학을 나온 중산층 30대 남성 누구라도 그를 위해 눈물 흘릴 부모를 불러올 수 있고, 카메라 앞에서 코딱지를 팔 수 있다. 핏이 맞지 않는 양복을 차려입고 ‘학생자치’라는 모의UN에 참여하기를 즐기는 어떤 부류의 학생 대표자들도 ‘넥스트 이준석’이 되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스스로 ‘명문대’에 진학하기를 성공한 평범한 익명의 중산층으로 정체화했던 대가라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준석과 ‘이준석적인 것’은 ‘사라지는 매개자’[2] 로서 앞으로의 정치가 계속해서 대결해야 할 ‘반-정치’를 소환하는 관문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크다. 일찍이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을 향한 노동계급의 열망이 국민전선에 의해 급진 우파의 정치적 자원으로 전화되었던 프랑스의 경우와 달리, 이준석의 정치는 중산층적 삶의 기호를 나열하되 그 계급적 배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며 늘 ‘보편’의 문법으로 후퇴한다. 국민의힘 대표 시절 대학생위원회 조직에 기여하고, 대선 기간에도 각 대학을 중심으로 유세를 펼치는 등, 대학을 졸업한지 20년이 다 되어감에도 여전히 학생으로서의 정체성을 활용하는 것이 그 예다. 날로 격화되는 교육 양극화 속에서 ‘대학생’의 계급성 내에서만 목도되는 ‘소우주’는 곧대로 신냉전과 기후위기 등의 지정학 위기를 만나 ‘대우주’로 치환되고 만다. 이준석이 해킹한 것, 또 한국 정치가 이준석에게 할당한 영역이 그 틈의 ‘림보{limbo}’였다. 이 곳에 던져진 ‘말할 수 있는 프레카리아트들’, 그리고 말조차 할 수 없는 프레카리아트들은 이준석이 강신시키는 신자유주의와 산업화의 유령들 속에서 열정적으로 질식하는 수밖에 없다. 진보 정치의 대결 상대는 이준석의 피안에 득시글거리는, 바로 그 신자유주의적 사이비인간학이 낳은 대리 정치{proxy politics}의 유령들일 것이다.
민상 / 전 편집위원 msang924@korea.ac.kr
[1] 이준석 부모, 직접 지원 사격… “‘준석아 힘들지’ 불러주고 싶었다” (2024.04.09.). 중앙일보.
[2] ‘사라지는 매개자’란 서로 배타적인 두 항 사이의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촉매적 동인으로, 그 효용이 끝나면 해체·소멸하는 일종의 ‘사다리’에 비유된다. 프레드릭 제임슨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이 그 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노동윤리를 종교 체계 속에 끌어들여 자본주의가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했으나, 자본주의가 본격화되자 그 효용을 다하고 쇠퇴했다. 이처럼 프로테스탄티즘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촉발한 사라지는 매개자였다. 참고: Fredric Jameson, “The Vanishing Mediator: Narrative Structure in Max Weber,” The Ideologies of Theory: The Syntax of History, vol. 2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8).
참고문헌
단행본
― 김학준(2022). 보통 일베들의 시대. 오월의봄.
― 이준석(2020). 공정한 경쟁. 나무옆의자.
― 조문영(2022). 빈곤 과정. 글항아리.
― 카스 무데(2021). 혐오와 차별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권은하 (번역). 위즈덤하우스.
― Fredric Jameson (1988). “The Vanishing Mediator: Narrative Structure in Max Weber”. The Ideologies of Theory: The Syntax of History, vol. 2,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기사 및 온라인 자료
― 정준희(2025.07.12.). 윤석열 떠난 자리, 이준석이 온다 [정준희의 ‘미디어 레퀴엠’]. 시사IN, Retrieved from https:// 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012
― 한지혜(2024.04.09.). 이준석 부모, 직접 지원 사격…“‘준석아 힘들지’ 불러주고 싶었다”. 중앙일보. Retrieved from https:// www.joongang.co.kr/article/25241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