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바깥의 SF; 『파견자들』을 읽고

[칼럼] 편집위원 민주

들어가며


이야기의 힘을 믿고 싶다는 믿음. 고등학교 2학년 문학 선생님께서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수업을 마치며 불가능할지라도 우리는 달을 향해 쏴야 한다[1]고 하셨다. 허망해 보일지라도 정진하게 해주는 상상의 힘을. 이 말을 들은 후부터 난 의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야기는 늘 현실에 발을 붙이기 위해 허구의 서사를 창조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상상은 망상이 아니라 현실로의 회귀를 뜻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미래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SF라는 장르는 나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통해 잠시 나를 환상에 데려다 놓는 유토피아[2]가 아니라, 과거-현재-미래라는 선형적 시간대를 초월하여 그 세 단어로 끊어낼 수 없는 연속적인 존재들 혹은 가치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SF 장르는 그 쓰임의 형태가 달라지는 듯하다.



SF는 무엇의 약자인가요?


SF는 과학소설 science fiction, 사변적 페미니즘 speculative feminism, 과학 판타지 science fantasy, 사변적 우화 speculative fabulation, 과학적 사실 science fact, 실뜨기 string figures[3]를 위한 기호이다.[4] 과학이 인간의 지성을 최고 지점에 다다르게 하지 않을까 하는 과거의 낙관이 과학 소설로서의 SF를 견고하게 했다면, 지금은 과학이 인간의 상상력을 침범하고 있다. 불가능해 보이던 것들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과학소설의 특징을 가졌던 이야기가 주는 새로움이 감소함에 따라 과학조차 설명할 수 없는,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난 사변적 우화로서의 SF가 성행하고 있다.


멀기만 했던 미래가 현재가 되면서 과학의 발전과 인간의 무한한 욕망으로 파괴되는 지구의 모습은 미래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따라서 SF소설 속 등장하던 기후위기는 더 이상 현재진행 중인 현상이 아니라, 이미 기후위기가 휩쓸고 지나간 후의 종말과 폐허로 묘사된다. 사변적 SF에서는 기후 위기를 과거의 시간성에 결속시키는 경향이 있다. 소설을 통해 미래라는 시간대로 이동한 독자들에게 현재의 위기란 과거에 발생했던 하나의 시점 혹은 변곡점이 되는 것이다. 기후위기는 점보다는 선의 형태를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김초엽의 『파견자들』 역시 외계 이상 물질에 의해 공격을 받고 난 뒤의 지구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김초엽의 『파견자들』


『파견자들』은 외계에서 온 ‘범람체’로 인해 지하에서 살게 된 인류의 이야기다. 지상에서 살던 인류는 범람체의 감염 증상인 광증으로 인해 위험에 처하자, 지하로 피난을 오고 지상 탈환을 꿈꾼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인류는 광증에 저항성이 높은 ‘파견자’를 선발한다. 이들의 임무는 지상을 탐사하고 “광증 발현자를 신고하고 격리 수용에 협조하여 미발현자를 보호(『파견자들』, 32)”하는 것이다. 지하에 살고 있는 태린에게 파견자가 되는 것은 “지상을 밟을 특권(『파견자들』, 38)”을 가진 사람이 되어 자신의 스승인 이제프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하나의 기회였다. 이야기는 파견자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는 태린이 자신의 뇌 속에서 들려오는 (훗날 ‘쏠’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는) 미지의 목소리를 마주하며 전개된다.


파견자는 언제나 지상에 대한 경이와 증오를 동시에 품어야 한다. (김초엽, 2023:41)


이제프가 파견자를 희망하는 태린에게 해준 말이다. 여기에서 ‘지상’은 범람체에 의해 지배당한 공간으로, 다시 인류가 되찾아야 하는 곳을 의미한다. 지상을 증오의 대상이자 경이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범람체의 특성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범람체는 외계에서 온 이상 물질로, “한때 지구의 흙 아래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었던 균류의 균사체를 닮아 있지만 그보다 훨씬 단단한 형태를 지녔다(김초엽, 2023:114).” 이는 다른 생물들과 달리[5] 인간에게 결합하면 “자아가 해체되고 자신이 이 현실에 있다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는, 꿈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는 광증(김초엽, 2023:38)”이 발현된다. 작가는 다음과 같은 현상을 선형적인 시간대 속에 자신이 이룩해온 삶, 즉 “자전적 서사를 잃어버리는(김초엽, 2023:61)” 과정이라고 서술하며, 인간에게 자아가 얼마나 중심적인 가치인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지하 사람들에게 범람체는 공포의 대상이며, 이를 처단해야 하는 파견자에게는 증오의 대상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범람체는 심미적인 요소로 인해 경이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태린의 친구인 선오는 아름다운 범람체에 현혹되어 지상과 지하 사이에 있는 채광창을 청소하러 간다. “범람화된 온갖 동물의 사체와 그것들에 얽혀 자란 덩굴, 그리고 사체를 양분 삼아 인간의 키만큼 자라난 거대한 범람 산호들(김초엽, 2023:65)”로 이루어진 이 방어벽은 범람화된 생물을 직접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경계에 해당한다. 이곳에서 선오는 “부패해 역겨운 냄새가 나는, 그러나 신비로운 빛깔들로 뒤덮인 오물들을(김초엽, 2023:67)” 목격하는데, 이를 통해 범람체가 특유의 ‘신비로운’ 외관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종의 사건[6]으로 인해 위험한 파견을 나오게 된 태린이 마주한 범람체 역시 매혹스러운 대상이었다.


도시는 기이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색채로 일렁이는 세계. 곳곳에 강렬한 원색의 물감들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빠짐없이 찬란했다. 도시를 점령한 범람체들이 각자 경쟁이라도 하듯 빛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김초엽, 2023:114)


태린은 범람체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그 아름다움에 이끌려 범람체를 수집하려 한다. “그게 범람체라는 걸 고려하지 않았다면 언뜻 독특하고 아름다운 장식품처럼 보였(김초엽, 2023:120)”기 때문이다. 즉, 채집의 이유는 단순히 범람체를 연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심미적인 대상으로서 소유하기 위함이다. 이때 범람체를 심미적 대상으로 등장시킨 것은 범람체와의 공존 가능성을 설명하기에 앞서 독자들의 거부감을 덜 수 있는 하나의 장치임과 동시에 공상과학{science fantasy}적인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여 범람체를 채집한 뒤 파견을 이어가던 와중, 태린을 포함한 정식 파견자들[7]은 범람화된 숲인 늪을 발견한다. 늪에서는 인간의 언어로 해석하지 못하는 음성들이 들렸고, “한때 인간이었겠지만, 지금은 그 형체를 완전히 상실하여 인간이었음을 겨우 알아볼 수만 있는 무언가(김초엽, 2023:49)”를 마주한다. 이들은 다름 아닌 늪인[8]이다. 범람화된 인간(늪인)의 모습은 충격적인 동시에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9] 범람체는 인간과의 결합을 통해 ‘범람화된 인간’으로 진화하며 단순 증오 혹은 경이의 대상에서 머물지 않고 행위적 주체가 된다. 그리고 그들에겐 늪인이라는 호칭이 주어진다.


늪인들은 “범람체와 결합되었지만 미치지는 않은, 변이된 사람들(『파견자들』, 197)”이다. 이들은 자신만의 언어로 소통하며 촉수처럼 뻗어가는 범람체를 통해 여러 가지 수의 연결망을 기반으로 늪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그들만의 삶을 영위한다. 이러한 늪인들과의 조우는 태린이 쏠과의 관계에 관한 단서를 찾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이상하고 기괴해요. 상상해 본 적 없던 장소예요. 그런데도 저는 어딘가 익숙함을 느껴요, 도망치고 싶고, 제가 늪에 대해 느끼는 친밀함을 부정하고 싶어요. 하지만 동시에 이 늪이 불편하지 않은 저를 발견해요.” (김초엽, 2023:222)


범람화된 인간들로부터 ‘어딘가 익숙함’을 느낀 태린은 이내 자신 역시 그들처럼 범람체와 결합한 인간임을 감지한다. 이를 통해 늪에서 기억을 되찾은 태린은 어린 시절 뇌에 삽입했던 기억 보강 장치인 뉴로브릭의 오류로 인해 쏠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뇌에 삽입되었던 범람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쏠과 태린의 관계


태린은 어린 시절, 바투마스 연구소의 실험체로 자랐다. 이곳에서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성장하는 인간의 뇌 안에서 범람체와 신경세포의 상호작용을 관찰하고 분석했다. 그리고 뇌 형성 과정이 완료되지 않은 아이들이 범람체와 결합한 상태로 성장할 때 광증 저항성을 지니는지 알아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연구자들은 범람체에 강력한 저항성을 지니는 신인류를 만들려 했으나, 이 과정에서 태린을 제외한 아이들은 범람체의 발현을 견디지 못해 사망했다. 실험 실패 이후 태린만이 뇌에 주입된 범람체와 공존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태린이 광증 저항성이 높은 이유이기도 하다.


태린이 그 범람체에게 ‘쏠’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그에게 주체성을 부여했음을 의미한다. 범람체 저항성이 높은 태린이었기에 그의 신체는 완전히 범람화되지 않았으며, 두 종류의 자아가 신체를 통제할 권한을 서로에게 쥐여주는 결과에 이른다.




지하 사람들과 범람체와의 관계


늪인들과의 조우 이후 태린은 범람체와의 결합을 인정하면서, 범람체를 제거하려는 지하 지배자들의 프로젝트에 맞서 이들의 탈출을 도왔다. 이후 지하 사람들에게서 지상의 늪인을 상호 존중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내고, 두 세계를 매개하는 ‘전이자’가 된다. 그가 전이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범람체인 동시에 인간이라는 특권을 지녔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특수성이 아닌 특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그가 가진 특수성이 지하와 지상 모든 곳을 다닐 수 있게 하는 조건으로 작용했으며 지하 사람 중 일부가 범람체와의 연결을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태린을 중심으로 늪인들과 지하 사람들은 “느슨한 공동체(김초엽, 2023:227)”를 형상화한다. 이들은 “범람체들이 지하를 인간의 영역으로 존중하듯이 도시의 인간들 역시 지상의 영역을 존중할 것(김초엽, 2023:408)”을 합의한다. 이는 늪인들이 형성한 공동체와 유사한 양상을 띤다.[10] 그러나 이처럼 개체성을 강조하는 느슨한 공동체는 보편성과 개별성을 충돌 없이 결합하는 형태에 불과하다. 우리는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연결을 가지고 세계를 결합하고 변형하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따라서 ‘지금껏 본 적이 없는[11]’ 결합이라는 매개자 태린의 결합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미 외부의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게 하기보다, 근접성이 없는 친밀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태린은 범람체에 대한 높은 저항성을 가졌기 때문에 뇌에 침투한 쏠과 상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고, 이들의 결합 방식은 범람체가 태린의 뇌에 직접적으로 침투하여 물리적으로 맺어지는 관계이다. 이때 형성된 근접성이 연결 발생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반대로 이와 같은 근접성이 없다면 친밀한 관계가 형성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또한 ‘전이자’는 객체인 범람체에 대한 타자화의 시선을 덜어냈으므로 이전의 ‘파견자’보다 타자성을 지운 단어다. 그러나 역시 연결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단어가 아니다. 전이는 주로 에너지나 물질을 전달할 때, 전염은 주로 바이러스를 전달할 때 사용된다. 이는 작가가 범람체라는 물질의 추상적인 에너지, 즉 인간의 자아와 연결될 수 있는 성공적이고 희망적인 결합을 강조하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행위자들의 연결은 상호 이득이 되는 부분만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대목에서 작가가 제시한 결합을 보완하기 위해, 해러웨이의 ‘공-산’적 결합을 소개하고자 한다. ‘공-산(共-産)[12]’적 결합체는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적 관계 안에서 함께 만들어지고 성장한다는 개념이다.[13] 마찰과 껴안기 등 그 나름의 동일하지 않은 방식을 통해 연결된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동물이다. 이미 우리는 박테리아와 얽혀 양 방향적인 실천적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에서 함께-된다.[14] 그러나 작가가 제시한 대안적 공간은 작품 내 사람들이 그중 어디에 속할 것을 지정해 줌으로써 이미 연결된 채로 존재한다는 ‘공-산’의 관계를 좌절시킨다. 작품의 결말은 작가가 구분 짓기를 초월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전이자로서의 태린


전이자가 된 태린의 안내를 따라 지하의 사람들은 범람화된 지상을 ‘관광’한다. 그리고 이때 범람체에 매료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태린처럼 그들과 연결될 수 있는지, 자스완[15]에게 묻는다. 자스완은 “당신이 오직 당신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환상을 버린다면(김초엽, 2023:420)” 가능하다고 답한다. 그러나 지하의 사람들에게 지상이 타 존재들과의 결합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아닌, 타인의 결합을 경이롭게 지켜보는 관광지로 남는다면, 태린은 영원히 그들에게 범람체와의 결합을 ‘전이’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범람체와의 결합을 포기한 이제프라는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이제프를 통해 순백의 지구를 되찾으려는 인간의 그릇된 욕망을 비판한다. 이제프는 자신이 사랑하는 태린에게 지상을 돌려주려 했다.[16]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형태가 아님을 방증하기라도 하듯 태린은 범람체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을 처단하려고 하는 이제프를 제거한다. 이제프의 죽음은 해악의 대상인 범람체로부터 지구를 되찾으려 했던 인간의 욕망이 사라짐을 상징하며, 제거의 대상이었던 범람체를 공존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범람체 이전과 이후라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은 여전히 사람들이 이미 다양한 비인간과 연결된, 오염된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전달하지 않는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 더불어 먹고 먹히는 관계에 있다. 생태계의 먹이그물 안에서 그들은 서로의 퇴비가 되고 얽히면서, 인간과 음식, 동물, 식물, 미생물의 경계는 유동적으로 된다. 이 과정에서 몸은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주위의 다른 몸들을 변화시키고 자신도 변화하며, 자신을 지속하려고 노력한다.[17]


범람체의 연결망을 활용해 그것들을 직접 뒤흔들고, 왜곡하고 공격하는 것. 완전히 파괴하는 것. 그럼으로써 지상을 인간의 것으로 되찾아오는 것. 그것이 이제프의 최종 목표였다. (김초엽, 2023:278)

결합되었고 오염된 사람들. 더는 순수한 인간이 아닌 사람들. (김초엽, 2023:375)

범람화된 사람들이 ‘더는 순수한 인간이 아닌 사람들’이라는 것은, 범람화 이전의 사람들은 순수한 인간, 즉 비인간과의 결합이 없는 인간임을 전제한다는 걸 의미한다. 이제프 역시 범람화되지 않은 순수한 인간에 해당한다. 이러한 설정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이미 허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순수성’이라는 허상을 붙잡는 작가의 태도를 드러낸다. 이제프의 시선 속 범람체는 공존의 주체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결핍의 대상으로 고정된다.




전방위적인, 그러나 지엽적인 위기


“인간이 외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구를 낯선 행성으로 바꾸어보자는 생각으로(김초엽, 2023:430)”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는 작가의 말을 보면 자연스레 기후위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설명했듯이 미래의 이야기는 현재를 직시하도록 하고, 지금의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을 낯설게 함으로써 문제를 문제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하는데, 지금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다름 아닌 기후위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는 지구에서 더는 살 수 없다는 이유로 지구를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우리에겐 지구에 남아 책임을 다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려고 한다. 기후 위기, 기후 문제, 기후 변화를 마주한다면 꼭 우리가 봐야 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그것이 어떻게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얼마나 계급의 불평등을 심화하는지와 같은 것들이다. 지구에서 변화는 문제가 아니다. 변화의 속도와 분포가 진짜 문제이다.[18] 기후위기는 단순히 모두에게 해당하는 재앙이 아니라, 더 취약한 사람들에게 더 큰 위험으로 다가온다. 즉 기후위기의 심각성은 문제 자체에 있다기보다 영향의 편재에 있다. 그러나 작가는 고통을 가속함으로써 집중적으로 고통이 가해지는 대상들을 빠르게 지나치고, ‘진짜 문제’를 마주하지 않는다.


방어벽을 넘어와 죽은 동물의 사체, 배설물 따위가 일주일만 지나도 잔뜩 쌓였다. 관리 기계를 작동 중이지만 기계만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범람화된 사체가 쌓이면 재배 효율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인근 환기구로 범람체가 유입될 수 있었다. 과한 하중이 가해지면 채광창이 무너지는 대형 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 결국 누군가는 채광창을 청소해야 했다. (김초엽, 2023:67)


지하와 지상의 경계 역할을 하는 채광창은 늘 범람화된 동물들로 인해 더럽혀진다. 누군가는 이를 치워야 했고, 그 사체들은 ‘신비로워’ 보인다고 묘사된다. 이는 단지 신비로운 범람체에 현혹될 수 있다는 것을 통해 인간 혹은 동물과 범람체 간의 연결을 미화하고 불완전한 결합의 형태를 띤 다양한 존재들을 보기[19]에 그친다. 또한 범람화된 인간들을 풀어주는 과정에서 다른 범람화된 생물들을 목격한 태린은 “미안, 너도 플어주고 싶은데….(김초엽, 2023:379)”라고 말한다. 맹수를 다룰 줄 아는 늪인들과 달리 태린은 아직 다른 생물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섣불리 풀어줄 수는 없었다(김초엽, 2023:379). 인간이 아닌 생물과 소통할 수 없는 태린은 자신이 다룰 줄 알고, 소통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범람화된 인간들을 풀어준 것이다. 이는 인간과 균사체의 결합을 강조하면서 비인간 사이의 결합은 인간의 언어로 만들어진 이야기에서 주변부로 전락함을 보여준다.




돌이킬 수 없는


우주를 갈망하던 인간은 우주의 한 조각이 지상에 불시착하도록 만들었다. 지금까지 태린은 그것이 파국이라고 생각해 왔다. 우주를 갈망한 인간의 잘못도, 지구에 불시착한 먼지들의 잘못도 아니지만 때로 누구의 탓으로도 돌릴 수 없는 파국이 있는 법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끔찍한 파국이기만 했던 것일까. 이제는 어쩐지 그렇게 확언할 수가 없었다. (김초엽, 2023:230)


이 구절을 통해 작가가 창조한 세계관이 사변적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미 발생한 일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기후 재난과 같은 변화를 통해 감각할 수 있다. 또한 작가는, 재난과 같이 묘사된 범람체가 사실은 인간들이 상상한 파국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 그는 범람체들과의 공생 가능성에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들이 나쁘지만은 않은 존재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친다. 종말 이후의 삶이 ‘끔찍한 파국’이기만 하진 않다는 것은 폐허가 된 지구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실[20]을 발견한 것과도 같다. 그러나 그것을 ‘누구의 탓으로도 돌릴 수가 없었다’라는 것은 책임 회피가 불가능한 위기를 직면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과 완전히 유리된다. 즉, 지하 사람들과 범람체의 관계처럼, 기후위기라는 배경이 우리 독자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기에는 멀어진다. 인류를 중심으로 발생하는 종말론적 상상은 오히려 사람들의 상상력을 제한한다. 김초엽이 그리는 미래에는 현재와의 공백이 존재한다. 나는 SF가 미래의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간의 연속성을 보여주기를, 선형적인 시간대를 초월하기를 바란다. 배경으로 치부된 기후위기에는 단편적으로 묘사될 수 없는 다양한 고통과 종들이 있다. (학살과 같은) 역사적 상황 속의 인간을 포함한 많은 종의 세계에서, 멸종은 계속 살아가는 길의 거대한 섬유조직들을 풀어버리는 길게 지속되는 느린 죽음이다.[21] 그리고 그 느린 죽음은 지속적인 고통과 고통을 함께 느끼는 애도를 수반한다. 돌이킬 수 없는 상태는 단절을 의미하지만,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따졌을 때 언제도 그들과 단절되어 있던 적이 없다. 단절되었다는 것 역시 순백에 대한 인간의 비현실적인 갈망에 불과할 뿐이다.


지구 안에서의 상상은 지구에 대한 사유를 전제하지 않는다. 김초엽은 태린과 쏠의 관계를 통해 촉수(觸手)성을 가진 신비로운 물체는 지구가 남긴, 혹은 지구에 남겨진 낯선 유해 물질일 수 있지만, 오히려 그 물질과의 결합을 통해 인간은 홀로 구성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범람체가 외계에서 왔다는 사실, 그것이 저항성이 높은 아이들과 연결되었을 때만 상호 작용(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작용)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관계가 ‘공-산’의 관계와는 거리를 두도록 한다. 지구 안에서의 위기가 지구 밖에서부터 비롯된 ‘인간의 손을 쓸 수 없는’ 사변적 결과물, 혹은 점찍힌 멸종이라면, 즉, 미래의 이야기에서조차 기후위기라는 현재의 문제가 과거의 문제로 끝나버린다면, 우리는 다시 인간의 손을 쓸 수 없기에 손을 쓰지 않는다는 무기력으로부터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기후위기는 지나온 시간을 거스르는 긴급성의 시대[22]이고, 이는 사유를 필요로 한다. 이때의 사유는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낙관을 기반으로 현재의 실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어디로 갈지 몰라도 일단 하고 보는 것이 아니라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 불확실한 위기가 도래했다고 해서 방향 없는 사유가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뭐가 될지 모르기에 더 다양한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으며, 나는 그 방향성이 부활 가능성에 기반한 윤리적 실천-하기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부활은 과학적인 되살아남이 아니라 죽음 뒤에도 이야기가 사라진 존재와 맺었던 관계와 그에 대한 기억을 통한 서사적, 관계적 부활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때의 ‘하기’는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달음으로써 무수한 시간성을 인지하는 것이다. 함께 살기와 죽기, 그리고 죽기를 통해 새로운 살기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폐허 속에서 살아남기가 아닌, 폐허를 응시하고 이내 다른 행위자들과 연결하기로 나아가야 한다.

늪은 죽음의 공간이 아니다. 늪은 분해와 부패의 과정이 일어나는 용액이다. 그 부패에서 또 다른 존재가 탄생한다. 느리고 질긴 숨이 물을 채운다. 이곳에는 어떤 다른 존재들이 있다. 서로 연결된, 퍼져있는, 전체와 부분이 동시에 생각하는 존재들이. (김초엽, 2023:233-234)


작가가 제시한 ‘늪’은 ‘탄생’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죽음’의 공간임을 부정한다. 이 세계관에서는 지하로 상정되는, 현재 인간의 삶에서도 이 늪의 공간적 특성을 역시 감지할 수 있다. 부활을 상상해야 한다. 이것이 불확실한 현재를 직시하고, 확정적 불행이 그려지는 미래를 상상할 때, 종말을 감각하면서 비관과 낙관에 머물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향성이기 때문이다. 부활을 믿기에 죽음 이후 발생한 생물과의 ‘공-산’적 관계가 함께 살기로 연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난 마땅히 다뤄야 할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살기를 그리는 다른 이야기가 궁금하다. 김초엽이 공백으로 남긴 그 이야기들 말이다. 나는 지하와 지상의 경계를 돌아다닐 때 범람화되어가는 생물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채광창을 청소하다 사고에 휘말린 노동자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범람체에 전염되어 사체로 발견된 동물들이 지하와 지상의 경계에서 어떤 (죽기를 통한) 새로운 살기를 만들 수 있을지 궁금하다. 태린의 도움을 받지 못한 맹수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종말 위에서


김초엽은 범람체들로부터 지상을 되찾자는 이제프가 범람체와의 결합을 택한 태린의 손에 죽는 이야기를 통해 유해 물질로부터 지구를 인간의 것으로 되찾는 것이 해답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범람체로 상징되는 균사체와의 결합에서, 그것과 물리적으로 연결되었을 때, 다룰 수 있다는 안전이 보장되었을 때만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감각해야 하는 자연적인 연결을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미래의 종말을 불가피한 것으로 상정함으로써 현재적 위기를 사변적 위기로 치환한다.


기후위기는 배경이나 과거가 아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고 이미 우리와 연결되어 있다. 현실 속의 범람체는 외계에서 온 것도 아니고, 늪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순백이라 믿어진 죽음이 쌓인, 그러나, 혹은 그렇기에 생명의 잠재력이 있는 그 지하의 것이다. 우리의 뇌에 의도적으로 주입되지 않아도, 이미 우리는 죽음이라는 이름의 종말 위에 서서, 지하에서 죽음 이후 숨을 쉬고 있는 비인간들과 결합해 있다.





나가며


나는 힘없는 이야기를 믿기를 과감히 포기하기로 했다. 모든 이야기가 ‘이야기’이기 때문에 힘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써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에 이야기는 힘을 갖는다. 사유의 부재로 상상하기를 중단한 이야기를 믿지 않는 대신 SF적 상상력을 믿으려 한다. 이 믿음은 SF(사변적 우화) 속에 생략되었을 수많은 SF들, 환상을 현실로 창조하는 상상력, 실뜨기적인 관계 맺음을 드러낸다. 즉 우리는 기후위기라는 같은 원인일지라도 다양한 고통은 어떤 모습을 띠는지와 같은 질문들을 던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질문들에 있어서 SF 작가들이 끈질기게 답해주기를 바란다. 상상은 곧 현실이 되고,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은 자신의 결합을 넘어서 타자 내부의 결합, 혹은 타자와 자신의 결합, 나아가 타자와 타자의 결합을 감각할 수 있으므로. 종말 이후의 이야기는 종말을 이야기함으로써 되살아난다. 내가 또 다른 SF를 읽으며 그 현재적인 종말을 감지[23]한다면, 이것이 어쩌면 내가 달을 향해 작은 공을 쏘아 올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편집위원 민주 | mjmjlee05@naver.com




[1] 조세희가 집필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속 주인공 난쟁이(혹은 난장이)는 달을 향해 작은 공을 쏘아 올린다. 이는 달로 상징되는 이상적인 목표를 향한 소망을 상징한다.

[2] 여기서 유토피아는 낙원(eutopia)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곳(utopia)을 의미한다.

[3] 도나 해러웨이는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실뜨기적인 공생을 강조한다. 각각의 실이 엮여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과 같이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동등한 주체로서 내부 작용으로 결합하여 관계를 맺는다.

[4] 해러웨이 (2021). 23.

[5] 인간의 범람화는 다른 생물의 범람화와 양상이 확연히 다르다. 인간은 범람체에 노출되면 뇌가 변이된다. 대신 뇌를 제외한 신체는 변하지는 않은 채로, 오직 광증에만 발현된다(김초엽, 2023:187).

[6] 정식 파견자를 선발하는 시험에서 퀘스트를 통과한 태린은 쏠에게 통제력을 빼앗겨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범람체를 대중들 앞에 흩뿌린다. 이제프는 이러한 상황에서 태린의 징계를 면하기 위해 비공식 파견을 지시한다.

[7] 마일라와 네샤트를 가리킨다. 마일라는 늪에 빠진 자신의 애인을 찾기 위해 탐사를 자처하였고, 네샤트는 자신의 가족을 앗아간 범람체를 제거하겠다는 목표로 참가한다.

[8] 김초엽의 연작 소설인 『행성어 시점(2011)』에 수록된 단편 『늪지의 소년』에서 뉴런-균사 복합체인 늪의 액체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늪에 던져진 생물학자인 오웬이 그대로 『파견자들』에서 늪인으로 등장한 것으로 보아, 늪의 세계관이 ‘범람체’라는 물질로 구체화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9] 김초엽 (2023). 188.

[10] 범람체들은 범람화된 생물, 즉 범람체에 의해 신경망이 점령된 생물을 그들의 연결망 일부로 여긴다. 그 안에서도 먹고 먹히는 생태계는 유지되지만, 범람화된 개체들은 서로를 완전히 다른 개체로 보는 대신 느슨하게 이어진 집단의 일부로 본다(김초엽, 2023:227).

[11] 태린이 쏠과 맺는 독특한 관계, 하나의 몸을 두 개의 다른 의식이 공유하는 방식, 서로 다르게 세계를 감각하는 두 종이 서로의 감각을 교환하는 법. 모두 지금껏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김초엽, 2023:297).

[12] 공-산(共-産)은 ‘함께’를 의미하는 심(sym)과 ‘생산하다’를 의미하는 포이에시스(poiesis)의 합성어인 심포이에시스(sympoiesis)의 번역어로 택한 말이다(임병태, 2020).

[13] 같은 글.

[14] 해러웨이(2021)가 제시한 ‘함께-된다’라는 개념은 인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비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실천적 관계 맺음을 의미한다.

[15] 자스완은 과거 파견자이자 태린을 키운 양육자다.

[16] 지상을 돌려주기 위해서는 지상을 되찾아와야 했다. 별과 노을과 바다가 있는 행성은 다시 인간의 것이 되어야 했다(김초엽, 2023:314).

[17] 윤영옥 (2023). 130.

[18] 해러웨이 (2021). 130.

[19] 이때의 보기는 관찰 이전의 단계를 의미한다. 관찰이라는 것은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봄을 의미하지만 보기란 단순히 시야에 확보됨에 그친다.

[20] 해러웨이(2021)는 SF의 개념 중에서도 이 세계를 실뜨기에 비유해서 사용한다. 실뜨기처럼 다양한 형태의 실들이 서로 엮어 공생한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범람체와의 연결이 이미 폐허가 된 지구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실에 착안했다.

[21] 해러웨이 (2021). 71.

[22] 해러웨이(2021)가 말하는 ‘긴급성의 시대’란 기후위기, 멸종, 자본의 가속 등 복합적 재난이 동시다발로 얽혀 현재적 대응을 요구하는 국면을 뜻한다.

[23] 감각이라는 말보다는 감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싶다. 감각은 직접적인 연결을 지각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지만 감지는 더 포괄적으로 신호나 징후와 같이 간접적으로 연결된 것들도 알아차릴 때 사용되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단행본

— 김초엽 (2023). 파견자들. 퍼블리온.

도나 해러웨이 (2021). 트러블과 함께하기. 최유미 (번역). 마농지


논문 및 저널

연남경 (2024). SF를 경유한 한국문학과 감수성의 변화 - 진정성의 주체에서 감각하는 존재로. 대중서사연구, 30(1), 11-46.

우미영 (2024). 종말 이후와 계속되는 삶 -백민석ㆍ김기창ㆍ김초엽의 기후소설에 나타난 종말의 수사학-. 동아시아문화연구, 96(0), 15-45.

윤영옥 (2023). 김초엽 SF에 나타난 물질로서의 몸과 생태적 상상력 -「늪지의 소년」, 「오염구역」, 「오래된 협약」을 중심으로-. 국어문학, 84, 371-399.

이소연 (2024). 노출된 몸과 소멸하는 자아 - 김보영과 김초엽의 SF에 구현된 포스트휴먼 주체성. 대중서사연구, 30(2), 301-333.

임현경 (2024). 한국 기후소설 담화분석과 독자 경험에 관한 연구: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 정세랑의 「리셋」, 김기창의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을 중심으로 (석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대학원.

신성환 (2025). 2020년대 한국소설에 나타난 기후 위기 시대의 일상과 심성 -「지구에 커튼을 쳐 줄게」,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그곳」을 중심으로-. 인문학연구, 69, 251-290.

표유진 (2024). 김초엽 장편소설에 나타난 면역정치와 전염으로서의 공동체 -『지구 끝의 온실』, 『파견자들』을 중심으로-. 국제어문, 100(0), 199-223. 10.31147/IALL.100.08


기사 및 온라인 자료

임병태 (2020.07.12.). 이 세계는 인간만이 아닌 비인간 타자들과 공생하는 공-산(共-産)의 세상. 대학지성 In&Out. Retrived from http://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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