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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절 연인에게

[리뷰] 편집위원 열음


사랑을 확신하도록 하는 순간은 과연 인생에 몇이나 올까. 만약 우리에게도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면 나는, 그리고 나의 당신은 그 순간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을까. 사랑이라니, 더군다나 확신이라니. 참 대책도 없이 달큰하고 낭만적인 말들이다. 하여 어쩌면 누군가는 낱말이 주는 뭉근함에 속아 언젠가 도래할지도 모를 그 순간을 총천연색의 황홀경으로 그려내며 로망에 푹 절어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가 직면하게 될지도 모를 언젠가의 순간은 혹자가 상상했던 모습에 비할 바 없이 초라한 모습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우리는 일상의 작은 순간에도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이다지도 남용되는 사랑이 새삼 간절해지는 때가 온다면 그 순간은 가령 평소에는 감히 사랑과 결부할 수 없던 시공간 속에서 사랑이라 칭할 상상조차 못 했던 모습으로 와 우리를 당황시킬 수도 있을 테다.


특히 최진영에게 사랑이란 반드시 죽음을 동반하여 오는 것인가 보다. 그간 그의 소설 속 인물은 갑작스런 연인의 죽음 앞에 사랑을 새삼 깨달았고[1],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창궐한 세계의 끝에서 미루었던 사랑을 받아들이며[2] ‘성큼성큼 어른에 가까워’[3]졌다. 최진영은 소설 속 인물들이 범우주적인 방식으로 혹은 아주 개인적인 방식으로 각자의 아포칼립스를 겪어내도록 유도하며, 사랑은 비극 속에서도 속절없이 닿아와 삶을 자각하게 하는 것임을 말한다.


이렇듯 우리의 사랑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더욱 선명해지며 죽음 속에서도 기어코 생명력을 찾는 것이기에, 너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네게 전화를 걸고 싶은 기분이 든다면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에 수록된 여덟 번째 단편, 최진영의 「XOXO」이다.




스무 번의 여름 그리고


「XOXO」는 ‘나’의 일상담이자 ‘너’와의 연애담이다. ‘나’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인물이 펼쳐낸 스물일곱 살의 여름에서부터 마흔일곱 살의 여름까지를 읽게 된다. 스무 번의 여름은 다시 스물일곱부터 서른여덟까지의 여름, 그리고 서른여덟부터 마흔일곱까지의 여름으로 나뉜다. 기준은 당연히 ‘너’와의 연애 이전과 이후이다. 진부한 말이지만 실제가 그렇다.


날씨도 기분도 열감에 들끓던 스물일곱의 여름, ‘나’는 이젠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연인과 이별했다. 계절이 두 번 바뀔 때까지 매달리다가 결국엔 놓아버린 그 애가 ‘나’에게 남긴 것은 만취하고서야 잠드는 습관이었고, 그 습관은 자그마치 십 년 동안이나 ‘나’를 알코올에 절은 채 살게 했다. 낮에는 글을 쓰는 한편 밤에는 술을 마셨고, 주변의 대소사를 챙기면서도 아주 엉망이 되어버린 ‘나’를 돌보는 법은 도무지 몰랐다. 주민인지 지민인지 하던 그 애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사랑이 갖는 관성 때문이었다. 제대로 매듭지어지지 못한 과거의 사랑은 자꾸만 ‘나’를 스물일곱의 겨울로 데려갔다.


길었던 겨울잠에서 깨어나게 된 것은 서른여덟의 봄, ‘너’의 전화가 걸려 온 어느 새벽이다. 스스럼없이 ‘나’의 이름을 부른 ‘너’는 내가 죽는 꿈을 꿨다고 했다. 죽은 줄 알고 흔들어 깨웠더니 죽은 내가 깨어나 웃었으므로, 꿈속의 ‘나’는 진짜 죽었던 게 아니라 죽은 척을 했던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가 죽은 척을 했던 것은 ‘너’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라고도 말했다. 네가 죽으면 내가 얼마나 슬퍼할지 미리 알게 해주려고.[4]


‘나’는 아직 취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취한 것처럼 그간의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너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너’가 ‘나’에게 전화했던 바로 다음 날, ‘너’와 ‘나’는 만나 카페와 레스토랑과 칵테일 바에서 시간을 보내다,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에 언젠가 사두었던 싸구려 와인을 핑계 삼아 ‘나’의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답지도 않은 이유로 한참을 웃다가 문득 잠에 들었고, 잠에서 깨어난 ‘나’는 또 잠든 ‘너’를 한참 바라보았다. ‘너’에게 신선한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아침부터 외출하였으며, 느지막이 일어난 ‘너’와 사 온 음식을 나눠 먹었다. 또한 키스하였다. 아닌 밤중에 수신한 한 통의 연락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모든 과정이 자연스러웠다. 비로소 취하지 않고서도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너‘와 함께 서른여덟의 여름을 맞았다.


‘너’의 이름은 무엇인지, ‘나’의 생활이 망가져 있던 십 년간 ‘너’는 대체 무얼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너’에 대해 추측해볼 수 있는 정보라고는 고작 ‘나’의 대학 동기라는 점, 자주 나란히 앉아 강의를 들었다는 점, 그러나 학교 밖에서 만나지는 않았다는 점, 따라서 친구는 아니었다는 점, ‘동기’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혹은 친구가 아닌 ‘동기’라는 이름에 걸맞게 졸업 후에는 짧은 안부만을 나누었다는 점이 다이다. 소설은 철저히 스물일곱 이후의 ‘나’의 생활만을 보이고 있기에 대학생이었을 ‘나’와 ‘너’의 모습을 완전히 그려볼 수는 없지만 우린 오랜 시간 알았지만 멀리서만 맴돌았지. 가까워지면 사랑하게 되리란 걸 알았으니까. 친구도 동료도 아는 사람도 아닌, 어떤 단어에도 집어넣을 수 없던 너는 아름다웠다.[5]는 ‘너’에 대한 형용을 통해 ‘나’와 ‘너’의 대학 시절을 어렴풋하게 짐작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가까워지면 사랑할 것을 직감했기에 가까워지지 않으려 애썼지만, ‘나’의 죽음 이후 도래할 자신의 아포칼립스로 미리 달려가 본 ‘너’는 그제서야 외면해 왔던 ‘나’에 대한 사랑을 확신하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죽음을 계기로 하여 되려 사랑을 첫머리에 두는 「XOXO」의 방식은 앞서 이야기했던 최진영의 전작들에서 보였던 방법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다만 『해가 지는 곳으로』, 『구의 증명』에는 생경하도록 존재했던 감각이 「XOXO」에서는 제거되는데,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꿈’이라는 장치이다. 감각은 대개 감정을 수반한다. 최진영이 범우주적 혹은 개인적 차원의 아포칼립스를 상정하면서까지 인물들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까닭 역시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감각이 가장 예민하게 곤두설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여 일종의 각성을 유도한 것이다. 그러나 ‘너’가 꾸었다던 꿈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리는 꿈을 통하여 무한의 공간을 상상해볼 수 있겠지만, 꿈에서는 감각이 부재하기에 무한은 곧 무의미로 쉬이 치환된다. 꿈에서는 무엇이든 관찰하고 만지며 맛볼 수 있지만, 동시에 그 무엇도 볼 수도 만질 수도 맛볼 수도 없다. 의식 너머에서 경험한, 실은 경험했다고 단지 믿고 있는 것을 실제 감각의 차원으로 대응시키기에는 논리적 결함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꿈에서 감각하는 모든 것은 비(非)감각이며, 꿈속에 존재하는 피사체와 그로 인한 감정들은 감각하지 않고도 알아차린 것이기에 지각이 아닌 본능의 차원으로 격상된다. ‘너’에게 걸려온 전화와 한 통의 전화 이후 이루어진 일련의 과정은 인지할 수도, 느낄 수도 없이 일어났으며 이를 통해 최진영은 사랑은 그저 ‘알’ 수 있는 것이라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술을 마시지 않고도 잠들 수 있게 되었다. 건강을 살피게 되었다. 위험은 멀어졌고 사랑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너를 생각하면 살고 싶었고, 뭐든 잘하고 싶었다. 강해지고 싶었다.[6]


그리고 마침내 무언가 알게 된 ‘너’는 ‘너’와 ‘나’ 사이에 존재하던 암묵적인 약속을 깨고 다이얼을 눌렀다. 비-경험의 영역인 ‘죽음’, 거기에 비-감각의 차원까지 넘어 본능으로 알게 된 사랑은 지각할 수도 없게 다가왔지만 ‘너’를 마음먹게 했고 따라서 잠들어 있던 ‘나’를 깨웠다. 달려가 본 죽음으로부터 확신한 사랑은 도리어 삶을 더 나은 형태로 거듭나도록 하여 결국 우리를 죽음이 아닌 삶의 방향으로 인도한다. 이때 우리가 새로이 발견할 삶의 모습은 멈춘 채 분주하던 이전과는 확연히 다를 것이다. 알아챘기 때문에,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길었던 유예가 끝이 났기 때문에. 그리하여 사랑을 깨달은 순간, ‘너’와 ‘나’의 삶에는 비로소 선명한 여름색이 감돈다.




이토록 평범한 연애담


이렇듯 특별한 구석이라고는 없이 시작되어 순조로이 흘러가던 두 대명사의 연애는 소설의 중반부에 접어들며 새로운 국면에 부닥치게 된다. 최진영은 소설의 중반부에 이를 때까지 ‘나’와 ‘너’를 추측할만한 친절한 서술은 숨긴 채 두 사람이 함께 맞은 서른여덟의 여름이 얼마나 화창했는지를 보여주며 우리를 한껏 취하게 한다. 그러다 실은 ‘나’와 ‘너’가 모두 여성이었음을, 그들이 사십 대에 접어들며 더는 현실에서 오는 압박을 간과할 수 없어졌음을 고백하며 단꿈을 꾸고 있던 독자들을 처참히 깨워버린다.


굴곡 없는 연애사가 세상 어디에 존재할까 싶지만, 이들의 문제는 부패해버린 감정 때문이라기보다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로부터 밀려오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에 더욱 안타깝다.


퇴근 시간에 맞춰 너의 회사로 찾아간 적이 있었지. …… 유리문을 밀며, 서너 명의 사람과 함께, 마침내 너는 나왔다. 나는 너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허리를 감쌌다. 너는 내 손을 살짝 떼어냈고, 조금 밀어냈다.[7]


‘너’의 회사 동료들이 ‘너’를 기다리며 미소짓는 ‘나’를 보았다면, 무안하게 떼어내진 ‘나’의 손에서 묻어나는 미묘한 애틋함을 느꼈다면 과연 무엇이라 말할까. 손을 잡고 허리를 감싸는 연인들의 모습은 전혀 낯설지 않으나 만약 그들이 동성일 경우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대개 수상쩍음과 덤덤함, 둘로 나뉜다. 아마 수상쩍은 시선은 동성의 둘이 가까이 붙어있다는 것에 대한 의문일 테고 덤덤한 시선은 둘을 연인이라고 생각지 못한 채 친구 사이의 애정 표현이라 오인한 데에서 오는 무관심이지 않을까. 둘 중 어느 쪽도 연인을 연인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를 것이 없지만, 후자는 아예 동성연애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기에 더욱 막막하다. ‘너’는 매일같이 자신들의 존재가 지워지는 세상 속에서도 혹여 존재를 들킬까 겁을 먹으며, 그런 ‘너’를 사랑하는 ‘나’는 최선을 다해 서운함과 사랑을 감추기로 한다.


연인들의 존재를 지우는 주체가 아예 타인이라면 차라리 상황이 낫다. ‘나’와 ‘너’는 가족으로부터도 자신들의 존재를 외면당하며, 혹은 가족에게까지 존재를 감추며 끊임없이 부정당하고 지워진다.


가족들은 여자 나이 운운하며 결혼을 종용했다. 나는 여자와 사귀고 있다고 말했다. 하다 하다 별말을 다 하는구나. 가족들은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혼하기 싫어서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나는 장난으로 사랑을 하진 않는다고 대꾸했다.[8]


그들에게 인정받는 방법은 단 하나. 기반 잡힌 남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남들처럼 사는 것. 나는 한 번도 그런 삶을 꿈꾼 적 없었다. 너도 나처럼 가족들에게 스트레스를 받았지. 너는 실제로 남자와 수십 번 소개팅을 했다. 너는 일에 빠져 결혼을 미루는, 숫기 없고 순진한 이성애자 연기를 탁월하게 해냈다. 너는 어릴 때부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딸이었다. 인정받는 딸, 속 깊은 딸, 믿음직한 딸이었다.[9]


마흔, 주위의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리는 동안 ‘너’와 ‘나’ 역시 가족들로부터 ‘정상 가족’의 규범에 편입할 것을 강요당한다. 한창 사랑 중인 두 연인은 사회가 정해놓은 ‘정상’의 범주 속 결혼을 하기에도, 출산을 하기에도 늦은 나이의 초조한 여성이 되어 또 한 번 지워진다. 제도의 무관심과 사변적인 압박 속 우리의 사랑은 서로를 보호하지 못한 채 그저 ‘장난’이 되어 자꾸만 서로에게 생채기를 남긴다.


금방 아물 줄 알았던 생채기는 지속적으로 덧났다. 마흔세 살의 ‘너’는 전에 비해 남루해진 몸과 결리는 구석들을 토로했다. ‘나’는 애정 어린 말들과 안마로 ‘너’를 달랬지만 그로부터 일 년 후 마흔네 살의 ‘너’는 업무 중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 평소보다 더딘 연락에 초조해하다가 결국 ‘너’의 회사에 전화를 걸어 ‘너’의 부하 직원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기 전까지의 ‘나’는 까맣게 모르는 일이었다. 어느 병원으로 실려 갔는지조차 알 수가 없어 근방의 병원을 다 뒤지던 ‘나’는 ‘너’의 집 앞으로 찾아가지만 차마 들어가지는 못했다. 만약 ‘너’와 ‘나’가 결혼으로써 묶일 수 있었다면, 아니, 굳이 결혼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서로의 보호자로서 서로를 지킬 수 있었다면 적어도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연락이 없는 ‘너’를 원망하지 않을 수라도 있었을 텐데. 두려움과 비참함에 울던 ‘나’는 자신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뿐이라고 말하지만, 이날의 상처가 정말 ‘너’로부터 온 것인지, 여태 ‘우리’가 받아온 상처가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낸 게 맞기는 한 건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서로의 성별은 그 자체로 ‘너’와 ‘나’가 살아가는 지금을 아포칼립스로 만든다. ‘너’와 ‘나’는 우리에게만 끔찍한 이 세상 속 일인칭을 지켜내기 위해 무던히도 애써야 할 테지만, 최진영은 둘의 아포칼립스는 결국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에 여전히 사랑은, 삶은 계속될 것이라고 또 한 번 힘주어 말한다. 매일 네게 구애하는 기분이라고 이별을 고하는 ‘나’에게 나도 그렇다며, 그럴 수 있어서 좋다며, 보고 싶다고 말하는 ‘너’는 슬프도록 다정한, 여전한 ‘나’의 연인.


네가 와달라고 한다면 나는 가는 수밖에. 나는 너의 늙은 부모님을 생각했다.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친구라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를 바라보는 내 눈빛을 감출 자신도 없었다. 너와 내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한다며 너의 부모님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우리가 말하는 ‘사랑’과 그들이 듣는 ‘사랑’은 같은 사랑일까? 여자랑 여자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웃어버릴 것 같다.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우리의 사랑은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하는 것. 할 수 없거나 하지 않을 때 그것은 거기 없다. 너의 가족이 나를 보고 미소 짓는다면 나도 미소 지을 것이다.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면, 나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볼 것이다. 우리가 이상한가요? 당신들도 이상합니다.[10]


우리의 사랑은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그저 하는 것. 견디거나 버텨내는 것이 아닌 그저 사랑하는 것. 우리는 모두 조금씩 이상하다. 이상한 세상 속 이상한 우리의 사랑이 특별할 것 하나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매일매일 서로에게 구애한다. 자고 일어나면 또 마음 가득 차 있는 애정에 멋쩍어 하며, 마찬가지로 찰랑일 너의 애정을 갈구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매일매일, 오래도록.




나의 시절 연인에게


스무 번의 여름 끝에 당도한 「XOXO」의 마지막 여름, 마흔일곱이 된 ‘우리’의 모습은 무책임할 정도로 행복하다. 끌어안고 있던 몸에 가득하던 생채기는 이제 흉터조차 남지 않게 아물었다는 듯, 더 나아가 우리가 언제 서로에게 생채기를 낸 적이 있기야 했냐는 듯 ‘너’와 ‘나’는 태연하게 부장으로 승진한 ‘너’가 받아낸 석 달간의 안식 휴가를 어떻게 하면 알차게 쓸 수 있는지에만 열을 올릴 뿐이다. 과감한 색의 수영복을 피팅한 채 ‘나’를 향해 귀여운 표정을 짓는 ‘너’와 그런 ‘너’에게 키스를 퍼붓는 ‘나’의 모습은 너무나도 천연덕스러워 얄미울 정도이지만, 이 소설에는 역시 아포칼립스라든지 퀴어물이라든지 하는 거창한 장르 구분보다는 평범한 연애담이라는 말이 제격이기에 어색할 것 하나 없는 결말이라는 생각도 든다. 둘이 여전히 사랑한다는데 거기에 무슨 말을 더 보탤 수가 있을까. 원래 사랑 앞에서는 모든 말이 진부해지기 마련인걸.


우리는 세 시간 가까이 키스했다. 그때 난 서른여덟 살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참 젊을 때지만) 그때 나는 내가 다 늙어 버린 줄 알았다. 겪을 건 다 겪었다고, 사랑은 우습다고, 더 좋은 것 따윈 느낄 수 없을 거라고 예단했었다. 거듭할수록 가벼워지는 사랑과 허무한 이별을 겪으면서 사랑을 유치하고 이기적이고 우스운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므로 다 큰 어른이 할 짓은 아니라고, 사랑보다는 사업이나 사교가 훨씬 어른스러운 처신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여전히 사랑을 유치하고 이기적이고 우습다고 생각한다. 유치하고 이기적이고 우스운 사랑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누구든 할 만한 짓이라고 생각한다.[11]


중년의 동성 연인, 80일간의 세계 여행, 원색의 비키니, 그리고 사랑. 혹자는 여전히 앞엣것들을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나열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의 말을 빌리자면 사랑은 으레 그런 것이다. 사랑은 원체 유치하고 이기적이고 우습다. 그리고 유치하고 이기적이고 우스운 사랑은 자꾸만 우리를 유치하고 이기적이고 우습게 만든다. 그러므로 사랑스럽게 만든다. 매일 밤을 취해 잠들던 한때의 기억은 어느덧 무색해지고 지금의 ‘나’에겐 누가 보아도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모습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사랑의 관성은 이제 매일 밤 잠들기 전의 ‘나’를 그 어느 겨울밤이 아닌 한낮의 여름으로 이끄려나 보다. ‘나’는 알아듣지 못할 언어가 잔뜩 들리는 이름 모를 해변으로 갈 것이다. 갓 구운 식빵마냥 이미 노릇한 다른 사람들의 피부와는 달리, ‘너’와 ‘나’의 살결은 그 식빵을 살짝 찢어서 본 단면보다 더 하얗고 보드라울 것이다. ‘너’는 고소한 발등으로 살살 모래 장난을 하고, 발등은 그새 조금 익어 있고, 그 앞에 펼쳐진 바다는 새파랄 것이다. 하늘도, 바다도 모두 새파란 빛이므로 ‘나’는 ‘너’를 보며 새파랗게 웃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제 우리를 손가락질하며 철이 없다고 말하는 누군가를 향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가 이상한가요? 당신들도 이상합니다.


노란 꽃을 들고 너에게 가는 길, 여우비가 내렸다. 나는 건물 차양에서 비를 피하며 빛나는 하늘을 바라봤다. 너와 연인이 되기 전 나는 매일 취해 있었지. 너는 나를 살리러 와서 정말 살렸다. …… 네가 나를 만나야겠다고 말하면 나는 바로 약속을 잡을 거야. 언제나 집에 싸구려 와인을 사둘 거야. 너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수십 번 수백 번 엉망이 될 수 있어. 우리의 첫 키스를 위해서라면 수십 번 수백 번 같은 삶을 반복할 수 있어. 나는 기꺼이 그럴 수 있어. 비는 그치고 세상은 반짝였다. 나는 노란 꽃을 들고 다시 걸었다.[12]


인(因)과 연(緣)이 맞물리기 위해서는 적당한 때가 필요하다고, 그렇기에 모든 인연은 각자의 시절이 있다고 한다. 가까워지지 않겠다는 다짐 너머로 닿아와 나에게 새로운 시절을 선사한 너는 나의 시절인연, 또한 그 언제의 시절이라도 한껏 지연시켜 호시절로 바꾸어 놓은 나의 시절 연인, 마침내 나의 시절 그 자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나일지라도 그런 나로 인해 네가 마음먹을 수 있다면, 사랑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몇 번이고 죽은 척을 할 거야. 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너는 내게 전화를 걸 거야. 네 덕에 나는 파란빛이 우울 아닌 바다를 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나는 그날의 윤슬을 평생토록 기억할 거야. 그렇게 너는 나의 모든 시절을 차지할 거야. 그러니 나는 너를 후회하지 않을 거야.


꿈속에서만 살던 네가 나의 현실이 되던 순간, 어린잎은 한 뼘 자라났고 밤의 온도는 한층 여름의 것에 가까워졌으며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가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어렴풋이, 그러나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익숙한 순간들이 끝도 없이 생경해지는 감각 속 우리는 몇 번이고 키스하고 포옹하며 새 시절을 맞는다. XOXO.



편집위원 열음 / yeoleumse@gmail.com


[1] 최진영 (2015). 구의 증명. 은행나무

[2] 최진영 (2017). 해가 지는 곳으로. 민음사

[3] 최진영 (2017). 해가 지는 곳으로. 민음사. 179쪽

[4] 최진영 외 (2019). 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 큐큐. 256쪽 (이후의 글에서 인용한 문장들 역시 모두 같은 글에서 발췌하였으므로 각주에는 쪽수만 표기함.)

[5] 261.

[6] 264.

[7] 264.

[8] 267-268.

[9] 268.

[10] 279-280.

[11] 261.

[12]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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