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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의 존재론: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

[리뷰] 편집위원 상민

강유가람은 〈모래〉(2011), 〈이태원〉(2016), 〈시국페미〉(2017) 등 여성주의적 시선의 다큐멘터리를 주로 만들어온 감독이다.[i] 특히 박근혜 탄핵 국면 당시 광장에 나서서 목소리를 냈던 영영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를 담은 〈시국페미〉에 이어 〈우리는 매일매일〉(2019)은 90년대 활동했던 영페미니스트[1]들이 현재(2018년)를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찾아가 본다.

 [i] 〈모래〉와 〈시국페미〉는 여성영화 전문 OTT 퍼플레이에서 볼 수 있다.



여성주의적 시선

강유가람의 영화가 여성주의적 시선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저 그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하는 말이 아니다. 여성이 만든 영화라고 반드시 여성주의적이지는 않다. 또 흔히 여성주의적 시선으로 만든 영화라고 한다면 직접적으로 여성운동을 다룬다든지, 여성 인권 문제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생각하게 되지만, ― 물론 〈우리는 매일매일〉은 여기에도 해당하기는 하지만 ― 사실 어떤 영화가 여성주의자들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해도 충분히 반여성주의적 시선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다. 영화의 시선이란 단순히 주제나 메시지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정의하는 여성주의적 시선이란, 한 마디로 세상을 ‘납작하게 그리지 않는’ 것이다. 사회의 이분법적 인식 틀로써는 일관된 존재로 파악되지 않는 인물의 다층적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고, 사실 그 이분법적 인식 틀에 딱 맞는 존재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이분법이란 성별 이분법을 포함한 모든 흑백논리를 가리킨다. 여성주의의 인식 틀에서 개개인은 모두 고유한 주체로 인식되기 때문에 여성주의적 시선의 카메라는 인물을 대상화하지 않는다.


또 강유가람의 영화가 여성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감독 자신의 시선, 촬영대상과 자신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관계에서 나오는 한계마저 작품의 일부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태원〉은 감독이 세 여성 주인공들과 서먹한 관계에서 친밀감을 쌓아가는 그 과정 자체가 영화의 중요한 요소였으며[ii] 〈모래〉의 경우 한국의 부동산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감독 자신의 가족을 촬영하며 풀어냈다. 물론 감독이 화면에 나와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고, 또는 자기 가족에게 카메라를 들이민다고 그것이 곧장 여성주의적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시도는 감독이 스스로 자신의 시선을 미리 규정지을 수 있는 조건을 관객들에게 솔직하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자신의 시선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려는 것일 때, 즉 단일한 진실을 보여주는 카메라를 거부하려는 것일 때에만 여성주의적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모래〉의 경우에도 부모의 부동산에 대한 집착에 비판적이면서도 자신의 부모의 집인 만큼 집값이 오르지 않기를 바랄 수는 없는 감독의 양가적인 감정이 드러나고 있는데, 이는 위선적이지 않을뿐더러 (당사자만이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당사자주의를 깨는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2]


[ii] 물론 이런 친밀감의 증대는 카메라가 인물의 삶에 얼마나 깊숙이 들어가게 되는지, 인물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는지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역시 감독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소개하고 있다. 90년대의 사진, 영상 아카이브와 푸티지[3]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본 영화의 (오프닝 영상 이후) 첫 장면도 90년대 찍힌 감독 자신의 사진이다. 강유가람은 이화여대 재학 당시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보여주며, 입학 후 ‘구원’으로서 페미니즘을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나레이션으로 소개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근래의 페미니즘 리부트를 통해 여성들이 세상을 바꾸는 모습을 보며 ―  화면에는 〈시국페미〉 속 장면들을 포함한 근래 페미니스트 시위의 장면들이 나온다 ― 뭉클한 것과 별개로 그는 “나는 페미니스트로서 어떤 역할을 해내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에 봉착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페미니스트 친구들을 찾아가게 된다. 그는 카메라 앞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을 꺼리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식사하며 고민을 나누는 자신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등장시킨다. 친구로서 마냥 냉철하게 찍을 수는 없다는 것, 감독 자신도 나이 드는 페미니스트로 고민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영페미 강유가람 자신을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이다.



다섯 페미니스트 친구들

강유가람은 다섯 명의 친구들을 찾아간다. 처음 만난 두 친구는 ‘키라’와 ‘짜투리’이다. 키라는 과거 활동가로 3년간 근속하였지만 돌연 ‘대화할 필요가 없는’ 비인간 동물을 돌보는 수의사로 진로를 바꾼 인물이다. 한편 짜투리는 다섯 친구 중 유일한 기혼 유자녀 여성으로 제주에서 농사와 숙박업을 하고 있다. 이들은 언뜻 보기에는 페미니즘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키라는 자신이 수의사로 일하고 있는 정읍시의 소싸움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고, 짜투리 역시 제주여민회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키라는 자신이 소싸움에 문제를 느끼게 된 감수성이 자신이 학생 시절 여성운동을 하던 감수성과 다르지 않다고 설명한다.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지만, 자신에게는 그것이 폭력이라는 사실이 보인다는 것이다. 또 짜투리의 경우 자신이 운동을 하던 시기에는 ‘언니’라는 호칭을 부정하는 등 여성운동 선배들에게 대들었었고 위계도 부정했었지만, 이제는 제주여민회의 ‘언니’들과 자신의 연결고리를 긍정하며 그 명맥을 영영페미들에게까지 이으려고 하고 있다.

〈그림 1〉키라의 사진. ⓒ 영희야 놀자


〈그림 2〉짜투리의 사진. ⓒ 영희야 놀자



그가 세 번째로 만난 친구는 ‘어라’. 어라는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4](이하 살림)의 상무이사로 활동 중이다. 그는 여성주의자가 많아져야 하고, 많이 고용되어야 하며 그를 위해서는 다섯 가지 기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성주의자를 위한 은행, 병원, 농장, 학교, 정당이 그것인데 어라는 그중 병원을 먼저 시작한 것이다. 여성주의 의료라는 것이 낯설 수 있지만, 어라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말하는 여성주의 의료협동조합이라는 건 단순히 의사가 여성주의자라거나 환자가 여성주의자라거나 하는 게 아니라, 이곳이 운영되는 것만으로 여성주의자가 많아질 수 있는 곳. 누군가는 여성주의라는 이름에 거부감을 가지고 떠날 수도 있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여성주의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게 여성주의라면 나 여성주의자하겠다’라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곳”이라고.[5]

〈그림 3〉어라의 사진. ⓒ 영희야 놀자


마지막 두 친구는 ‘오매’와 ‘흐른’이다. 두 사람은 앞의 세 명에 비해 비교적 알려진 이들인데, 오매는 한국성폭력상담소의 부소장이었으며 (올해 초 소장이 되었다[6]) 흐른은 인디 뮤지션이다. 오매의 경우 다섯 중 유일하게 전업 활동가로 일하고 있지만, 그는 (스스로의 표현에 따르면) ‘영페미’라기 보다는 ‘영페미’의 팬이었던 운동권 출신이다. 한편 흐른은 ‘똑지’라는 이름으로 총여학생회장까지 맡았던 인물이다. 오매가 2018년 미투 정국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라면, 흐른은 (앞의 네 인물과 마찬가지로) 현재 여성운동의 중심에서는 벗어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음악만으로는 생계가 어려워 청소년 관련 공공 기관에서 취직한 상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음악가로서의 정체성도, 여성주의자로서의 정체성도 포기하지 않은 그는 여전히 페미니즘 관련 행사를 진행하는 등 여성운동 경력이 자신의 자원이자 자부심이라고 말한다.

〈그림 4〉오매의 사진. ⓒ 영희야 놀자


〈그림 5〉흐른의 사진. ⓒ 영희야 놀자


영화의 구성상 흥미로운 부분은 친구들이 소개되는 순서가 감독이 인생에서 그들을 만난 순서와 일치하기 때문에 영화를 통해 강유가람이라는 사람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게 되는 동시에, 정작 이들이 추억하는 시기는 모두 90년대이기에 당시 있었던 여성운동의 다양한 양상을 콜라주처럼 완성시켜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 시절 친구인 키라는 군가산점제 폐지와 한국 최초로 성추행이 성립된 ‘신 교수 사건’을 소환한다. (이 사건은 후반부 흐른에 의해 한 번 더 소환된다.) 직장 옆 부서에서 만난 짜투리는 ‘고대생 이대 축제 집단 난동 사건’을 최초로 ‘공간에 대한 성폭력’으로 규정했던 역사를 떠올린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려대 여학생들이 대신 사과를 하며 대학연합 페미니스트 조직 ‘들꽃’과 ‘돌꽃’이 생겨나기도 했다. 어라의 경우 강유가람이 활동하기도 했던 ‘언니네트워크’에서 진행했던 여성주의 액션박람회나 비혼축제의 기억을 가져온다.[7] 대학원에서 만난 흐른은 총여학생회 설립과 여성주의에 입각한 학칙을 만들었던 성과를 말한다. 이들 중 누구는 아직까지도 여성운동에 매진하고 있고, 누구는 비교적 중심의 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살아가고 있지만, 이들이 남긴 변화의 흔적은 결코 적지 않은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의 활동은 주요 언론에서 주목하지 않는 만큼 여느 활동보다도 기록이 중요하다. 흐른이 영화 속에서 답답함을 토로하듯 요즘 사람들은 “한국에 페미니즘이 2010년에 들어온 줄 알”기 때문이다. 영화는 감독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모은 듯한 아카이브 자료들 ― 각종 활동 포스터, 페미니즘 웹진의 모습, 활동 모습을 담은 영상들 ― 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데, 덕분에 친구들의 ‘기억’은 더욱 생동감을 얻게 된다. 신촌 거리를 누비며 “페미천국 마초지옥”을 외치는 어라의 호탕한 모습, ‘처녀가 지나가면 날아간다’는 속설이 있던 연세대의 독수리상에 중지 손가락을 날리는 흐른의 모습 등은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포개어 놓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특히 기록의 중요성은 ‘고대생 난동 사건’의 경우에서 잘 드러나는데, 13년간 이어진 고려대 남학생들의 만행을 물리적으로 가해지는 위협 속에서도 촬영을 통해 그들의 가해 사실을 고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8] 이렇게 〈우리는 매일매일〉은 영페미들의 활동을 개괄적으로나마 총망라한 역사 아카이브의 역할을 수행한다.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

하지만 영화가 단순히 과거를 회고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다섯 친구들이 현재 살고 있는 모습을 통해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 페미니스트로 나이 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게끔 한다. 친구들은 모두 20대 시절 여성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이지만 현재는 저마다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궤적과 현재의 모습을 보면 그들은 단 한 순간도 여성주의적 관점을 잃지 않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키라의 동물권 운동은 부당한 구조적 폭력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여성주의적 관점이 확장되는 당연한 수순이기도 하고,[9] 짜투리 역시 제주에 정착할 때 페미니스트로서의 고민은 딱히 없었다고는 하지만 제주여민회와 함께 안희정 1심 무죄에 항의하는 집회에 참여하는 모습이 영화에 등장한다. 또 일반적으로 여성운동이라 하면 여성단체 활동만을 생각하게 되지만, 어라는 여성주의적으로 운영되는 기반시설을 만들어 그곳에서 더 많은 여성주의자들을 고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흐른은 앞서 말했듯 생계를 잘 유지하면서도 페미니스트 뮤지션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 이들 모두는 매일같이 거리에 나가 싸우는 식이 아니더라도 페미니스트로 살 수 있다는 것, 그렇게 각자 세상을 조금씩 나은 곳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한편 오매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90년대보다는 현재(2018년)의 맥락을 영화 속에 끌고 들어오는 역할을 한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 공대위, 낙태죄 폐지 운동 현장에서 발로 뛰고 있는 오매를 통해 90년대 여성운동의 이야기와 현재 여성운동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맞닿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16년 차 활동가로서 오매가 남기는 오래 활동할 수 있는 비결 ― 억울한 마음이나 원망으로 하면 일이 꼬인다 ― 역시 현재 활동가들에게 중요하게 다가올 것이다. 짜투리가 영화 속에서 말하듯 위계질서를 없애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겪어본 자의 경험을 통해 배우는 일 역시 소중한 일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바람직한 중년 페미니스트의 이상향 같은 것을 보여주는 영화는 아니다.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보여주는 영화는 더더욱 아니다. 이들에게 생계에 대한 고민과 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에 대한 회의는 인생의 상수로서 존재한다. 또 페미니즘에 대한 세상의 인식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페미니즘의 물결이 강해지는 만큼 백래시도 심해지고 있다. 하지만 페미니즘이란 본디 고정된 이상향을 좇는 운동이 아니지 않는가? 모든 여성혐오가 사라지는 날 ― 우리가 죽기 전에 그런 날이 올 것 같지는 않지만 ― 에도 다른 차별받는 이들이 없는지를 가장 먼저 살피는 이는 페미니스트일 것이다. 페미니즘은 유토피아에 도달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다. 오히려 유토피아로 다가가기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유토피아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기에, 페미니즘 역시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이 완료형이 되는 순간 그것은 페미니즘이 아니다. 현 상태에 대한 무한한 지양, 그것이 페미니즘이고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의 의미이다.


다섯 친구의 이야기가 끝나고, 감독은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다. 그 대답은 독자들이 각자 영화관에서 들어볼 수 있기를 바라며, 이후 감독 자신이 여섯 번째 주인공으로 부각되는 장면으로 넘어가 보겠다. 앞서 말했듯 영화의 전체 여정은 강유가람이란 사람의 삶의 여정을 되짚어보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는 영화의 말미에 친구들을 통해 질문에 대한 답을, 용기를 얻었음을 말하며 감독 본인이 카메라를 세팅하거나 친구들에게 마이크를 달아주는 모습 등, 영화의 촬영 비하인드처럼 쓰일 만한 장면을 본편에 삽입한다. 영화를 찍는, 더 구체적으로는 쉽게 잊혀지는 존재들의 목소리와 공간을 기록하는 사람으로서 그는 나이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촬영하는 순간순간마다 그는 더 넓은 시선을 가지게 되었으며, 주변의 좋은 여성주의자 친구들이 자신의 나아갈 힘이 되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래서 더 원숙한 시선으로 돌아올 강유가람의 다음 영화가 어느 감독의 신작보다도 궁금하다.  

 


공간의 존재론

영화의 마지막, 강유가람은 흐른에게 페미니스트들에게 위안을 전할 수 있는 노래의 작곡을 부탁한다. 곧이어 유선 이어폰이 꽂혀 있는 아이폰[iii]을 찍은 네 쇼트가 연달아 등장한 다음 각자의 공간에서 이어폰을 끼고 앉아서 노래를 듣는 친구들의 모습이 나온다. 주목해볼 만한 지점은 이들을 한 자리에 불러 놓고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iii] 이것이 유선 이어폰이라는 점에서 2018년에 촬영된 영화와 무선 이어폰에 더 익숙해진 2021년 관객들과 사이의 격차가 이미 발생한다. 영화의 ‘현재’도 이미 우리가 이 영화를 보는 순간 ‘현재’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노래를 듣는 이 장면들이 영화를 통해 편집으로 만남에 따라 당시의 ‘현재’가 ‘미래’로 이어진다.


생각해보면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 만나는 법이 없다.[10] 영화가 인물들을 소개하는 방식 역시 사람과 사람을 잇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 없는) 장소와 장소를 잇는 편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테면 제주 밤바다의 풍경은 어라가 사는 아파트의 전경으로 넘어가고, 살림 분점의 개원 축하 파티의 전경에서 오매가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는 법원의 입구 모습으로 넘어가는 식이다.) 이는 〈이태원〉에서 세 주인공이, 심지어 같은 이태원에서 살고 있음에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것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강유가람 영화의 진眞주인공은 각 인물의 공간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공간이란 비단 한 건물, 한 지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물이 만들어온 역사,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 그리고 어쩌면 미래까지 포괄하는 장소이다. 간단히 말해 영화에서 공간은 각 인물의 역사를 표상한다. (정읍, 제주, 살림, 상담소 그리고 ‘자기만의 방’….) 따라서 감독은 영화 속 특정 시점의 인물들을 만나게 하기보다도 모든 시점을 담고 있는 공간끼리의 만남을 주선한다. 영화는 개별 인물들을 개별 인물보다도 큰 각각의 공간을 통해 잇는 것이다.

각자의 공간에서 페미니스트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가를 말하는 영화이기에 인물들은 특정 시점에 구태여 만날 필요가 없고, 만나더라도 그것이 딱히 강조될 필요도 없다. 대신 중요한 것은 그들의 공간은 정말 많이 겹친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그 공간은 이어짐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

특정 시점의 우리는 만날 필요가 없기도 하지만 만날 수 없기도 하다. 코로나19로 인해 더더욱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거기 당신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고 안도감을 준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로 서로의 용기다. 다만 우리가 신호를 보내지 않으면 우리의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다른 이들이 어찌 알겠는가. 그래서 흐른의 노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이토록 깊은 바다인지는 몰랐지

우리들은 매일매일 여기 바다를 헤엄치네

가끔은 숨이 차올라

제자리를 맴돌까봐


조바심에 외로워도 어느덧 여기까지 와있네

돌무더기로 가득한 바다를 헤엄쳐

언젠가는 춤추고 싶어

파도를 가르는 고래들과 함께


서로에게 신호를 보내줘

깜깜한 바달 겁내지 않도록

너를 놓치지 않게 깨어있을게

언제라도 이어질 수 있게


〈우리는 매일매일〉은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되돌릴 수 없는 성벽을 가지고도 씩씩하게 잘 살 수 있다는 신호를 가득 담고 우리에게 온 고래 같은 존재다.


〈그림 6〉〈시국페미〉의 한 장면.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라고 적힌 포스트잇이 빗물에 젖은 천막에 붙어있다. ⓒ 박근혜정권 퇴진국민행동 옴니버스 프로젝트 ‘광장’ 제작팀. 



* 〈우리는 매일매일〉은 KT&G 상상마당의 배급으로 지난해 개봉될 예정이었지만 상상마당 시네마의 문제(본 호의 칼럼 “코로나 시대에 영화를 본다는 것: 민주적 영화(관)?”의 도입부를 참고하라)로 인해 뒤늦게 2021년 6월 30일에 개봉하게 되었다. 5월 27일까지 이어진 텀블벅 펀딩이 348명의 참여로 205% 달성됨에 따라 순조롭게 개봉될 것으로 보인다.



편집위원 상민 / poursoi0911@gmail.com



[1] 영페미니스트는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PC통신 등을 활용하며 두각을 나타낸 젊은 여성주의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권위적이고 획일적인 관계를 부정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개개인의 관계 맺기를 시도하면서 조직 내에서 서로 반말을 하고 대표를 뽑지 않는 등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권김현영 외, 2017).”

이후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가 이루어지며 등장한 페미니스트들은 ‘영페미니스트’ 앞에 한 번 더 ‘영’을 붙여 영영페미니스트라고 말한다.

[2] 감독은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부모님의 기대에 못 미치는 인간이면서도 부모님의 도움도 받고 싶었던 나의 이기심으로 이 영화는 탄생한 셈이다(강유가람, 2020: 62).”

[3] 영화 및 영상 제작 시 미편집 혹은 미사용한 원본 영상.

[4] 본 호의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 젠더 클리닉이 신설되었다” 인터뷰의 그 살림의원이다.

[5] 기억을 토대로 적은 것이기에 정확한 인용은 아니다.

[6] 〈고대문화〉 봄호 143호에 실린 글 “폐허에서 여성정치 다시 쓰기”에서 관련 맥락을 알 수 있다.

[7] 그가 출연한 슬랩(slap)의 “[K-페미] 언니들이 닦은 비혼의 길” (https://www.youtube.com/watch?v=bMP1MND0ljA&t=240s)에 〈우리는 매일매일〉의 장면들이 등장한다.

[8] 영화 속 영상자료를 보면 고려대 티셔츠를 입은 남학생 몇십 명이 이화여대 축제 한복판에서 고려대 응원가를 부르며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영상 속 한 고대생은 인터뷰에서 이것은 오랜 시간동안 내려온 전통이기에 자신은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K-페미] 응답하라1996! 고대 남학생 난동 끝장낸 언니” (https://www.youtube.com/watch?v=ZzlQn306Kco&t=25s)에 관련 내용이 담겨있다.

[9] 관련 논의는 교지 〈이화〉 97호의 “2N살 어느날, 갑자기 ‘한남’이 되었다” (https://blog.naver.com/ewhagyoji216/221412922318)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10] 단 한 번의 예외는 어라와 오매를 비롯한 다른 페미니스트들과 강유가람이 함께 술자리를 가지는 장면인데, 그 장면에서도 영화는 두 인물 간의 관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참고문헌

단행본

권김현영 외 (2017). 대한민국 넷페미史. 나무연필.

 

논문 및 저널

강유가람 (2020.12.). 불안의 삶의 공간. 자음과 모음 2020 겨울호(제47호), 7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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