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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청소노동자 아카이빙

[학내] 편집위원 상민

지난 6월 발생한 서울대학교 청소노동자분 사망 사건[1] 이후 저의 가슴은 지난여름 내내 무거웠습니다. 지난 7월 말 정경대 후문에 붙은, 고려대 청소노동자들의 열악한 휴게공간 실태를 고발하는 정의당 고려대학교 학생위원회의 자보를 보고서는 더욱 무거워졌습니다.[2] 이번 호의 특집 주제는 ‘노동’이었습니다. 외면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의 회장을 맡고 계신 진우 님께 연락을 드렸고, 마침 또 진우 님이 역시 회장으로 계신 서울지역대학 인권연합동아리(준) 고려대지부(이하 인권동아리)에서 청소노동자 휴게공간 실태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함께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어느덧 무더위도 가시기 시작한 8월 말, 인권동아리 분들과 함께 고려대 서울캠퍼스의 33곳 건물 휴게실을 함께 돌아보았습니다. 사실 제가 생각한 것만큼 엄청나게, 딱 보기에도 말도 안 되게 심각한 곳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질문지에 적힌 항목들을 하나씩 여쭤볼수록 크고 작은 문제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샤워실이나 세탁실이 없냐는 한 동아리원의 물음에, 동행하신 노조 분회장님은 “그런 거는 있는 건물이 애초에 없다”며 “학교한테는 현실적인 거만 요구를 해야지 너무 다 해달라고하면 안된다”며 다그치셨습니다. 또 선풍기나 냉장고가 고장 났다고 하는 노동자분들에게 분회장님은 “그건 회사[3]에다 말해야지 여기 학생들에게 말하면 안 된다”고도 하셨습니다. 


사흘간 함께 실태조사를 돌며 저도 어느새 지하의 퀘퀘한 냄새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해 모두 눕기도 힘든 휴게실에 익숙해져 갔습니다. 이제 휴게실을 별도로 만들어주지 않아 결국 샤워실을 개조해서 만든 경우(미래융합기술관), 혹은 휴게실을 지하로 옮기라는 요구를 거부하자 휴게실에 가기 위해 거쳐 가야 하는 공간에 동아리방을 만들어 놓은 경우(연수관) 정도가 아니고서는 저에게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어느덧 청소노동자분들의 말씀 중 기록해서 학교 측에 요구할 것과 어차피 반영되지 않을 것을 구분하고 있었고 “아 이건 회사 측에 말씀하셔야 할 거 같은데….”라는 생각을 속으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제가 근본적인 물음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 학교의 미화(美化)를 담당하는 노동자의 고용과 처우를 다른 회사에 맡기는 게 맞는 일일까요? 당연히 학교가 직접 고용하고 관리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이는 외주화와 노동 유연화가 상식이 된 2021년에는 맞지 않는, 너무 비현실적인 소리인 걸까요. 


노조 분회장님은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인권동아리나 총학생회도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고대문화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실태조사와 총학생회비상대책위원회 인권연대국의 조사 내용을 반영한 요구안이 곧 학교 측에 전달된다고 하는 상황에서, 교지이자 계간지인 《고대문화》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때 떠오른 것은 무수한 눈빛들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오면 바쁜 와중에도 반겨주시던 그분들의 눈빛, 갈 때마다 커피나 비타500을 권하시던, 조사를 마치고 떠날 때면 ‘이 얘기 꼭 좀 위에 잘 전달해달라’ 하고 말씀하시던 그 눈빛. 그래서 저는 곳곳에 자신의 손길이 닿아 말끔한 건물 안에서 정작 자신에게는 지하 보이지 않는 곳의 좁은 자리만이 허락되는 그들을, 그 눈빛들을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들께 다시 찾아가 네 가지 질문을 드렸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필요한, 어찌 보면 가장 단순하지만 대부분 도통 쉽게 답하지는 못하시던 질문들을요. 


글쎄요. 여러분들에게 이 답변들이 뜻밖일지 아닐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200명이 넘는 전체 노동자분들 중 ‘고작’ 18분의 응답을 담은 이 기록이 과연 ‘아카이브’라고 불릴 만한 것인지에 대한 확신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 기록 속에서 이분들은 그저 ‘고생하는 사람들’, ‘청소노동을 비가시화시키려는 학교에 의해 지워져 버린 여성들’, ‘학교와 용역회사에 의해 착취당하는 노동자들’로만 남아있지만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부족하겠지만 일단 그것이면 저는 족할 것 같습니다. 


* 청소노동자 휴게공간 실태조사의 자세한 내용은 tiny.cc/komun_cleaners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맞춤법보다도 인터뷰이들의 말씨를 그대로 살리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그 점을 감안하고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연희 (LG포스코경영관 / 2019년부터 근무(아르바이트 1년 포함), 56세)

어떤 계기로 고려대에서 일하시게 되셨나요?

저는 마트, 그러니까 회사인데 제과 업계에 다녔거든요. 그 마트에서 이렇게 물건 내리면 그거 정리해주는 거, 일명 코디 서비스라고 하죠. 그거를 하다가 여기 조합원 소개로 오게 됐어요. 여기는 정년이 안정돼 있으니까. 


일하시는 건물의 특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여기도 코로나 때문에 요샌 학생들이 잘 안 오는데, 저는 강의실 쪽이라 일이 줄었지만 교수님들 쪽은 계속 일을 해요. 또 일이 줄었다고 해도 기본적인 일, 화장실이나 복도 같은 건 매일 하고. 다른 건물은 제가 잘 안 가봐서 모르겠는데 복도 같은 경우도 되게 크죠, 넓고. 건물 지은 지 한 10년이 넘었다고 하던데 그러니까 이제 노후 현상이 나타나서 천장에서 물이 많이 새요. 작년 같은 경우는 비가 너무 많이 와 가지고 정말 저희들이 다 컵 같은 거 갖고 다니면서 발견하면 대놓고 그랬어요.


힘들었던 기억 혹은 평소에 힘든 점은 어떤 것인가요?

저 같은 경우는 차를 가지고 출근하는데, 여기 경영관 지하에 주차장이 있는데 저희는 쓸 수가 없어요. 교수님들만 쓰고. 그래서 저기 중앙광장 주차장을 써야 하는데, 문제는 저희가 일을 하러 도착을 하면 5시거든요. 근데 정문은 5시 반에 열려요. 그럼 이제 차에서 내려 갖고 철문을 열고, 또  들어와서는 닫고 해야 해요. 게다가 철문이 그냥 보통 대문이 아니고 학교 정문이다 보니까 되게 두껍잖아요, 문이. 아무래도 다 여자들인데. 그러니까 그게 좀 힘들어요. 또 저희가 아침에 출근하는데, 아침에도 덥잖아요. 일하면 특히. 근데 에어컨이 늦게 나오니까. 그전까지 너무 덥죠.

또 저 같은 경우는 강의실을 하다 보니까 칠판 지우기가 너무 힘들어요. 칠판도 높고 그게 한 번으로 해서 이렇게 지워지는 게 아니고 보통 세 번은 걸레질을 해야 되거든요.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근무하시는 동안 즐거웠던 기억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저희 언니들하고 되게 유대 관계가 좋아요 그 방에서. 그런 게 좋고 언니들하고 이렇게 대인 관계 그런 게. 또 빨리 온 만큼 저희가 또 4시 퇴근이잖아요. 물론 8시간 근무는 맞지만, 어쨌든 일찍 퇴근하는 게 좋고. 정부에서 지정해 준 공휴일은 다 쉬니까. 이번 임시공휴일도 쉬고. 그런 건 좋죠.




서재월 (LG포스코경영관 / 2019년부터 근무(아르바이트 3개월 포함), 56세)

어떤 계기로 고려대에서 일하시게 되셨나요?

저는 먼저 요식업 쪽에서 일을 했었는데요, 하나 있는 아들이 결혼을 해서 나가면서 동생한테 의지할 겸 아예 이쪽으로 이사를 했거든요. 근데 동생이 여기 일하는데, 여기서 일하는 거 어떻겠냐고 해서 이제 알바를 해보고 들어오게 됐습니다. 동생이 있는 곳이니까 좀 믿음도 가고. (알바도 여기서 하셨나요?) 알바는 저기 MK에서 했고, 정식 취직해서는 종생관(라이시움)에서 1년 하고 여기 온지가 2년 차네요. 


일하시는 건물의 특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일단 여기는 카페트가 다 깔려있어요 복도에. 그러나 보니까 대청소는 없고 개인이 나름대로 이제 깨끗이만 하면 되는, 그런 차이가 있네요. 교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이 슬리퍼 소리 같은 게 나면 안 되니까 다 카페트가 붙어있고, 이제 뭐 커피를 쏟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누적이 된 거는 반장[4]님들이 방학 때, 1년에 한두 번 밀어주세요. 저 같은 경우는 교수님 쪽을 맡아 해서 방학이나 코로나 영향이 별로 없어요. 또 교수님들은 저희가 조금 어려운 분들이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더더욱 조심하고, 좀. 그런 부분은 있어요.


힘들었던 기억 혹은 평소에 힘든 점은 어떤 것인가요?

힘든 건 아니고 안타까운 건데, 학생들이 그래도 저희가 이렇게 고대 미화원인데 학생들이 입학도 하고 졸업도 하고 이러는 모습도 봐야 저희도 막 뿌듯하고 그러는데 그 모습을 지금 못 보고 있다는 그게 안타깝죠. 다 우리 자식 또래잖아요. 근데 또 저희가 일이 없는 건 아니라 늘 일을 하고 있는데 괜히 왜 주인 없는 곳에서 일만 하는 것 같고. 안타까워요. 그래서 어쩌다가 이렇게. 이제 다니면서 졸업 사진을 찍고 그러는 거 보면 입학도 안 했는데 졸업 사진은 찍어야 되고. 그러는 게 우리끼리 안타깝다 그러죠. 왠지 모르게 짠하고. 내년에는 좀 코로나가 끝나서 참 입학하는 학생도 보고 싶고, 또 졸업하는 학생도 보고 싶고.


근무하시는 동안 즐거웠던 기억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제가 종생관에 있었을 때 대청소를 하다가 미끄러져 넘어져 가지고 갈비뼈 두 대가 나간 적이 있어요. 그래서 이제 그 대청소라는 게 이제 버겁더라고. 마음이 막. 그래서 여기 왔을 때 좋았죠. 또 제가 다쳤는데도 불구하고, 코로나로 이렇게 힘든 상황에도 제가 돌아올 수 있는 직장이 있다는 거. 그게 너무 감사하고 너무 좋아요. (산재처리도 됐고요?) 네 이제 옛날에는 노조가 이렇게 형성이 안 돼 가지고 다치거나, 수술을 해야 되거나 그러면은 그냥 그만뒀어야 됐다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노조가 있으니까 이제 무조건 근무 시간 내에 다친 거는 이제 산재 처리가 되고. 이 나이에도 다시 복귀할 수 있고 그래서 그게 감사하죠. 

 



장세숙 (청산MK문화관 / 2018년부터 근무(아르바이트 1년 포함), 58세)

어떤 계기로 고려대에서 일하시게 되셨나요?

아는 사람이 여기 경영관에서 일하고 있는데요, 소개해주기를 여기가 70살까지 정년이 보장이 돼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게 좋아가지고 들어왔거든요. 노조가 있어가지고 보장이 된다고 해서.


일하시는 건물의 특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여기는 일은 꾸준해요. 왜 그러냐면 여기는 방학이 없어요. 제가 지금 1층 2층 3층까지 하는데 거기는 연구실 교수님들이 주로 있거든요. 학생은 없어도 다 꾸준하게 나와요. 그러니까 일이 코로나랑 별 상관없이 일은 꾸준하게 있어요. 아 여기 위에 거기 신문사(고대신문)가 있거든요. 그래서 학생들 쓰는 샤워실이 있어서 저희도 학생들 없을 때 쓸 수 있어서 그게 좋네요. 샤워실 있는 건물이 거의 없으니까. 


힘들었던 기억 혹은 평소에 힘든 점은 어떤 것인가요?

요새는 청소할 때 마스크 쓰고 하니까 좀. 일단 그게 제일 답답하고. 저희 휴게실이 주차장 안쪽에 있는데 비가 오면 물이 들어오니까, 휴게실까지 물이 차기도 하고…. 여기 배수로에 물이 고여서 벌레들이 잔뜩… 특히 모기가 여름엔 드글드글해요. 지하니까 쥐나 바퀴벌레도 몇 번 보고. 그래서 쥐도 몇 번 잡았네요. 


근무하시는 동안 즐거웠던 기억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음 좋았던 기억… 생각이 잘 안 나는데. (웃음) 일단 둘이 지내니까 밥을 같이 해 먹을 수 있고, 서로가 이렇게 잘 생각하면서 이렇게 이해하는 그런 부분도… 사람이 둘밖에 없으니까 그런 게 좀 있는 것 같아. 예 그건 좀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조금 다 장단점이 있지마는, 투닥거릴 때는 화끈하게 투닥거리고 또 사과할 때는 확실하게 사과하고 뭐 그렇지 뭐.

이게 질문이 단순한데도, 막상 대답을 할라니… (질문이 어렵나요?) 아니 질문은 단순한데, 생각이 잘 안 나네요. 


 

양순의 (경영본관 / 2016년부터 근무(아르바이트 2년 반 포함), 58세)

어떤 계기로 고려대에서 일하시게 되셨나요?

요즘은 100세의 삶을 살고 있잖아요. 저희 같은 경우는 이제 70세가 정년이 가능하다는 점 그것도 좋고. 또 실내에서 하니까, 계절의 변화가 없이 폭염이나 동절기 막 이럴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겠다는 점? 그걸 보고 제가 이력서를 내고 들어오게 됐어요. 전에는 도시가스 검침 일을 했었는데 거기는 정년이 58세 막 이래가지고요. 

일하시는 건물의 특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저희는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는 것 같아요. 인원이 3명으로 적다 보니까 가족적인 분위기고…. 경영본관은 강의실이 없고 사무실이 많아요. 무슨 창업하는 곳도 있고. 또 정진초라고 고시생들 공부하는 곳이 있는데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학생들도 있고. 그래서 사람들은 여전히 많고요. 코로나 터지고는 모든 분들이 만질 수 있는 공공시설 있잖아요 계단 손잡이, 화장실, 사무실 손잡이. 이런 거는 수시로 소독하고 있어요. 

힘들었던 기억 혹은 평소에 힘든 점은 어떤 것인가요?

일단 코로나 이후로는 마스크를 쓰고 하는 게 불편함이 좀 있고요. 그리고 뭐 가정에서 가족과 외식도 하고 하는데 요즘은 그런 거나 영화 관람 이런 문화생활을 전혀 못 하잖아요. 왜냐하면 또 저희가 하고 싶어도 학교에 또 피해를 줄 수도 있잖아요. 저 하나로 인해서 이렇게 항상 있어서 굉장히 조심하고 절제된 생활을 해야 된다는 생각이 늘 있는 거 같아요. 

그리고 청소 관련해서는 변기가 수시로 막히고, 그리고 막 넘치고 그러는데 진짜 막 그거 하고 나면 아침밥이 안 들어가요.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해요. 또 하절기에 우리가 덥잖아요. 그런데 에어컨을, 경영대 쪽은 다른 데보다 일찍 틀어준다고 하는데도 7시부터 나오거든요. 근데 저희가 보통 출근을 빠르면 4시에도 나와요. 지금은 방학이어서 직원분들이 조금 늦게 출퇴근을 하기 때문에 좀 여유가 있는데, 그 개학하고 나면 9시 정시 출근을 하셔서 정말 빠르게 행동을 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다들 최소 한 시간은 일찍, 그니까 5시에는 나오거든요. 여유 있게 하려고. 그러니까 한 5시, 6시경에는 틀어 줬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학교에 그런 얘기를 했었는데, 돈이 어마어마하게 든대요. 저희 하나로 인해서. 


근무하시는 동안 즐거웠던 기억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아, 이거는 꼭 내보내 주세요. 교수님들이나 직원분들 이렇게 뵙잖아요 엘리베이터에서나 복도에서. 또 학생들도. 너무 따뜻한 말을 해주시는데,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감사해요. 고생한다는 말, 수고하신다는 말. 진짜 그 말 한마디가 너무너무 이렇게 따뜻한 큰 힘이 되더라고요. 편견을 두지 않고 그렇게 해주시는 게 참 감사한 거 같아요.  

 


 

A (문과캠퍼스 강의동 / 2017년부터 근무, 66세)

어떤 계기로 고려대에서 일하시게 되셨나요?

저는 따로 하던 일이 없다가 (그럼 전업주부로 계셨던 건가요?) 네, 근데 이제 나이 먹었는데 일을 좀 해야 되겠다 싶어가지고 좀. 근데 저도 나이가 있고 이제 아무래도 외부에서 아는 사람들 만나면 일하다가 불편하잖아요. 저보다도 보는 사람이 깜짝 놀라니까. 근데 여기는 외국 사람하고 학생들만 있으니까, 그게 제일 컸죠 들어올 때. 다른 분들도 아마 그게 제일 많이 클 거예요.


일하시는 건물의 특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저는 잠깐 종생관(라이시움)에서도 했었는데요, 뭐 환경 자체는 비슷한데 아무래도 거긴 차도가 바로 앞이라 여기가 좀 공기가 좋죠. 여기 같은 경우(인터뷰를 진행한 작은 방)는 지금 5층이잖아요. 이건 이 방이 건물을 지으면서 건물 특성상 있게 된 거예요. 여기가 300석짜리 강의실에 딸린 기계실인데, 그래서 이제 여기들 수업하려면 이게 전기가 돌아와서 여기 못 있어요. 그리고 여기 위에 에어컨도 달기만 했지 나오지는 않아요. 


힘들었던 기억 혹은 평소에 힘든 점은 어떤 것인가요?

이제 우리가 원래 일하는 걸 6시부터로 치는데 그때 와서 일을 하면 늦어요. 왜냐하면 학생들이 오기 전에 다 해놔야 되기 때문에. 물청소 같은 건 미리 해놔야 다 마르잖아요. 그래서 좀 일찍 와야 되는 게 힘들죠. (그거는 따로 추가 근무시간으로 계산이 안 되는 거죠?) 네 근데 그거는 말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일찍 오는 거니까.

일반적으로 쓰레기도 버리는 시간이 있어요. 쓰레기차가 7시에 와요. 그러면 우리가 6시부터 일을 한다고 그러면 너무 늦죠. 게다가 화장실 청소가 좀 많아. 소독해야지, 물청소 해야지. 양쪽 화장실 다. 또 일찍 오는 학생들이 꽤 많더라고요. 시험 때는 더 하고. 그런데 물청소해놓은 걸 밟고 다니면 엉망이 되니까, 좀 일찍 오자하고 오는 거죠. 

학교에서는 이제 일반 직원분들은 우리 보고 유령이라고 한다고 그래요. 안 보이니까. 저희가 이제 안 보이는 시간대에 다 완벽하게 해놓죠. 해놓고 이제 쉬는 거지. 9시부터 10시까지가 쉬는 시간이에요.


근무하시는 동안 즐거웠던 기억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일단 월급을 타는 게 좋겠죠. (웃음) 저는 전에는 월급 받고 일한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일단은 여기 뭐 다 교수님들 친절하시고 학생들도 그렇고 좋아요. 

또 여기 사람들. 코로나 이렇게 전에는 그래도 직원들끼리 많이 소통했죠. 왜냐하면 이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되니까. 차도 잠깐씩 마시고 네 그런 건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이제 상황이 이러니까. 붙어있지 말라고 하니 어쩔 수가 없죠. 


 

B (문과캠퍼스 강의동 / 2017년부터 근무(아르바이트 2년 포함), 56세)

어떤 계기로 고려대에서 일하시게 되셨나요?

저도 이제 개인적으로 가게도 해보고 사회생활 할 건 다 했어요. 그리고 이제 보험 대리점도 한 5년 다녔고, 치킨집도 한 4어 년 정도 해보고 했는데 이게 사람들이랑 부딪히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러다가 아는 언니가 여기 다녀서, 설명을 해줬는데 일을 새벽에 하긴 하는데, 이제 사람을 안 만나니까 너무 좋은 거야. 그래서 이력서를 냈어요. 이제 또 나이에 대한 제한도 있고 하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식당밖에 없더라고요. 식당은 또 힘들고 그런데 여기는 딱 조건이 좋더라고요. 만 70세까지 일할 수 있다고, 그런 얘기만 듣고 들어왔어요.


일하시는 건물의 특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저희는 층별로 나눠서 일을 하거든요. 게다가 요새 코로나 때문에 휴게실보다도 각자 층에 조그만 공간에서 잠깐씩 쉬어요. 냄새가 나서 오래는 안 있긴 하지만. 휴게실은 지하에 있는데 주차장 안쪽이거든요. 또 사람 수에 비해 좀 좁긴 하죠. 그런데 이제 그나마 우리는 그나마 괜찮다고 해요. 공간이 좀 넓어서. 다른 데는 더, 창문도 없고 그런 데도 있다고 하니까. 


힘들었던 기억 혹은 평소에 힘든 점은 어떤 것인가요?

뭐 별다른 건 그런 건 없는데. 어느 학생은 인사를 잘해요. 그런데 또 어느 학생들은 그냥 이렇게 (못 본 체하고 가는) 하는 그런 문화가, 제 기준에는 좀 안 맞아 보이죠. 특히 여기는 대학원도 있는데, 그럼 사실 매일 보잖아요. 1학기 때는 잘 몰랐어도 2학기 때는 이제 다 알잖아요. 그렇게 계속 보는데도 그러면 조금 섭섭하긴 하죠. 수준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또 그런 실망스러운 게 있죠. 근데 뭐 인사 잘하는 학생은 또 엄청 잘하고 교수님들도 여기 있는 저희 일하는 사람들 배려를 굉장히 많이 해서 불편한 게 있냐고 한번 물어봐 주시고, 식사도 또 1년에 한 번씩 같이 하고 그래 주세요.


근무하시는 동안 즐거웠던 기억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와서 보니까 나이대가 다양해요. 여기서 제가 제일 막내거든요. 50대, 60대, 70대가 다 있고 인생 사는 것도 다 틀리니까 소통이 안 될 거 같죠? 근데 또 이해를 많이 하시고 소통이 또 되더라고요. 인생 얘기도 하고, 많이 배우죠. 또 이제 저희 이제 코로나 터지기 전에는 또 이제 단합대회도 봄가을로 했었어요. 그렇게 가족처럼 지내고. 근데 이제 그런 게 없어졌다는 거야. 2년 동안 우리가 그 못했다는 거. 또 우리가 밖에 나갈라 해도, 개인 생활도 코로나 때문에 신경 쓰이죠. 어디 가고 싶어도 더 이 직원들은 더 눈치도 보고….  여기 직원이랑 또 틀리겠죠. 우리는 용역이니까 더 신경 쓰이죠. 마음이 불편하죠. 

예전이 훨씬 좋았어요. 그게 우리 마음이 편하죠. 왜, 일하러 왔으니까. 오히려 학생들이 많아야 되는데. 그러니까 불편하죠. 지금은 우리만 있는 것 같고 그렇잖아요 느낌이. 더 눈에 띄기도 하고. 학생들 오면 제일 좋은데. 


 

김기숙 (서관 / 2017년부터 근무(아르바이트 2년 포함), 59세)

어떤 계기로 고려대에서 일하시게 되셨나요?

전에는 마트에서도 일하고 여러 가지 일을 했어요. 그러다가 제가 아는 분이 여기 다니고 계셨는데 그분이 퇴직을 하면서 한번 해보라고 얘기를 하셨어요. 마침 또 제가 집이 종암동이에요. 고대가 또 환경이 좋잖아요. 나무들도 많고. 네, 그래서 진짜 너무 좋았어요. 여기 돼 가지고. 그리고 또 이제 정년 70세까지 일할 수 있다고 예 그게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청소하는 일은 처음 해봤는데 잘 맞고 아주 좋은 것 같아요. 


일하시는 건물의 특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제 서관이 건물이 오래됐어요. 여기가 문화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100년이 넘어가서 나무 창문틀 이런 데는 막 나무가 갈라지고. 또 거미가 계속 줄을 치고 그러니까 매일 청소를 해야 돼요. 옛날 건물이라 그런 게 조금 힘들더라고요. 겉에서 보기에는 건물은 좋아 보이지만…. 거미 알도 난 여기 와서 처음 봤어요. 거미알이 포도알처럼 이렇게 막 쳐있더라고요. 또 비가 오기만 하면 다 새고. 거기에다가 또 이제 벽에 페인트 막 일어나서 다 떨어지고. 그게 낡아서 그런 건지. 계속 쓸어야 돼요. 


힘들었던 기억 혹은 평소에 힘든 점은 어떤 것인가요?

에어컨이 6시부터 나오면 좋은데 한 8시는 다 돼서 나오더라고요. 그래가지고 여름에는 진짜 땀띠 나고 막 고생 엄청 했어요. 온몸이 땀에도 다 젖고 또 마스크까지 쓰니까, 그런 게 아주 고역이었어요. 에어컨을 좀 일찍 틀어주면 좋겠더라고요. 또 1년에 한두 번씩 대청소가 있거든요. 바닥을 기계로 갈고, 또 이제 세제에 묻혀서 갈고, 또 이제 거기 다 닦아낸 다음에 이제 왁스 칠하거든요. 그런 게 굉장히 힘든 점이에요. 이제 그거 하다가 미끄러져가지고 세제 물에 그래서 골절된 동료도 있고.

또 화장실이 막히고 막 넘치고 하는데 그럴 때는 이제 밥도 좀 안 넘어가고…. 뭐 저희가 하는 일이지만 물티슈를 변기에 넣어가지고 막히고 그러더라고요.  


근무하시는 동안 즐거웠던 기억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처음에는 새벽에 나오는 게 굉장히 힘들었죠. 일어날 수 있을까 생각을 했는데. 이것도 한 며칠 지나니까 적응이 되더라고요. 오히려 일찍 나오니까 더 일찍 일하고 또 이제 퇴근 일찍 하니까 좋긴 하더라고요. 그런 게 장점입니다. 


 

정혜경 (청산MK문화관 / 2015년부터 근무(아르바이트 6개월 포함), 54세)

어떤 계기로 고려대에서 일하시게 되셨나요?

저는 특이한 케이스 같은데, 우리 어머니가 여기서 일하시다가 퇴직을 하셨어요. 그러면서 이제 하시던 건물에 제가 알바로 들어가게 되면서 그렇게 계기가 됐어요. 거기가 아세아 연구소 거긴데요. 거기에서 이제 처음에 일을 배워서 알바를 시작했고 그래서 이제 그냥 우연치 않게 하게 된 거죠. 그전에는 제가 프리(랜서)로 일했었는데 시간이 자유로운 대신 좀 이제 고정 수입은 안 됐어요. 그런데 여기는 들어오니까 이제 고정 수입도 되고 좋더라고요. 일은 좀 어려워서,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좀 어려웠어요. 좀 생소한 일이라서. 근데 지금 하다 보니까는 괜찮아요. 


일하시는 건물의 특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여기가 동떨어져 있다 보니까, 담당 반장님이 따로 없고 학관 반장님이 같이 해주시거든요. 근데 어쨌거나 길 건너 있다 보니까 자주 오시질 않아서 저희가 밖에까지 다 하고, 반장님은 그 모아놓은 봉투를 수거해가는 정도. 근데 여기가 근처에 사무실도 많고, 학교 건물이라고 표시가 잘 안 돼 있으니까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아요. 휴일 지나고 오면 엄청 지저분해요. 특히 주차장 입구에서 담배 피우고 가는 사람들. 그래서 바닥에 담배꽁초가 한 무더기가 있는데 저번에는 그래서 플라스틱 뭐를 놨었는데 그게 탔었어요. 그니까 화재 위험까지 있는 거죠. 또 건물이 노후돼 가지고 주차장 하얀 선이 다 부스러져요. 그래서 가루가 계속 나오는데 쓸면 또 부스러져서 나오고 또 나오고….


힘들었던 기억 혹은 평소에 힘든 점은 어떤 것인가요?

일단 저는 처음 일 배울 때, 거기는 한 건물을 혼자 하는데 엘리베이터도 없었어요, 4층짜린데. 그래서 일도 벅차고 대청소도 혼자 해야 하고…. 막 쓰레기도 위에서 창밖으로 던졌었어요. 4층 꼭대기에서 무거운 봉지를 일일이 들고 내려오기가 너무 힘드니까. 그래서 밑에 사람들한테 조심하라고 그러고, 내려와서 보면 터져 있고 그랬죠. 처음에는 어머니한테 배웠는데 구박도 많이 받았고. (웃음) 근데 지나니까 또 수월해지더라고. 아침에 출근하는 하는 것도 습관이 되니까 또 괜찮고.


근무하시는 동안 즐거웠던 기억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직원분들이 많으니까 아무래도 이제 공감대가 많이 맞고 그렇죠. 여러 가지 어려운 일 같은 거 서로 얘기하면서 도움도 되고. 다른 건물분들하고 막 자주 보는 건 아닌데, 요샌 특히 더 그렇지만 만나고 하면 서로 이제 언니처럼 다들 그렇게 그런 건 있어요. 공감대가 맞는 부분은 많이 맞아. 일할 때는 힘들어도 서로 휴게시간에는 또 얘기하고. 그래도 좀 자유로운 면이 있어서 괜찮아요.



 

노미숙 (교양관 / 2015년부터 근무, 56세)

어떤 계기로 고려대에서 일하시게 되셨나요?

여기 직장에 오게 된 동기는요. 지인을 통해서 소개받아서 왔고요. 이제 다른 직장 다니다가 이제 노후에도 이건 할 수 있으니까. 네 그냥 단순 노동이고 그러니까 그냥. 뭐 별다른 그런 거 없어요. 그냥 그래서 옮긴 거예요. 오래 할 수 있고. 다른 데는 정년이 60세인데 여기는 70세까지니까 여자들이 뭐 나이 먹어서 할 수 있는 게 특별히 없잖아요.


일하시는 건물의 특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강의실이 많고, 지금 코로나니까 그렇지, 학생들 많을 때는 엘리베이터고 계단이고 사람들이 진짜 머리만 보여요.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데 엘리베이터 세 대가 있는데도 그걸로는 안 되니까 계단으로 오르내리는데, 정말 많아요 학생들이. 저기 방학 때도 동계, 하계 대학교가 있어 가지고  여기는 항상 사람이 많아요. 우리는 방학이 따로 없죠 그래서. 근데 그때는 힘들다고 막 투정 부리고 그랬는데 지금 이게(코로나19가) 너무 길어지잖아요. 지금 거의 2년째 돼 가니까. 지금은 그때가 좋았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가 요새 일을 해야 되는데, 지금 코로나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상황이 이렇게 됐지만, 마음은 안 편해요. 육체적으로는 편한데 마음 쪽으로는 왠지 좀 불안하다고 해야 하나? 그니까 이렇게 학교가 좀 돌아가야 되는데. 어쨌든 지금 적막하잖아요, 학생들이 등교도 안 하니까. 그러니까 마음적으로 좀 불편해. (불안하시다는 게 고용에 대한…?) 응, 그게 제일 불안한 거 같아요. 육체노동을 우리가 해갖고 어서 돈을 받아가야 마음이 괜찮은데 덜 불편하고.


힘들었던 기억 혹은 평소에 힘든 점은 어떤 것인가요?

굳이 안 좋았던 거는 왜 같이 이렇게 생활을 하다 보면 트러블이 있잖아요. 마음이 안 맞으니까. 그런 부분에서 좀 이렇게 마음 맞는 사람끼리는 이렇게 재미있게 지내요. 근데 동료들하고 트러블이 있으면, 차라리 육체적으로 힘든 거는 괜찮은데 마음이 안 편하니까,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출근하는 것도 싫어요. (트러블이라면 어떤...?) 좀 성격 차이도 있는데, 아니 그냥 여자들이 모여 있으니까, 사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근데 또... 계속되면 그렇죠. 


근무하시는 동안 즐거웠던 기억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래도 대부분의 경우엔 이렇게 동료들끼리 마음 맞아서 같이 밥 해 먹고 같이 지내고 그런 게 좋았던 것 같아요.



 

황보선 (해송법학도서관 / 2014년부터 근무, 68세)

어떤 계기로 고려대에서 일하시게 되셨나요?

나는 식당을 경영하다가 몸이 안 좋아져서 관두고 쉬다가 우리 애들 다 출가시켰는데, 우리 애아빠가 또 병원 신세를 지는 바람에 수발하고 있다가, 둘이서 같이 쉴 수가 없으니까 이제 나도 벌어야 되겠다 싶어서 들어왔어요. 친구가 여기 다녀가지고 그 친구 소개로. 지금 벌써 다닌 지가 8년이나 됐네요. 들어와서 보니까 이런 청소하는 거는 처음이지만, 참 뭐 다들 사람들도 좋고. 예전에 도서관에서 알바를 했었거든요. 그래서 처음부터 쭉 해송에서 있었는데, 도서관이 참 조용하고 뭐 누구 부딪히지도 않고 누구한테 다툴 얘기도 없고 자기 할 일 자기 깨끗하게만 하면 되니까. 참 적성에 참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일하시는 건물의 특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해송은 애매한 게 우리는 신법대(법학관 신관)로 소속이 돼 있어 가지고요, 그래서 휴게실을 거기 방에 우리가 얹혀 있어야 되는 상황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옷이라도 갈아입게 해달라고 해서 서고 있는데에 창고를 하나 만들어 줬는데, 창문이 없고 지하 2층이라 공기가 너무 안 좋아가지고.... 그나마 그것도 감사해야죠. 그것도 없었는데. 

사실 해송이 소속은 신법대여도 일하는 장소는 우리는 둘(김옥순 님)이서만 도서관 일을 하는데, 다행히 짝꿍이 잘 맞아서. 둘이서만 일하는데 뭐 다투지도 않았고…. 파트너가 이제 올해 퇴직을 한다니까 너무 아쉽고 또 누구와 와서 또 같이 지내. 이렇게 다정하게 잘 지낼 수 있을까 싶어서 조금 걱정도 되고 그러네요.


힘들었던 기억 혹은 평소에 힘든 점은 어떤 것인가요?

처음 해송에 일하러 온 날, 처음에는 알바로 온 건데 미끄러져 가지고 뒤로 꽝 떨어진 거예요. 근데 아프다고 말을 못 했어 취직 못 할까 봐. 알바니까. 취직하기 위해서 왔는데 취직을 못 할까 봐 끙끙거리고. 그거 알바하면서도 병원 다니고 피 엄청 많이 빼고 진짜 많이 고생했거든. 그때 그게 제일, 지금도 기억에 남아. 그래 갖고 결국은 내가 그거를 허리 다친 거를 참고 말을 내색 안 하고 혼자서 병원 다니면서 그렇게 나아서 취직을 했어요. 


근무하시는 동안 즐거웠던 기억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진짜 땀 뻘뻘 흘리고 진짜 뛰어다니면서 해야 될 정도로 바쁜 때가 좋았던 것 같아요. 요즘에는 학생들이 너무 안 와서. 하나님 우리 여기 해송 도서관에 오는 학생들 다 열심히 잘하게 해주세요, 그러고 맨날 기도하면서 내가 청소를 하는데. 학생들이 점점 더 많이 왔으면 좋겠는데 학생들이 많이 안 와요 요즘에. 무서워서 그러나 봐요. 예전 같은 그런 시절이 다시 왔으면 좋겠어. 




손영숙 (현대자동차경영관 / 2013년부터 근무, 60세)

어떤 계기로 고려대에서 일하시게 되셨나요?

저희 언니가 원래 여기 이제 먼저 들어왔어요. 저는 원래 약국 전산 일을 하고 있었는데, 약 처방전 입력하고 약 조제 보수하고 이런 거요. 그거 한 8년을 했는데 거기는 노조가 없으니까, 연차가 쌓여도 약국장님이 월급을 안 올려줘요. 그때 또 마침 현차 건물을 지었어요. 그렇게 처음 들어왔을 때는 일이 진짜 많았어요. 진짜 저 맨 처음에 들어와서 일단 할 줄 모르고. 진짜 밥 먹는 시간도 없이 한 5시 반에 출근해서 아침 8시 반 9시에 먹는데 밥도 억지로 먹을 때가 많았어.


일하시는 건물의 특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건물이 이제 다 유리로 돼 있어 가지고 추울 때 좀 더 춥고, 더울 때 더 덥고, 또 조금만 더러워져도 눈에 잘 띄고. 뭣보다 처음에 어떻게 설계를 했는지 모르겠는데 너무 미화원을 위한 배려가, 공간이 없어요. 우리 휴게실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건물에 있거든요. 원래는 휴게실이 여기 지하 4층에 있었어요. 근데 정화조 바로 옆에 있어서 냄새나고 막 벌레도 돌아다니니까 이제 옮겨 달라 항의를 해갖고 옮긴 지 한 3년 된 거예요. 어쨌든 그래서 평소에는, 청소하다가 잠시 좀 쉴 곳이 없는 거죠. 그래서 저기 수도관이나 열파이프관 있는데, 거기 자그마한 공간이 있어서 거기서 각자 쉬고 있고. 화장실도 여자 화장실을 막 쓸데없이 백화점처럼, 화장하는 데를 넓게 지어놨어요. 그런 거에 비해서 뭐 어디 솔직히 청소 도구 하나 놔둘 때도 없고 그래 가지고 비상구 아니면 전기실에 놔뒀었는데 또 전기실에서는 사고 난다고 빼라 하고. 그런 게 싫죠. 그게 참 아쉬워요.


힘들었던 기억 혹은 평소에 힘든 점은 어떤 것인가요?

솔직히 샤워 시설 이런 게 하나도 없으니까 이렇게 막 일하면 막 땀이 나잖아요. 그런데 솔직히 씻을 데가 하나도 없어요. 그냥 땀 나면 수건으로 닦는 정도지. 그리고 곰팡이 많이 피는 거. 지하 경우에는 곰팡이가 만약에 아침에 가서 닦으면, 저녁에 또 생겨요. 그래서 그다음 날 계속 닦는데 또 약품이 독하잖아요. 그런데 학교에서는 제습기를 올해 처음 들여놨고. 또 저희 휴게실에도, 이번에 무슨 기사가 났다 그래요. (뉴스1 기사) 그거 나가니까 그제야 하나 마련해줬죠. 그때도 이제 부장님이 오셔 가지고 부장님이 왜 자기한테 미리 얘기 안 하고 학생들한테 먼저 얘기했냐고 뭐라 하는데, 자기네들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인데. 미리 챙겼어야지.


근무하시는 동안 즐거웠던 기억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이제 우리가 청소 깨끗하게 해놨을 때 학생들이 감사하다고 인사할 때나 그럴 때 되게 뿌듯해요 항상. 학생들은 우리 청소하는지, 물론 아시긴 하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보이지 않는 데서 일하잖아요. 그래도 그렇게 알아줄 때 되게 뿌듯하고요. 또 여기 경영대 학장님이 가끔씩 명절 때 아니면 근로자의 날 이럴 때 그래도 빵이라도 한 개 갖고 오시면서 감사하다고 그럴 때나 학생들도 총학생회에서도 가끔씩 꽃 같은 거 주시잖아요. 그때도 보람을 느끼고 그래요.




이옥자 (하나과학관 / 2011년부터 근무, 68세)

어떤 계기로 고려대에서 일하시게 되셨나요?

왜 청소를 들어왔느냐 하면, 남편이 부족하니까. 나는 아들만 둘이에요 둘. 한참 먹을 애들 소시지도 사줘야 되고 밥도 사줘야 되고 그래야 하는데. 참말로 애들 진짜 돈 하나 못 주고 살았어. 내 새끼를 잘 키우고 남편 보조를 하고 살려면, 그런 돈을 벌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그래서 여기를 내가 택하게 된 이유 중에 하나는 그거예요.

근데 나 올 때 98만 원에 왔어요. 그때 망설였어. 그런데 이제 우리가 노동자들이 싸워서 올려놓은 월급이 여기야.[5] 그게 싸워서 올려놨기 때문에 지금은 사람이 많이 와. 그래서 알바가 길어지는 거예요. 옛날에는 그런 게 어딨어요. 


일하시는 건물의 특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여기는 지하 2층이 전체가 다 실험용 쥐를 키우는 데에요. 근데 쥐들 바깥 공기 쐬게 한다고 통에 넣어서 (연구실 밖에) 이만큼 쌓아놔요. 자기네는 멸균지라 그러지만, 지금 자고 일어나면 다들 간지럽다 그러고. 여기가 휴게실은 좋아도 일하는 애들이 다 다른 데로 갈라고 그래요. 또 이 휴게실 앞에 폐기물실이 있어요. 어느 날 보니 몰래 만들어놨어. 아침에 오면은 거기 가면 막 그 묘한 그 약 냄새가 나. 8시 20분이 돼야 켜요 환풍기를. 근데 그러면 우리가 6시부터 일이야. 그러니까 계속 그걸 맡고 일을 하는 거야, 그 냄새를. 


힘들었던 기억 혹은 평소에 힘든 점은 어떤 것인가요?

제가 처음에 과도관에서 1년 반을 했는데, 2개월 조금 지나니까 새빨간 거야 변기가. 대장암 걸렸는 줄 알았어. 내가 쉬지 않고 일을 한 거야. 그래서 그때는 열의만 있지 요령 피우고 그러는 걸 모르고. 그러다 여기로 옮겼는데, 옛날에서는 여기가 저 위에 장례식장 위에 있었어요. 여기가 원래는 말 안 듣는 사람 유배 보내는 덴데, 내가 전에 야쿠르트 할 때 거기가 내 구역이었거든요. 그래서 거기를 구루마를 끌고 가다 보면 산이 있고 참 좋더라고. 그래서 갔는데 쥐가 엄청 나와서 물고 가고. 그래서 고생했어요. 그러다가 여기 새로 지은 데로 왔는데, 여기가 미로 같아요. 게다가 이제 뽑기를 했는데 제일 넓은 지하 2층이 됐네. 그래서 여태하고 있어요. 


근무하시는 동안 즐거웠던 기억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내가 혼자 새벽이면 일을 하면서 편지를 써요. 무슨 편지를 쓰냐, 고대에게. 새벽에 이 글, 이거. 그래 한참 나 혼자 편지를 쓰는 거야. 나 혼자 아유 내가 감히 어떻게 저런 높은 분한테 편지를 쓰나 하지만. 물론 청소도 깨끗하게 하는 사람이 있고 더럽게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도 교수님들이나 학생들은 그걸 참아주고. 그리고 퇴직을 하자니, 훌쩍 떠나려니 마음이 너무 감사하고 아쉽고 고맙고 참아주고 이런 사람을 여기다 놔둬서 내 생활이 참. 벌어서 고기도 사 먹고 빚도 갚고 참 친구들하고 술 한 잔도 내가 치사하지 않게 얻어먹지 않고 살 수 있고 나는 그래서 정말 내가 진짜 내 평생 고대는 내 은인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요. 




김순희 · 김성임 (공학관 / 2007년부터 근무, 64세 · 2010년부터 근무, 62세)

어떤 계기로 고려대에서 일하시게 되셨나요?

김순희 저는 처음에 《교차로》를 보고 들어왔거든요, 《벼룩시장》이랑. 그때만 해도 인원이 이렇게 많지 않고 들어오기 쉬울 때였어요. 어쨌든 첫째로 대한민국에서 고대라는 명문대이기 때문에 그게 좋았고. 또 이 미화, 청소일이라는 건 내가 다른 대학에서 좀 했어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겠다, 그런 자신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소장 면접 보고 오늘 면접 보고 내일부터 일을 했어요. 여기 층에. 여기 지금 14년째 나오고 있어.

김성임 저는 원래 가정주부로 일하다가, 처음에 여기 와선 화정체육관에서 했었어요. 근데 학교가 자체적으로 하겠다 해 가지고 이제 여기 내려온 거예요. 거기는 장애인 직원들을 따로 채용한다고. 그래서 비워달라고 해 갖고.


일하시는 건물의 특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김순희 여기는 그 본교(인문·사회계)하고 달라가지고 막 공대니까 화공약품 있잖아요. 실험실에 그런 게 많이 나오고. 우리는 전자과니까 쇳덩이나 무거운 거 이런 게 많이 나와서 우리가 좀 그렇게 힘들 때는 또 이제 도움을 청하지 저기 반장한테. 그리고 가공 약품 같은 게 만약에 이렇게 나오면 그거를 좀 소홀히 하면 안 돼요. 따로 분리해야 되고. 그런 게 좀 애로사항도 있고 그런 게 특징이죠. 공대니까 아무래도. 전부 다 이제 실험실이고 이래서 그런 게 다 새벽에 나오는데 분리하기도 좀 불편하고 그래요. 그래도 일을 하는데 나한테 모든 게 만족스러울 수만은 없는 거니까. 일을 하러 가서 일을 하는 게 우리 목적이니까. (위험한 건 없나요?) 위험한 거는 위험하다고 이렇게 스티커로 붙이고 손을 못 대게 하고, 우리가 처리를 안 해요. 따로 분리해 놓으면 그 사람들이 갖고 가요. 근데 이제 그게 이제 좀 위험하긴 한 물건인데... 조심해야지. 우리 뭐 병원같이 바늘에 찔리고 이러지는 않지만 그래도.

김성임 여기가 공대니까 일단 남자들이 많아요. 여자 학생들이 좀 적고. 또… 저는 현관 1층에서 일을 하니까 좀 더 사람이 많이 왔다 갔다 하고 하니까. 겨울에는 좀 눈 올 때 또 비 올 때 힘들죠. 사실 예전에는 학교가 현관 수당을 줬었어요 따로. 그런데 이제는 아예 최저임금보다 좀 더 받는다고 없애버렸어요 그걸. 


힘들었던 기억 혹은 평소에 힘든 점은 어떤 것인가요?

김순희 동료들하고 협력해서 일을 해야 되는데 동료들하고 마음이 안 맞을 때 최고 불편해요. 일이 힘든 거는 참겠는데 동료들하고 마음에 안 맞는 게 최고로 힘들죠. 지금은 그런 게 많이 없는데 옛날에 단일노조[6]하고 그랬을 때는 동료들이 불편하고 이러면은 그게 동료 선에서 끝나야 되는데 그게 관리자 귀에 들어갈 때도 많았어요. 이간질하고 자기 잘못한 얘기는 안 하고. 그래도 이제 세월이 지나고 좀 관리직도 좀 바뀌고 이러니까 그게 많이 없어졌더라고요. 

김성임 네, 그렇게 동료 간에 좀 부딪쳤을 때 그때가 가장 안 좋았죠. 근데 뭐 지금은 교수님이라도, 학생들도 역시 뭐 다 잘해, 아주. 옛날에는 우리가 보면 확 피해갔는데 지금은 안 그렇잖아. 세상이 많이 달라져 갖고 지금은. 옛날에는 진짜 우리가 이렇게 지나갈 때 막 이런 거(청소도구) 갖고 갈 때 굉장히 이게 힘들더라고. 우리가 이런 일을 한다고 뭐 옆에 묻은 것도 아닌데 그러고 가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요즘 최근에 와서는 그런 학생들은 좀 없어요. 서로 그냥 아이고 어머니 수고하신다고 그러고 서로 인사하고.


근무하시는 동안 즐거웠던 기억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김순희 나는 개인적으로 기쁠 때는 노조 활동하면서 학생들이 도와줬을 때, 너무 눈물 나게 기뻤어요. 우리 본관에 가서 데모했을 때 그 학생들이 먼저 들어가 갖고 몸 안 아끼고, 그 관리직들하고 막 싸워가지고 우리 편 들어 갖고 그 싸움이 승리를 했을 때. 너무 쾌감이 있고, 너무 자존감이 살았고. 

또 2018년도 때 우리 건물 비우면서 코비가 들어와가지고 알바 쓸라 할 때.[7] 그때 용역이 쫙 깔렸었거든요. 그런데 위에서 학생들은 건드리지 말라고, 그런 얘기를 해 놓으니까 학생들이 한 건물에 한 사람씩 앞에 서 있으니까 정말로 못 건드리더라. 학생들이 1월 달에 추운데. 그 해 같이 추울 때가 없었어. 그때 데모하고 나는 한 달 동안 앓았어요. 몸살감기가 와 가지고. 건물마다 학생들이 그 추운데 아침에 와 가지고 지켜줘 갖고 우리가 그걸 승리를 했잖아요. 그 성취감. 우리가 뭐 복지라든가 임금이라든가 하다못해 인사관리라든가 이런 것도 노조에서 이렇게 딱 와서 이렇게 해주고 학생들이 도와주면 다 해결이 돼요 진짜.

난 딱 얘기하고 싶은 게 학생들이 도와줘서 너무 감사했다고. 눈물 나게 감사했다고. 앞으로도 물론 많이 도와주겠지만 고대는 그런 게 힘이 돼 갖고 지금까지 잘 버텼다고. 정말로 학생들한테 얘기해 주고 싶어. 그게 최고 기분이 좋고 행복했었어요.

김성임 그냥 뭐 여기 학교 와서 동료 간에 서로가 좋았으면 좋고. 또 대청소할 때 서로 간에 협력해서 열심히 해주면, 또 도움 주고 또 도움받고 그게 좋았고. 또 동료 간에 또 애경사가 있을 때 서로 왔다 갔다 하고 그런 면은 좋은 것 같아.




박도순 (교양관 / 2006년부터 근무, 70세)

어떤 계기로 고려대에서 일하시게 되셨나요?

저도 다들 그렇지만 지인 통해서 여기 들어왔어요. 다른 직장 안 다녀보고 여기 처음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리고 16년 만에 퇴직을 하네요. 그래도 고대에 들어오니까 좋네요. 정년까지 해 먹으니까. (웃음)


일하시는 건물의 특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교양관이 힘들어요 여기가. 그 학생들이 전부 다 거쳐 가잖아. 자연계든 인문계든 교양관을 안 거쳐 가는 경우가 없어. 법대 같은 데 그런 데는 좀 덜 힘든데 여기 교양관은... 장난은 아니죠. (웃음) 학생들 많이 다녀간 날은 아침에 쓰레기가요, 다섯 자루씩 나와요. 좀 큰 푸대 100L짜리, 아니야 150L는 되겠다. 우리가 4시, 늦어도 4시 40분에 올라가서 다 빼야 하는데 그런 게 네다섯 자루…. 그게 힘들긴 해도 저희들이 돈 받고 하는데, 학생들이 공부하고 그러는데 깨끗이 해줘야 돼.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힘들 때가 봄날이었어요.


힘들었던 기억 혹은 평소에 힘든 점은 어떤 것인가요?

대청소가 힘들죠 항상. 1년에 두 번씩 하는데…. 그리고 동료들하고 아무래도 좀 불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좀 보기 싫을 때가 있어. 자식도 그러잖아요 미우면 보기 싫을 때가 있잖아요. 그래도 대부분 잘 지냈으니까.


근무하시는 동안 즐거웠던 기억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교양관 좋아요. 학생들이 참 좋아. 학생들이 인사도 잘하고. 또 음료수도 빼다 주면서 수고하세요, 어머니 몇 시에 나오세요, 그래요. 그래서 우리 4시 반에 나와요, 하면은 아 그리 일찍 나와요, 그래줄 때가 참 고맙고 흐뭇해요. 그리고 힘든지 모르고 하루가. 그 인사가 해준 인사가 하루에 힘들어도 학생들에게 인사를 하니까 너무너무 고맙고 힘든 줄은 모르고. 하루 있다가 퇴근해. 그래

어쨌든 여기 와서 16년 일하는 동안 달달이 일하고 돈 받아 가니까 좋고, 동료들하고 또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는 것도 그것도 좋고. 동료들하고 불편만 없으면 참 좋은 일인데, 그래서 가기 싫어요. 어쨌든 여기 더 있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퇴직이 싫어요. 더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나이가 있어도 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어디 가나 있어요. 그런데 학교를 떠나기가 싫어요. 힘이 좀 들더라도 떠나기가 싫어요.




김옥순 (해송법학도서관 / 2004년부터 근무, 70세)

어떤 계기로 고려대에서 일하시게 되셨나요?

나는 사실 고생이라는 걸 안 해보고 여기로 왔어요. 돈을 좀 띠여가지고, 신랑이 하도 바가지를 빡빡 긁다 보니까 ‘내가 돈 벌러 나가면 될 거 아니야’하고 나갔죠. 여기를 처음으로 코를 뚫어서 일할 줄도 몰랐고. 울기도 엄청 울었지. 고생 진짜 많이 했어요 나도.

처음에는 그만둬야지 그만둬야지 했는데 병 소장이 ‘너는 여기서 일해라’ 그렇게 해준게 고맙기도 하고…. 정이 드니까 이제 재밌었지 나가기 싫고. 이제 집에서 놀라하니까 그럼 뭐하지 그런 생각도 들고….


일하시는 건물의 특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도서관은 열람실이기 때문에 아침 일찍 가서 해야 돼요. 학생들이 들어가기 시작하면은 다시 들어갈 수가 없으니까. 학생들 들어오기 전에 청소를 다 해야 되는 그런 단점이 있지만은, 아침에 조금 부지런하게 일찍 와서 부지런하게 하고 나면 오후는 그냥 바깥만 보면 되니까. 화장실이나 복도나 뭐 떨어진 거 있나 음료수 쏟은 거 없나. 그런 거만 보면 되니까. 낮에는 편한데 아침에 좀 일찍 나와 가지고. 또 이제 코로나 이후엔 우리 도서관 열람실들만 소독을 하는데, 내가 아침 청소해 놓고 나오면 들어가거든. 그러면 다음 날 아침에 오면 막 얼룩이 다 져 있는 거야. 그거 닦느라고 좀 힘들어요. 


힘들었던 기억 혹은 평소에 힘든 점은 어떤 것인가요?

처음에는 암만 집안일이라고 해도 고생을 안 해봤다가 하니까 힘들어서 울기도 많이 울었고요. 첫차를 타고 나오잖아요. 사실 집에서 그리 먼 것도 아닌데 서서 와야 하는 거, 그것도 그래서 이걸 다녀야 하는지 안 다녀야 하는지도 고민을 많이 해봤고… 그러다가 그 고비를 넘기니까 이제 차차 몇 시에 가도 되겠다 하는 게 생기니까 좀 편해졌죠. (집안일이랑 또 다르지 않나요) 그렇죠. 그냥 집에서는 이러저러 밀어붙이고 하면 되지만, 여기는 어딘가 모르게 조심스럽고, 잘한다고 해도 조심스럽고. 화장실은 그래도 똑같은 거 같지만, 또 어딘가 모르게 틀리죠. 


근무하시는 동안 즐거웠던 기억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다녀보지도 못한 대학교 문 앞을 청소하러 댕기니까, 얼마나 행복해요. 옛날에 학교도 못 다닌 사람들도 많았는데 대학교 문 앞을 댕겨보고 학생들 보니 좋지요. 하여튼 일이 힘들 때는 힘들었어도 이 고대 일 나와 가지고 행복했어요. 너무 행복했어요. 




이수덕 · 이연득 (동원글로벌리더십홀 / 2004년부터 근무, 70세)

어떤 계기로 고려대에서 일하시게 되셨나요?

이수덕 다들 생활이 어려워져서 집에서 나오게 되죠. 99년에 애들이 대학생 둘, 고등학교 3학년이 하나였는데 애들 아빠가 그때 돌아가시고, 그래서 제가 벌어야 할 형편이었어요. 그래서 파출부를 한 3, 4년 다녔어요. 그런데 그 집(파출부 나가던 집)이 이사를 가서 잠시 집에서 놀게 됐는데 마침 같은 아파트에 사시는 아줌마 한 분이 새벽 일찍 어딜 가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아줌마 어디가요’ 그러니까 고대를 간대요. 그래서 뭣하러 가냐니까 청소를 하러 간대요. 근데 청소? 초등학생, 중학생들은 다 본인들이 하잖아요. 그래서 나는 그것만 생각하고 이렇게 청소부가 있는 건 생각도 못했죠. 어쨌든 그래서 그 아줌마한테 그랬죠 ‘나 거기 취직 좀 시켜줘’하고. 그러니까 ‘너무 젊어 가지고 안 써줄 걸’ 그러더라고요. 그때는 다들 할머니여서 젊은 애들 오면 싫어했거든요. 그 아줌마도 그때 당시 68세였어요. 근데 월급이 얼마냐니까 48만원 그러더라고요. 그때 당시 내가 (파출부하면서) 130만원씩 탔는데. 그러니까 어이가 없지만 그래도 노는 것보단 낫잖아요. 그래서 갔죠. 

이연득 원래는 봉제공장에 다녔어요. 근데 이제 그 회사가 충청북도 음성으로 이사가면서 놀았어요. 애들도 있는데. 그래서 고민하던 차에 옷가게를 갔는데 거기 아줌마가 나보고 취직을 하래요. 그러면서 ‘젊은 사람이라 아침에 일찍 나가서 안 될라나’ 하더라고요. 그래도 하겠다고 전화번호를 줬더니 저녁에 전화가 와서 내일 새벽에 올 수 있냐, 그래서 갔더니 그때 막 교양관 입주할 때예요. 준공 청소도 안 했어요 그래서 청소를 처음 하는데 이게 손이 다 불어 터지고 머리가 감으면 시커먼 물이 나와. 근데 거기 언니들, 같이 하는 사람들이 하루만 하면 돈을 안 준다고 알려주대요. 그래서 하루하루 하다가 여기까지 한 거야. 거기서 9년인가 있었고, 그 다음에 서관서 하다가 지금은 동원에 있지요.


일하시는 건물의 특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연득 다 좋은데 휴게실이 너무 좁아요. 소장님도 좀 아쉬워하고. 여기 직원들도 와서 보면은 ‘아유 아줌마들 조금… 그렇다’ 그러고. 또 공기가 잘 안 통하는데 1층 계단 옆에, 너무 잘 보이는데 있어서 문도 못 열어두고. 그래도 좀 안이 덜 보이게 문 열리는 방향도 바꿨거든요. (냉난방은 잘 되나요?) 아 그건 잘 돼요. 지금도 시원해. 

이수덕 동원도 지금 코로나 때문에 그렇지 여학생 쉼터, 그거가 원래 항상 바글바글하거든요. 여학생들이 가득했는데 코로나로 인해서 못 들어오잖아요. 그래도 2층, 3층 사무직들은 그대로 출근하고. 단지 이제 여기도 맨날 뷔페식으로 점심도 식사도 하고 했는데 그런 게 지금 싹 없어졌지. (그래도 일은 좀 줄지 않으셨어요?) 일이야 많이 줄었죠. 그런데 일이 편해도 사람이 많아야 재미가 있고 그렇잖아요. 학생들이 많이 있으면 우리가 정신이 더 젊어져. 같이 학생들하고 따라 내 마음이 늙지 않아. 젊은 사람들하고 있으면. 동네에서 아줌마들이 그래요 “저이는 학교 다니면서 젊은 기를 받아서 젊어.”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아기들 손주들 있는 사람들이 훨씬 좋대. 근데 우리도 그래. 학생들 기를 받아서 참 좋아. 근데 지금은 학생들이 없으니 쓸쓸해.


근무하시는 동안 즐거웠던 기억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이수덕 봄가을에 야유회 갈 때가 제일 좋지. 단합대회 겸. 관광지도 가고…. 엄마들은 놀러갈 때가 제일 좋잖아. 요즘 코로나 때문에 한 2년 동안 못 갔지만 원래 1년에 두 번씩 꼭 가요. 또 일 끝나고 친구들끼리 모여서 밥 먹고, 술도 좋아하는 사람들이랑은 한 잔씩 먹고 놀고 재밌어. (야유회 비용은 어떻게 하시나요?) 버스 네 대로 가는데 차비는 회사에서 대주고, 먹을 거 같은 건 우리 노조에서 다 준비하죠. 철산은 또 따로 하고. 

이연득 저기 수덕씨랑 15, 6년 동안을 같이 일했어요. 교양관에서 시작해서 서관, 지금 동원까지. 이상하게 연휴가 한 며칠 있다, 그러면 서운한 거예요. 눈만 뜨면 여기 와서 같이 있었으니 거의 한 집 식구죠. 둘이 있으면 왜 그렇게 재밌는지 몰라. 밥도 그렇게 맛있게 먹는다니까. 집에서 먹는 거보다 더 맛있어요. 이제 둘이 집안 식구들 식성도 똑같아졌고. 그렇게 즐겁게 지냈네요. 


힘들었던 기억 혹은 평소에 힘든 점은 어떤 것인가요?

이수덕 처음에는 내가 일을 안 해봐 갖고, 살림만 하던 터라 제대로 하질 못했어요. 그래서 처음 일한 한 2년은 아침마다 운 거 같아요. 내가 왜 여기 와서 이 일을 해야 되나 하고…. 다른 사람들은 남편 죽고 그게 서글퍼서 우나 보다 했겠지만 솔직히 나는 애들 밥도 안 주고 여기 와서 일하는 게, 밥 때만 되면 애들이 걸린 거예요. 그러더니 이제 하루 이틀 사흘 세월이 흘러서….

그래도 이 학교로 인해서 내가 애들 다 그만큼 가르치고 키우고. 학교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살았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학교에다 고맙다 하지. 그래 학생들도 고맙고. 학생들이 있으니까 학교가 있는 거니까… 항상 나는 그래. 그래서 고대가 고맙다고. 



[1] 6월 26일 서울대 기숙사에서 50대 여성 청소노동자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고인의 생전에 기숙사 안전관리팀은 사전공지도 없이 청소노동자들에게 건물명을 영어와 한자로 쓰게 하는 등 업무와 관련 없는 필기시험을 보게 하였으며, 근무시간 중 열리는 회의의 ‘드레스코드’를 지정하는 등 모욕적인 처사를 한 것으로 밝혀져 공분을 샀다. 7월 30일 고용노동부는 이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했다.

[2] 7월 23일 부착된 해당 자보는 청소노동자들의 휴게공간에서 물이 새고 곰팡이가 생기는 문제(법학관신관), 쥐가 나오는 문제(대학원), 환기 시설이 망가져 주차장 냄새가 그대로 들어오는 문제(경영본관)를 말하고 있었다. 이에 《뉴스1》에서 8월 7일 「곰팡이 냄새 가득·쥐 출몰까지…고려대 청소노동자 휴게실 가보니」라는 보도를 하였고, 학교 측은 황급히 환기 시설과 제습기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3] 용역업체인 아이비스에스인더스트리를 가리킨다. 고려대학교는 청소 용역업체를 주로 2년에 한 번씩 바꾸고 있다.

[4] 청소노동자 안에서도 성별 분업이 이루어지는데, 남성 청소노동자는 건물 외부를 쓰는 역할을 여성 청소노동자는 건물 내부 청소를 맡아서 한다. 업무의 구분 때문에 남성 노동자들에겐 ‘반장’이라는 호칭이 주어졌으나 통상적으로 업무를 지시한다는 의미의 반장은 아니다.

[5] 2021년 고려대학교 청소노동자의 시급은 지난해에 비해 130원 오른 9,390원이다. (현 최저시급은 8,720원)

[6] 과거 고려대학교 청소노동자 노동조합은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고려대지부 한 곳이었다. 그러나 2015년 경을 기점으로 한국노총의 한국철도·사회산업노동조합 고려대지부(약칭 철산(노))가 분화되어 나와 현재는 거의 조합원의 수가 비슷한 수준이다. 다만 아직은 민주노총 측 인원이 조금 더 많아 교섭대표노조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 글에서 말해온 ‘노조’ 역시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을 의미한다.

[7] 고려대학교 당국은 2018년 1월 2일 청소노동 정년퇴직자 자리에 8시간 근무를 하는 노동자가 아닌 3시간 단기 아르바이트를 코비라는 업체를 통해 투입하였다. 이에 항의하여 한 달에 걸친 ‘노학연대’를 통한 투쟁이 이뤄졌고 결국 1월 30일 학교 당국은 결정을 취소하고 정년퇴직자의 경우에도 계속 기존 용역업체(당시 용역업체는 C&S였다)를 통해 고용하기로 합의하였다. 



참고문헌

논문 및 저널

세립 (2018.03.). 고려대: 배 한쪽에 연대와,. 고대문화 봄 131호, 8-13.


기사 및 온라인 자료

이승훈 (2021.07.30.). 고용노동부 "서울대 청소노동자 직장 내 괴롭힘 확인". YTN. Retrieved from https://www.ytn.co.kr/_ln/0103_202107301539299676

채윤태 (2021.07.07.). 청소노동자에게 “건물명 영어로 쓰라” 시험 갑질한 서울대. 한겨레. Retrieved from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02548.html


정의당 고려대학교 학생위원회 (2021.07.23.). 고려대학교의 수많은 투명인간들과 “같이 삽시다. 그리고 같이 잘 삽시다.” – 故 노회찬 의원 서거 3주기 추모 자보 –. [대자보] Retrieved from https://www.facebook.com/kuboardrecord/posts/2936643633249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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