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노동' 여는 글] 편집위원 보리
추억의 예능 프로그램 〈스펀지〉를 아는가? 방영 당시에 꾸준히 챙겨보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한 번쯤은 이 프로그램을 접해봤을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이 프로그램의 주 콘텐츠는 빈칸 문제였다. 예컨대 ‘콜라와 아이스크림을 같이 먹으면 [ ]한다.’ 같은 문제가 나오면 빈칸에 들어갈 말을 출연진이 맞추는 식이었다. 어릴 적의 나는 빈칸에 무슨 말이 들어갈지 맞혀 보려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대부분의 경우 답을 찾지 못한 채 정답이 공개되길 기다렸다. 〈스펀지〉에 관한 추억을 떠올리며 독자 여러분에게 빈칸 문제를 내본다. 콜라나 아이스크림보다는 진지한 문제지만 말이다.
노동존중 사회라면 [ ] 할 것이다.
‘노동존중 사회’는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말이다. 이 말은 현 정부가 ‘노동존중 사회 실현’을 공약으로 제시한 이후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인터넷 검색 창에 ‘노동존중’을 검색하면, 노동존중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정치인이나 노동존중이 말뿐이라며 외치는 활동가의 모습을 쉽게 접해볼 수 있다. 이렇게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가 한 정부의 공약이 되고, 사람들의 입에 줄곧 오르내리는 것은 어쩌면 그간 한국 사회에서 노동은 제대로 존중받지 못했고, 여전히 그러하다는 방증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노동존중’이란 과연 무엇일까. 혹자는 노동을 배제해온 과거를 반성하며 노동을 포용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하고,[1] 다른 누군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상대적 약자이기에 그들의 권리(행사)를 인정하는 것이라고도 한다.[2] 이렇게 말의 의미를 따지는 일은 구체적으로 의미를 규정해주어 ‘노동존중’을 공허하게 남발되는 정치적 수사로 남지 않게 할 테다.
그러나 노동존중의 의미를 따지는 문제와는 별개로, 노동존중 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노동존중 사회’는 일종의 이상 사회로서 이 사회를 경험해본 사람은 아직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사회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무가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노동이 존중받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을 바꿔나가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그곳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지는 것은 이러한 변화를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아까 던졌던 빈칸 문제를 다시 떠올려 보자. 노동존중 사회라면 어떠할지, 빈칸에 들어갈 말을 고민하며 구체적으로 그려보면 어떨까. 빈칸에 들어갈 말을 고민하는 방법 중 하나는 질문을 살짝 비틀어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노동이 존중받지 않는 사회라면 [ ] 할 것이다.’로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노동이 존중받지 않는 현실의 면면을 마주하고 현실에 맞닿아 있는 고민을 할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산업재해 문제가 사회의 관심을 받고 있다. 매년 2천여 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사회[3]에서 사람들은 산재로 희생된 이들을 기억해왔다. 지속된 노동자들의 죽음에 주목하며 산재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를 마련하고, 산재에 대한 정당한 책임을 물으려는 노력도 이어져왔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라는, 너무 당연해서 민망할 정도인 구호가 만들어졌으며 여전히 공감대를 얻고 있다. 산업재해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던 사회에서 위와 같은 종류의 구호가 생겨난 일련의 과정을 고려해 빈칸에 들어갈 말을 생각해보자. 그러면 ‘노동존중 사회에서 노동자는 일하다 죽거나 다치지 않고, 산업재해는 예방될 것’이라고 답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산업재해는 노동이 존중받지 않는 사회의 한 단면이다. 산업재해 외에도 그러한 사례가 많다.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과로와 스트레스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노동 문제이며, 노동 자체를 천시하고 노동자를 ‘못 배운 사람’로 치부하는 관념 또한 세상 어딘가 여전히 존재한다. 또한, 성별, 국적, 나이, 학력 등으로 차별받는 노동자가 있으며, 노동자임에도 노동자로 인정받지 않아 그들의 문제를 이야기할 사회적 공간 자체가 부족한 이들도 있다. 이러한 또 다른 단면들을 주목하기 시작한다면 빈칸에 들어갈 말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어떤 노동이 존중받을 필요가 있는가, 그 존중의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현실에서 찾을 수 있다. 노동존중 사회란 일종의 유토피아이지만,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길의 실마리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노동존중 사회란 어떠할지를 상기하며 이번 특집을 살펴보면 좋겠다. 그리고 특집에 담긴 여러 현실 속에서 부디 빈칸에 들어갈 말을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편집위원 보리 / supersun1999@naver.com
[1] 「노동존중사회: 21세기 한국의 노동과 사회발전」 공개 토론회. (2021.09.10). 179.
[2] 권영숙 (2020). 226.
[3] 안전보건공단. 2016~2020년 산업재해 발생현황.
참고문헌
논문
권영숙 (2020). 한국 노동권의 현실과 역사: ‘노동존중’과 노동인권에서 노동의 시민권으로. 산업노동연구, 26(1), 217-269.
온라인 자료
「노동존중사회: 21세기 한국의 노동과 사회발전」 공개 토론회 [토론회 자료집 요약본]. 2021.09.10. Retrieved from http://www.eslc.go.kr/newsletter/201805/pdf/602.pdf
안전보건공단. 2016~2020년 산업재해 발생현황. Retrieved from https://www.kosha.or.kr/kosha/data/industrialAccidentStatus.do?mode=list&&articleLimit=10&article.offset=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