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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고향

[특집 '지방' 여는 글] 편집위원 다연

3년 전, 교정에 처음 발을 내딛은 어느 추운 봄에 당신을 만났다. 문장 구석구석과 말꼬리에 묻어 있는 미묘한 억양으로 나는 당신이 꽤 먼 곳에서 왔다는 걸 알았다. 느껴지는 말투가 이유 없이 듣기 좋았던 나는 그 모든 말에 시종일관 귀를 기울였다. 성급하게 고향을 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당신의 말투 내지는 감정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서.


계절이 서너 번 지나는 동안 너와 나는 꽤 가까워졌다. 그 사이 ‘서울 사람’에 꽤 근접해진 넌 사투리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기분이라고 했다. 물론 가끔 흘릴 때도 있었다. 주문을 할 때, 발표를 할 때, 약간 흥분했을 때, 엄마와 통화할 때. 전화기를 붙잡고 한참 근황을 이야기하던 너는 한결 편한 모습이었다.


네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 마을 어른들은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했다지만, 그 개천이란 실은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였다. 힘들 때마다 독서실 창문 밖 높은 빌딩들에서 새어나오는 빛의 물결을 응시하던 내 수험생활과는 달리, 너는 조금만 걸으면 펼쳐지는 파도를 보며 마음을 달랬다고 했다. 파도가 세면 셀수록 정신이 맑아졌다는 아리송한 말도 덧붙였다.


야, 진짜 근사하다. 네 ‘고향’은 내게 너무도 근사했다. 내가 평생 느끼지 못할 감정과 떠올리지 못할 풍경들에 대한 철없는 부러움도 함께였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화면 속에서 줄곧 보았던 모습이었다. 자동차의 전조등도 빌딩들의 불빛도 없는 밤의 오롯한 장작불. 풀벌레가 우는 소리와 서툰 기타 소리. 해수욕장을 뛰어다니는 자유로운 개의 모습. 하지만 이 장면들이 정말 그곳의 전부일까. 목가적이고 평화롭기만 한 그 지방의 이미지가 우리 안에 영원히 존재할 수 있을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누군가의 고향이, 삶의 터전이, 학교와 직장이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그 사라짐은 계속해서 빨라지고 넓어진다. 너도나도 서울로 가는 탓에 지방에는 빈집이 낙엽처럼 나뒹군다지만, 그들의 소멸과 위기에 진정으로 귀 기울이는 이를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어느 신문의 1면에서도 네 고향의 소식을 찾을 수 없었으며, 그곳에서 너가 너로서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지 관심있는 사람 또한 없었다. 서울과 비서울, 수도권과 비수도권. 너무나 당연해진 이 ‘두번째 분단’은 그렇게 사람들의 무관심을 먹고 자랐다.


사람에게 장소란 실로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어떤 장소는 누군가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고이 간직한 채, 언젠가 자신에게 머물렀던 사람을 가만 바라본다. 그렇다면 소멸해가는 장소의 사람은 어디에 의지해야 할까. 그 장소에 묻어두었던 추억 내지는 꿈이 점차 줄어들다가 끝내 없어졌을 때 그들은 어디에 서 있을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이 또 한 명이 떠나고 자신조차 그곳으로부터 발걸음을 돌려야 할 때, 자꾸만 눈에 밟히는 그 빈 땅의 의미를 서울공화국은 과연 채워줄 수 있을까. 네게 묻고 싶었지만 네 머릿속에 어두운 밤바다와 부모님의 얼굴이, 무진읍의 안개와 팻말 같은 것들이 자분자분 씹힐까봐 차마 그러지 못했다.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이다.[1] (…그리고는 몇 페이지를 넘긴다…) 물리적으로 말해서 사회는 하나의 장소이기 때문에, 사람의 개념은 또한 장소의존적이다.[2]


성원들과 자주 이야기하던 책을 편다. 그리고 나조차 답을 마련하지 못한 질문을 마침내 네게 건넨다. 서울에 ‘지방’ 사람들을 위한 충분한 자리가 남아있을까. 아니. 그래도 계속 오겠지. 그럼 원래 자리에 머무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온전히 환대 받을 수 있을까. 음… 너무 어렵다. 나는 그냥 우리 동네가 계속 남아있었으면 좋겠을 뿐이야. 환대까진 아니더라도.


맞다, 나 언제 데려 갈 거야. 너네 집 가보고 싶다고. 야, 진짜 별거 없다니까. 그래도 남아있었으면 좋겠다며.

너는 ‘지방’이라는 광활한 주제 아래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 사이 우리는 더욱 늘어난 고민을 가득 안고 새 계절을 맞았다. 가을에서 겨울, 우리가 치열하게 고민하며 써내려 간 글들을 너에게 부친다. 부디 끝에 이르렀을 때 네게 무기력함만이 남아있지는 않기를 바라며.


편집위원 다연 / mandy1423@naver.com


[1] 김현아 (2015). 23.

[2] 같은 책. 53.


참고문헌

단행본

김현아 (2015).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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