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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 Oct 26. 2020

엄마야? 할머니야?

특별한 외출이나 일이 없으면 나는 평소에 화장을 거의 하지 않는다. 내가 자연 미인이라서가 아니라, 할 줄 몰라서 괜히 시작했다가 기본 점수도 깎아 먹어 후회한 날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입학하고 나서 아이를 데리러 학원에 갈 때도 집 근처라 평소처럼 화장기 없는 얼굴로 옷도 집안에서 입는 편안한 옷을 걸치고 나서는 편이다.     

아이가 좋아하는 미술학원 하원 시간에 맞춰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어떤 아이가 큰소리로 나를 가리키며 묻는다.

“누구야? 엄마야? 할머니야?”


그 순간 깜짝 놀란 나는 내 뒤를 돌아보며 혹시나 내 뒤를 따라 어떤 할머니가 들어오시는 건 아닌지 확인하는 데는 아마 0.1초도 안 걸렸을 것이고, 아이의 질문은 진심으로 나를 향해 내가 엄마인지 할머니인지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라는 걸 이해한 나는 진심으로 당황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나. 는. 엄. 마. 야”라고 또박또박 대답을 해줬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게 아이가 곧바로 수긍하며 더는 물어보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거기서 할머니처럼 보이는데 엄마가 맞느냐며 계속 따라다니면서 물었다면 난 정말 어떻게 했을까. 

정말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제까지는 외모 지상주의 관점이 아닌 단지 내 아이에게 이쁜 엄마로 보이냐 또는 못생긴 엄마냐의 구분에서 갈등했었다면, 이젠 자칫 잘못하면 못생긴 엄마도 아닌 할머니로 보일 판이니 머릿속 빨간 불이 켜졌다. 이젠 화장을 하지 않고 하나도 꾸미지 않고 집 밖을 나서면 얼핏 보면 할머니로 보일 수도 있다니 순간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예전에 십 년 동안이라고 까불고 돌아다녔던 나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정신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학원에 오시는 할머니 중에는 나는 비교도 안 되게 세련되고 이쁜 할머니도 많이 계신다. 긴장하긴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화장하는 법을 알려주는 원데이 수업도 신청하고 인터넷을 뒤져 이것저것 화장품도 샀다. 이제부터 내가 넘어서야 할 상대는 할머니라는 웃기고도 슬픈 현실 앞에서 한탄만 하고 있기에는 시간이 없다. 못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알고도 안 하는 게 부끄러운 것이라고 아이에게도 늘 말하지 않았는가. 조금씩 화사해지는 얼굴과 깔끔한 옷들을 보면서 이제라도 해서 다행이라고 혼자 거울 보며 중얼거렸다.


우리 딸은 제법 객관적인 통찰력으로 나를 절대 이쁜 엄마 범위에 넣지 않는다. 대부분 아이는 자기 엄마가 최고로 이쁘다고 한다는데, 그녀는 절대 인사말이라도 그렇게 말하는 법이 없다. 엄마라서 무작정 좋은 건 좋은 것이고 엄마의 객관적 외모는 또 다른 이야기이니까. 나는 이제부터는 이쁜 엄마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할머니로 절대 보이지 않는 엄마가 되기 위해 열심히 피부관리를 하는 중년이 되었다. 젊고 이쁜 엄마들 틈에서 자칫 할머니로 보이지 않기 위해 열심히 피부관리를 하다 보니, 내 동창들은 내 속사정도 모르고 피부 좋다고 칭찬 일색이다. 어쨌든 나에겐 고마운 꼬마 녀석의 말 한마디였다.     


한 무리의 아이들 속에서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 딸과 눈이 마주칠 때, 나는 그 순간이 미치도록 좋다.


햇살 좋은 오후, 학교 앞 건널목 앞에 딸을 기다리며 서 있다. 반대편 교문에선 이제 막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평일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은 절대 못 느껴볼 행복을 나만 느끼는 것이 너무 미안할 정도로 행복하고 기쁘다. 이제 막 수업을 마치고 학교 밖으로 후다닥 나온 아이가 자기를 기다리는 엄마를 발견하곤 세상 제일 행복하게 웃으며 큰 소리로 나를 부른다. 그래 봐야 서너 시간 만에 다시 만나는 것이지만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딸이 나를 보며 무작정 웃으며 달려와 안긴다.      


내가 할머니로 보인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상했던 날도, 전날 과식한 탓에 얼굴이 부석부석한 날도 그리고 남편과 싸워서 우울한 날도 딸은 나를 세상에서
제일 반갑고 사랑스럽게 바라봐준다.


그 고맙고 따뜻한 시선이 나의 어지럽던 마음을 순식간에 고요하고 평화롭게 만들어준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 흔히들 눈에 뭐가 씌웠다고 하는 말처럼 사랑하는 동안에는 서로가 제일 멋지고 이뻐 보인다는 사실은 체내 호르몬 변화로 생긴 것임이 과학적으로 밝혀진 것처럼, 딸과 나는 10년 동안 아직은 서로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맨날 못생긴 엄마라고 나를 놀리고 매사 부족한 실수투성이 엄마지만, 그 사람 많은 건널목에서 나만 바라보고 나를 향해 웃으며 뛰어오는 아이를 보는 순간 내 생애에 걸쳐 있던 괜한 나만의 의기소침, 삐죽거리던 미련했던 마음이 일순간 날아가며 그 순간은 세계 최대 미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자부심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눈에 하트가 드리워져 있고 아직 까지는 엄마가 최고인 딸에게 나의 최선인 절대 할머니로 보이지 않는 이쁜 엄마라는 선물을 주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운동도 하며 피부관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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