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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 Oct 12. 2020

내가 "TV 동물농장"에 소개된
그 늦은 엄마야

 초등학교 3학년인 딸이 즐겨보는 프로그램은 「TV 동물농장」이란 프로그램으로 다양한 동물들이 우리 사람들과 교감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보여준다. 우리 집의 TV 채널은 거의 동물농장을 보는 채널에 고정되어 있다. 나도 가끔 드라마도 보고 싶고 다른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딸은 TV 리모컨을 잡고 놓지 않는다.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계속해서 방송을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어느 날 남편과 딸만 캠핑을 떠난 그 밤에 홀로 남아 자유의 쾌재를 부르며 TV 채널을 마구마구 돌려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혼자서도 그 밤에 동물 동장을 보고 있었다. 혼자 남아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이런 날에도 강아지 구조하는 걸 보고 있어야 한다니’ 하면서 웃음이 나왔지만 그래도 그게 제일 익숙하고 재미있었던 기억이 있다.     


어느 일요일, 그날도 함께 온 가족이 모여 동물농장을 시청하고 있을 때였다. 평소처럼 방송 시작 부분엔 MC들의 여는 인사말이 나오는데 여자 MC가 말문을 열었다. 

“얼마 전 런던에서 재미있는 연구결과가 나왔는데, 엄마가 35세 이상인 아이들의 인지 기능을 조사해보니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인지기능이 높은 것으로 나왔습니다. 이유는 늦둥이 부모가 아이에게 화를 내거나 뭔가를 하라고 푸시하는 게 더 적은 대신, 더 많은 칭찬과 스킨십을 해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라고 하자 덩달아 옆에 있던 남자 MC가 말을 덧붙였다.

“저는 늦게 결혼해서 늦은 나이에 아빠가 되는 게 걱정이고 고민이었는데, 늦둥이 부모의 아이가 더 인지기능이 좋다고 하니 한시름 놓았습니다” 하고 이후 동물들의 여러 사연을 소개해 주었다.      

나는 은근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딸을 보며 “봤지? 지금 방송에서 말하는 아이의 인지기능에 좋은 영향을 준다는 그 늦은 엄마가 나야” 


“엄마, 인지기능이 뭐야”
“머리가 좋다는 거야, 생각을 잘할 수 있다는 말이야.”
“그럼 내가 그렇다는 거야? 엄마 고마워. 날 늦게 낳아줘서”     


다가와서 나를 꼭 껴안아 주는 딸. 너를 만나고서는 널 늦게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오히려 늘 마음 한편엔 돌이킬 수는 없지만 너를, 이렇게 좋은 너를 좀 더 일찍 만났었더라면 하는 말도 안 되는 바람과 후회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겉으로는 결혼을 늦게 한 것이 오히려 나에게 더 다행이었고 나의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는 것처럼 보였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늦게 낳아줘서 고맙다고 사랑스럽게 웃는 딸을 보면서 그동안 마음 한편에 있었던 스스로에 대한 책망, 딸에 대한 미안함 같은 것들이 한순간 바람에 싹 쓸려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래, 그래 이렇게 좋은 점도 있었구나, 내가 이렇게 인지기능에 좋은 영향을 주는 엄마였구나’ 그날 난 결혼 후 처음으로 내 마음 구석 어딘가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쪼그리고 앉아있는 조그마한 나에게 토닥토닥 위로를 건넬 수 있었다.     


정말 나이가 많은 부모는 아이에게 화를 내거나 선택을 강요하는 게 적은 대신 칭찬과 격려 그리고 스킨십을 더 많이 할까? 한다면 왜 그럴까? 대학 연구에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면 이미 많은 육아 관련 서적이나 자녀 교육서에도 내용이 나왔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는 이에 관한 책을 읽어보지 못했다. 아이가 잘 때는 엄마는 무조건 자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이를 철저히 따랐으며 더군다나 아이가 자지 않을 때도 수시로 졸거나 잠을 잤기 때문에 하루 중 나에게 시간은 늘 부족했었다.      


나는 오십 살이 넘었고 초등학교 3학년인 딸이 있다. 딸아이 또래 친구들 엄마와 비교해보면 우리 모녀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것이다. 그것만 봐도 오십 살 넘은 나는 열 살 남짓한 꼬마 아이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귀엽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흡사 할머니 마음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 싶지만, 이게 또 좀 다른 면이 있다. 할머니 같은 온화함과 너그러움에 엄마의 진한 모성애까지 더해놓으니, 아이의 존재만으로도 가끔 나의 마음은 벅차오르고 여기다 건강하기만 하면 아이는 자기 할 일은 다 한 듯 느껴질 때도 있다. 학교 입학 후에는 솔직히 가끔 아이가 너무 건강하기만 한 건 아닌가, 혼자 속상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틀린 문제보다는 정답을 맞힌 문제에 환호하고 격려를 보내는 나를 보게 된다.      


살다 보니 내 인생, 친구 인생 그리고 책이나 TV에서 읽고 배운 많은 것들이 공부만 잘한다고 꼭 좋은 것만도 아니라는 산 경험을 수도 없이 전해주었다.


그것들이 더해지고 다져진 나의 시선은 인생의 과정에 조금 더 관심을 두게 되니, 목표 지향성인 엄마들에 비하면 조금은 느슨한 마음으로 아이를 키우게 되는 것 같다.      

당장 학원 보내는 시간보다는 나랑 앉아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면서 함께 노닥거리는 햇살 가득한 오후 시간을 사랑한다. 학원 가서 받은 수업은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 잊어먹고 생각도 나진 않지만, 엄마랑 함께 웃었던 햇살 가득한 오후 창가는 어른이 되어서도 오래오래 기억나고 가끔 상처 받은 날 나를 달래주는 달콤한 사탕 같은 기억으로 남기 때문이다. 가끔은 또래와 비교 아닌 비교도 해보고 실망하는 날도 있지만 그래서 속상한 날도 있지만. 며칠이 지나면 또 여전히 아이와 함께 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아이가 인지기능이 또래보다 우수한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사랑을 받고 또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연스레 편안하고 여유 있는 사람으로 커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 또한 딸아이와 함께 살면서 아이가 나를 무조건 지지해주고 사랑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앞으로 여성으로서 노화를 느끼는 갱년기가 오더라도 이 격하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은 나를 빛나고 자랑스럽게 느끼도록 해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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