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전엔 다이어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항상 머릿속에서는 이쁜 형형색색의 펜들로 아기자기하게 꾸며보고 싶은 욕구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머릿속에서 그려질 뿐 정작 나는 단아하게 앉아 다이어리를 적는 성향의 사람이 아니다. 어느 공책이나 이면지 한 귀퉁이에 흘겨 적어서 쭉 찢어내어 주머니 속에 구겨 넣는, 그렇게 구겨 넣어진 경우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경우로 메모의 시작과 끝이 함께 연결되는 경우지만, 대부분의 나의 메모는 항상 그곳에 적혀 있거나 찢어진 상태로 어느 테이블 위에 나뒹굴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느새 나는 메모의 휴대성 역할보다는 손을 이용하여 적는 그 순간, 나의 기억 영역을 한 번 더 자극하는 용도로 메모를 사용하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거슬러 생각해보니 내가 참 옛날 사람이긴 하다. 이런 옛날 얘기들도 나는 딸에게 들려줄 수 있는 급변하는 인터넷 역사를 겪고 살아온 역사의 증인이라고나 할까, 아마 내가 삼십 대 후반이었다면 우리 딸과 나의 인터넷 역사는 거의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을 것이고 지금 같은 이러한 극적인 이야깃거리를 아이에게 들려주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지금은 스마트 폰 시대라 메모할 것을 굳이 펜으로 종이에 적기보다는 휴대전화에 바로 저장하여 사용하고는 있지만, 전자책과 종이책의 차이처럼 여전히 사람들은 스마트한 삶을 살기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여전히 다이어리에 자신의 일상을 계획하고 기록하는 복고풍의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정작 내 친구들이 한창 다이어리를 들고 다니며 사용하고 있을 때는 나는 찢어진 공책 귀퉁이나 메모지를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오십 살이 넘은 어느 날부터
나는 다이어리를 사용하고 있다.
결혼 전 미국에서 작은 규모의 클리닉에서 한의사로 근무할 때, 클리닉에 찾아온 미국인 환자는 이러저러한 갱년기 증상을 호소하며 동양의 한의학 치료가 효과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내원하였다. 침대에 편안히 누운 상태로 잠시 문진을 하는 동안, 그 환자는 자신의 현재의 여러 증상을 자신의 딸과 남편에게 보이기 부끄럽다고 그동안 참아왔던 속내를 터뜨리며 서러움에 겨운 눈물을 흘렸다. 겉으로 완벽해 보이고 싶고 자신에게는 갱년기가 무난하게 지나가고 있다고 보이기를 원하는 그녀의 바람과는 반대로 속내는 여러 상처로 곪아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심리 상담을 한 것도 아니고 그녀의 개인사를 구체적으로 들춰낸 것도 아니었고, 단지 당신에게도 딸이 있는지…. 그녀도 당신이 이렇게 잠을 못 이루는 걸 알고 있는지를 아느냐고 물었을 뿐인데 진료실 천정을 바라보며 편안하게 누운 그녀는 속에서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어쩔 줄 몰라 그녀 역시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여자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아내로서 수십 년 열심히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겪게 되는 갱년기라는 한 묶음의 시간 다발 안에서 우리는 저마다 각자 다른 신체의 변화와 마음의 변화를 겪게 된다.
당신에게 딸이 있다면, 언젠가는 그동안 내가 애지중지 소중하게 보살피고 아껴왔던 그 아이도 겪게 되는 이러한 몸과 마음의 변화에 대하여 먼저 겪는 엄마의 모든 이야기를 다이어리에 꼼꼼하게 기록해서 전해주면 어떨까 조심스레 제안했었다.
우리 딸은 먼저 겪었던 이 엄마보다는 더 많이 힘들지 않기를 그리고 힘들더라도 나의 솔직한 이야기가 따뜻한 위로를 전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이어리를 적기 시작한 그녀는 이전보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였으며 빠른 속도로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헤아릴 수 없는 그리고 예측 불허 같은 토네이도와 같은 나의 감정과 신체의 변화 속에서 휘청거리다가도 이 세상 모든 엄마는 딸을 위해서라면 이 토네이도를 겪었던 자신의 경험과 어떡해서든지 지혜롭게 헤쳐나가는 방법을 찾는 데는 주저하지 않는다.
그 경험과 방법을 전해줄 대상이 없거나 스스로에게 쓴다면 때로는 지쳐서 그렇게 열심히 찾지 않을 수 있겠지만 원동력이 딸이라면 그땐 문제가 다르다.
내가 낳은 이 소중한 아이가 겪게 될 일이라면, 우리는 아무리 두꺼운 다이어리 한 권이라도 너끈히 빡빡하게 형광펜으로 형형색색으로 바꿔가며 요약정리와 핵심 포인트를 적어둘 것이고, 마무리는 예쁘고 감각적으로 꾸며주기까지 할 것이다. 이 소중한 다이어리는 우리 딸을 위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나를 스스로 구원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중한 딸을 위해 엄마를 바로 세우는 것보다 더한 든든한 방패막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대부분의 가정에서 십 대 사춘기 아이와 갱년기를 겪고 있는 엄마의 대결 구도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갱년기 엄마와 사춘기 딸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라는 웃지 못할 질문을 했다. 결과는 대부분 우리 갱년기 엄마들의 승리라고 웃기면서도 슬픈 이야기라며 중년의 사회자가 말한다.
그 유명한 중 2병도 엄마들의 갱년기와 대결하면 깨게 할 수도 있지만, 채 유년기를 벗어나기도 전에 엄마의 갱년기와 맞닥뜨린 우리 딸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을 한편에 가지고 있다. 별것 아닌 것에도 몸이 힘들어지니 짜증이 나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급기야 소소한 짜증이 분노로 표출되기도 하며 갱년기 대표 증상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없어졌다를 반복하기도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나의 이러한 자연스러운 신체의 변화들에 비하면 나의 정신세계나 마음은 한결 가볍고 아직은 맑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열 살 꼬맹이가 바로 내 앞에서 눈부신 웃음을 웃고 내게 계속 말을 걸고 엄마가 세상 최고라며 나를 치켜세워준다.
우리 딸을 꼭 껴안고 있으면 지쳐가던 나의 몸은 급속 충전 모드로 잠시 후 다시 빵빵해진 배터리를 가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아이랑 서로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최근 TV 광고에서 자주 나오는 Ben folds의 Still Fighting it이란 노래는 아빠가 아들에게 어른이 되어가는 삶의 애환에 대해 들려주는 노랫말이다. 노래를 듣다 보면, 꼭 아빠랑 아들이 아니어도 부모라면 이 노래를 들으면서 아이가 나와 같은 어른이 될 때까지 성장해 가면서 겪을 여러 아픔에 대해 미리 미안하다고 그 많은 사랑을 담아 전하는 것처럼, 우리 딸이 같은 여성으로서 이 세상에서 성장해 가면서 겪을 많은 아픔과 슬픔에 대하여 나도 미리 미안하다고 그렇지만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내 다이어리 첫 장에 적고 싶다.
먼 훗날 우리 딸이 내 나이가 되었을 때 그때 이 다이어리를 열어보며 우리의 갱년기에 대해 그리고 같은 여성으로 사는 삶에서도 소중한 동반자로 나를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