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남매 중 첫째인 나는 태어나기는 첫째로 태어났으나, 장녀로 키워지지는
않았다.
보통 그 옛날에 태어난 다섯 남매의 장녀라고 한다면 희생과 배려의 아이콘이라고 할 정도로 푸근하고 이해심으로 충만한 맏이의 이미지가 일반적이었지만 부모님은 내가 동생들을 이끌어 가는 리더 같은 존재보다는 출렁대는 파도 같은 우리 5남매를 함께 어우르며 품어줄 수 있는 바다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키워주셨다.
맏이로서의 희생과 배려, 그리고 책임감을 내려놓는 대신 가족 내 역할 분담과 의견 조율에 있어서 합의된 의견 도출을 끌어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놓으면, 그때부터는 가족 구성원 각자가 알아서 의견 조율의 시간이 된다. 그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솔직함이었다. 가감 없이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데는 때로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동생들에게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고 이기적인 마음이 들킬까 봐 겁이 나고, 나의 말이 상처를 줄까 조심스럽고 그래서 이래저래 여러 겹으로 겹쳐진 모호하고도 두리뭉실한 의견을 낸다면, 결론이 나더라도 각자 어수선하게 의견을 표현한 덕분에 합의가 난 뒤에도 의견이 다시 분분해지고 마음이 심란해지기 일쑤였다.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은 나의 과제이며 나에 대한 상대방의 평가는 상대방의
과제이다
내가 조금 더 이성적이고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나의 이기적인 마음, 부족한 능력, 때론 나의 과한 욕심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미움받을 용기(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2014)에서 청년과 대화하는 철학자가 말하듯이,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은 나의 과제이며 나에 대한 상대방의 평가는 상대방의 과제이다. 나는 상대방의 과제에 대해 내 마음대로 잘 봐달라고 개입할 수 없지 않은가. 살면서 이렇게 남과 나의 과제를 분리해서 생각하고 나의 마음을 솔직하게 알아차리는 일만큼 소중한 자산도 없을 것이다.
나는 동생들에게 큰 언니지만 나의 부족한 능력과 이기심 같은 것들을 그때그때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다. 부족하고 솔선수범 희생하기 싫어하는 욕심 많은 언니라서 진심으로 미안할 때도 있고 그래서 솔직하게 도움을 청하는 편이다. 상대방이 나에 대한 기대치에 괜한 거품을 채워 상한가로 올려놔봤자 서로에게 피곤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편안해지기 위해서는 때론 다른 사람에게 미움받을 용기도 필요하고 당당히 나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런 나를 이해해주는 타인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도 필요한 것 같다.
당장 내 마음이 편안해야 그제야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도 생기고 옆 사람도 찬찬히 바라봐줄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게 아닐까?
마음이 천 갈래 또는 만 갈래로 갈라진 낭떠러지에 위태롭게 서 있다면 아무리 멋지고 좋은 풍경을 본들 제 발아래 걱정만 하지, 내 옆 사람이 무슨 색 옷을 입었는지 구름은 무슨 모양인지 전혀 관심조차 없을 것이다.
자주 가는 소아과에서 에서 감기로 고생하는 아이를 안고 기다리고 있는 동안 무심코 벽에 걸린 커다란 액자 속 그림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게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액자 속 커다란 얼굴들의 표정은 섬세한 묘사 없이도 그저 흔히 아이들이 사용할 법한 동그란 눈과 눈썹 그리고 웃는 입술 모양으로 표현했지만, 식탁에 둘러앉은 다섯 명의 가족 모두에게서 행복한 감정이 전해져 왔다. 그 따뜻하고 행복한 감정들이 지금 열이 나고 기침하는 아이를 안고 있는 더구나 어젯밤 잠도 설쳐서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그 순간 나에게 달콤하고 따뜻한 커피 한잔 같은 위로를 전해 주었다. 나 같은 문외한이 그 정도로 느꼈을 법하면 다른 사람은 어땠을까?
우연한 기회로 인터넷 기사에서 그 그림은 스페인의 유명한 화가 에바 알머슨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그림의 모든 주인공은 모두 아이의 표정과 마음을 지니고 아이 특유의 천진난만한 행복감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화가는 그 천진난만이라는 감정은 행복의 굉장한 힘이며,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면서 살아남기 위해 그 힘을 다 소진해 버리지만, 아이다움은 때론 약해 보이지만 감정적으로 가장 강한 무기라고 말하고 있었다.
내 마음이 어떻게 하면 편안해지는지 무엇을 얼마만큼 가지고 나서야 만족스러운지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에바 알머슨의 그림에 빠져 그녀가 그린 제주 해녀에 관한 이야기, 「내 엄마는 해녀입니다」라는 그림책을 아이와 함께 읽었다. 할머니도 해녀이고 엄마도 해녀인 어린 손녀딸은 오늘도 바다로 나간 엄마와 할머니를 기다리며 바닷가에 앉아 있는 그림에서 할머니가 엄마에게 오늘도 이렇게 말한다.
“오늘 하루도 욕심내지 말고 딱 너의 숨만큼 있다 오너라”
이 말은 산소통 없이 오직 자신의 숨만으로 바닷속에서 물질하는 해녀에게 생존의 지혜라고 하지만 비단 해녀뿐일까. 육지에서 일하는 우리에게도 매일매일 꼭 필요한 지혜인 것이다. 우리도 일상에서 욕심을 부리는 순간 물 숨을 먹고 영영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책을 덮고 있어도 이 말이 내내 귓가를 맴돈다. 예쁜 그림에 반해서 계속 책장을 넘겨보는 딸아이를 바라보며 혼자 속으로 돼 내어 본다.
‘딸아, 우리도 사는 동안 매일매일 욕심내지 말고 딱 우리의 숨만큼만 하고 살자’
이러한 나의 가치관은 오십 년이 넘게 살아오면서 많은 가감이 되었겠지만, 제일 기본이 되는 것은 우선은 나의 마음을 가장 만족스러운 상태 즉 행복한 상태로 만들어 놓고 그다음을 생각해 보기로 늘 마음을 다잡고 있다.
그 만족스러운 상태로 만들기까지는 때로는 남에게 싫은 소리도 해야 하고 또 들어야 하는 용기도 필요하고 또한 내 마음의 욕심을 터무니없이 높게 잡지 않도록 늘 경계를 해야 한다.
내 아이가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잘 어울려 살아가기를 바란다. 하지만 때때로 사는 게 마음같이 되지 않아 혼자 속상할 날들도 있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생각해야 할 것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것도 생각해야 하고, 저것도 예상해야 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를 함께 통합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너무 복잡해지고 또 결과가 마음에 안 들어 문제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도 잘 모를 때가 많다. 그렇게 너무 복잡해진 실타래를 풀고 싶은 날이면 머리를 감고 책상에 앉아 조용히 나에게 한 가지만 물어보자.
‘어쨌든 그래서 내가 행복한가?’라고. 이 질문에 내 마음의 답을 말할 수 있다면
문제는 의외로 단순하고도 빠르게 풀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