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뭉술하게 사는 지혜
“이제부터 만 나이만 쓴대.”
새해 첫날 식탁에서 내가 말했다. 아내의 부연 설명.
“그동안 만 나이, 우리 나이 따로 있었는데 앞으로는 만 나이만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거야. 새해에 다 같이 한 살 더 먹는 거 없어지고 각자 자기 생일에 한 살씩 먹는 거지.”
충실한 성인 국민으로서 정부의 방침을 세 명의 미성년 국민에게 전달했다. 다시 내가 부연 설명.
“이제 친구들하고도 나이가 달라질 수 있어. 엄마 생일이 4월, 아빠 생일이 7월이니까 세 달은 동갑이고, 7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는 아빠가 오빠야. 늘 한 살 오빠였던 거 끝.”
가만히 듣던 낀둥이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럼 내가 열네 살로 줄어드는 거야? 오늘 열여섯 됐는데…… 2년 까먹는 건가?”
“만 나이니까 그렇지. 넌 10월이 되어야 열다섯 되는 거야.”
미성년 국민에게는 친절해야 한다.
“뭐야! 힘들게 먹은 나이를 도로 빼앗다니! 아, 짜증나. 대통령 나빠.”
나이와 몸무게는 적을수록 좋은 거라 생각했던 나는 당황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나이를 축적해 온 아이들은 다르구나…….
먹고 싶은 사람이든 토해내고 싶은 사람이든 똑같이 나이 든다. 시간이 사람에게 남기는 흔적이 바로 나이인데(나무는 당연히 나이테다)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라이프 사이클에 따라 나이 묶음을 구분하자면 다음과 같다.
1.태아 2.영아 3.유아 4.소년 5.청년 6.중년 7.노년
1과 2의 구분은 출생으로, 2와 3의 구분은 첫돌 정도? 3과 4는 초등학교 입학으로 구분지을 수 있을 거다. 4와 5는 고등학교 졸업으로 나뉜다. 6과 7의 경계는 다소 애매하지만 65세 혹은 70세 정도로 여겨진다. 문제는 5와 6의 구분이다. 이벤트도 없고 연령도 애매하다. 30세부터 중년이라면 너무 이르고 40대를 청년으로 치는 것도 좀 이상하다(아무리 수명이 늘었다고 해도). 그렇다면 35세가 기점인가? 어디까지가 청춘이고 어디부터가 중년일까? 나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중년(中年)은 말 그대로 가운데 나이다. 태생적으로 어중(中)간한 나이인 것이다. 다른 시기에 비해 중년은 산술이 아니라 심리에 가깝다. 어떤 사람은 50이 되어서도 청년이라고 느끼고 어떤 이는 30 언저리에 중년 진입을 체감할 수도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광고 카피는 중년을 위한 것이 분명하다. 어차피 애매모호한 것 그놈의 숫자가 뭐라고...하는 심정이 발동하는 것이다.
죽음을 터부시하면 나이 먹는 일(aging)도 두렵다. 죽음에 가까워지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틴어 격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의 지혜를 떠올린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삶의 끝이 죽음이 아니라 매순간의 죽음이 삶일 수 있다. 삶을 적분이 아니라 미분, 즉 방향성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소진해 버린 삶의 축적이 나이가 아니라 매순간 어떤 쪽으로 흐르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의 재료로 나이를 새롭게 보면 어떨까?
나이 먹는 것을 억울해하거나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그렇다. 죽음에 근접하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억울함과 아쉬움이 여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식이면 계속 그런 상태로 살게 된다. 특히 중년에 접어들면 지나간 전성기에 대한 미련, 다가올 노년에 대한 걱정으로 생각이 복잡해진다. 그러나 그럴수록 중년의 모호성에 기대어 보는 것은 어떨까? 어중간한 시기에 날카롭게 살면 안 어울린다. 너무 정확한 것보다는 두루뭉술한 태도가 좋을 수도 있다.
남자는 더하다(여자는 잘 모르겠다). DNA에 사냥하던 습성이 남아 있어 스피드를 동경한다(남자들이 자동차와 스포츠를 좋아하는 이유다). 그런데 예전만 못하다. 빠르지도 않고 무거운 것도 잘 못 든다. 육체적 전성기는 확실히 지났다. 남은 능력과 자존심을 엉뚱하게 발휘하면 자칫 꼰대가 되기 십상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지나가 버린 청춘을 아쉬워하면서 중년을 허비할 것이 아니라 튀어나온 배를 두드리면서 스스로 나름 괜찮다고 위로하는 것은 어떨까?
그러니 여러분! 나같은 중년 남자가 혼자 씨익 웃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어중띠고 모호한 인생의 단계라 살짝 이상하게 사는구나,라고 생각해 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