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김춘수의 시 ‘꽃’이 아니어도 안다. 이름이 중요하다는 걸. 부르는 사람과 불리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기껏 두어 음절로 규정된다는 것이 놀라울 때가 있다. 관계의 단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름 말고도 친구끼리 별명, 연인끼리 애칭, 뱃속 아이에게 태명을 불러 준다. 관계가특별(하기를 기대)할수록 유일무이한 호칭을 쓰고 싶어지는 법이리라.
모든 부모가 그렇겠지만 나도 아이가 생길 때마다 태명을 지어 불렀다. 큰아이의 태명은 물꼬였다. 벼농사 짓는 논의 물길을 뜻하는 낱말이다. 어떤 일의 시작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한데 첫출발의 의미를 담아 내가 지었다. 물꼬를 튼 다음 둘째 아이는 몽실이라는 태명을 가졌다. 딸이기를 기대하면서 제 엄마가 지었는데 바람대로 되었다. 막내는 태명이 그대로 실명이 되었다(실명을 밝히고 싶지 않아 소개는 생략한다).
태어나기 전후로 아이들의 이름을 지을 때 고민과 보람이 컸다. 사주팔자나 획순 운명 같은 걸 믿지 않기 때문에 그저 부르기 좋고 뜻도 좋은 것으로 정했다. 돌림자도 사뿐히 무시했다(사실 뭔지도 모른다). 당연히 아내와 의논했고 가족들, 친구들, 직장 동료들에게 인기투표도 받아 보았다. 후보작 중에서 끝까지 고민이 되면 태아든 영아든 며칠을 불러 보기도 했다. 말하자면 시범작명인 것이다.
아이들이 크면서 이름으로만 부르는 건 아니다. 큰둥이, 낀둥이, 막둥이라는 서열 호칭과 함께 콩, 알, 탄 / 발버둥, 꼼지락, 쪼물딱 등 희귀한 별명도 쓴다. (셋을 동시에 부를 때 콩알탄을 외치면 효율적이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불린다는 것이 아이들 정서나 두뇌에도 나쁘진 않을 거라 생각한다. 가끔 자기들끼리도 오빠, 누나, 형이 아니라 어이, 꼼지락! 거기, 쪼물딱! 부르기도 한다.
내가 지은 이름 중에 가장 의미 있는 건 바로 내 이름이다. 3년 전 쯤 개명을 했다.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이랬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액운이 끼었나?
왜,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
어느 작명소에서 받은 이름이야?
사주팔자가 어떻게 바뀐대?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전 이름이 싫었던 건 아냐. 인생 절반을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으로 살았으니 나머지 반평생은 내가 지은 이름으로 살아보려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개명 사유로 납득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게 진짜 이유라고? 에이~ 사실대로 얘기해 봐.
이런 일이 반복되니 나도 슬슬 짜증이 났다. '그렇구나'로 끝나는 관심이 아니라 '설마'와 '진짜?'가 반복되는 오지랖이었다. 심지어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까짓 이유로 이름을 바꿔 번거롭게 한다는 거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름은 뭔가 심각한 사유가 있어야 바꾸는 것이었다. 나처럼 가벼운 이유는 믿을 수 없고 협조하기도 싫다는 태도였다. 그렇다고 내 입장에서는 화를 낼 수도 없다. 내 이름은 그들 입에서 나와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고 나는 혼란과 혼동을 참아 주세요, 바뀐 걸로 불러주세요, 부탁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작명이나 행정 절차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사유를 설명하는 과정이 가장 힘든 일이었다.
우리나라는 유독 익명성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름이 드러나는 걸 부끄럽거나 못마땅해한다. 성명권 침해로 소송하는 일도 다반사다. 신문과 방송에 김 아무개, 최 모씨가 많은 이유다. 심지어는 국정의 총책임이라는 대통령실 관리도 실명이 아니라 핵심관계자, 고위관계자라고 인용된다(이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정치 얘기는 각설).
서양 문화와 비교하면 그런 현상이 더 두드러진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처음 만나는 사이에도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는 것 같다. 맥도널드 매장에서 햄버거를 받으며 '땡큐 소피아', '씨유 마이클' 하지 않는가? 내가 은행 창구에서 직원의 이름표를 보고 '지혜 씨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한다면 미쳤다고 생각할지 모른다(미친 척 그렇게 해볼까 하는 충동을 가끔 느낀다).
친소관계에 따라 이름은 각별함과 비밀성을 동시에 지니는 것 같다.
조금 결이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아재개그에 관한 이전 글에서 중년 남성의 헛헛한 존재감을 얘기했다. 이름도 비슷할 수 있다. 입신양명에서 양명이란 이름을 떨친다는 뜻이다. 다리 밑에서 색소폰을 불거나 노래 연습을 하고 있는 아저씨들은 주목받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참패와 돈 낭비가 예상되어도 선거판을 못 떠나는 정치인 아저씨의 심리도 비슷하다. 구현하고 싶은 고귀한 목표와 이데올로기가 이름을 알리고 싶은 욕구보다 크다고는 말 못 할 거다.
점잔을 빼느라 혹은 소심해서 안 그런 척할 뿐이지 대다수의 중년 남자들의 심리에는 '내가 누군 줄 알아?'가 내재돼 있다. '부끄러운 줄 몰라?'로 응수하고 싶은 여러분들의 마음도 잘 안다. 알량한 이름 석자 떠벌리면서 희미해지는 존재의 끈을 아쉬워하는 모든 아저씨들을 대신해 사과하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참아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