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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리 피디 May 07. 2024

이히리기우구추의 세계

당하고 시키는 인생


우리말의 묘미 중 하나는 접사摺辭입니다. 말머리에 붙는 접두사도 있고 꼬리에 붙는 접미사도 있어요. 동사에 음절 하나만 붙여서 말 뜻을 바꿔줍니다. 뜻도 뜻이지만 어감 차이도 여기에서 나옵니다. 거칠게 말해서 서양어가 텍스트의 언어라면 우리말은 뉘앙스의 언어인데 그 비결도 접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히리기우구추는 피동(당함)과 사동(시킴)의 의미를 일으키는 접사입니다. 학생 시절, 교과별로 외워야 할 것들이 많았지만 저는 이게 재미있어서 중얼거리고 다녔어요. 수헬리베붕탄질산이나 종속강목과문계, 태정태세문단세 따위보다 훨씬 귀엽습니다.


사동과 피동의 뜻이 같은 음절의 재료에서 나오는 것도 신기합니다(우구추는 제외). 먹다, 먹이다, 먹히다처럼 다르게 붙는 경우도 있고 아예 피동 사동이 같은 도 있습니다(보이다, 얼리다, 읽히다 등). 이럴 땐 문맥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특별하고 섬세한 우리말


다 조사해 본 건 아니지만 제가 아는 몇 외국어들은 이렇지 않아요. 사동은 대부분 별도의 단어(make , let, laisser 등)로, 피동은 낱말의 연결(be+p.p, être+p.p)로 표현하죠. 물론 우리도 '~하도록' '~어지다'로 쓰기도 하지만 이히리기가 훨씬 효율적이면서 묘미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가령, 피게 하다 보다는 꽃을 피우다가 더 멋집니다. 굴리다, 삭히다, 웃기다, 울리다, 태우다, 눕히다, 붉히다, 재우다, 달구다와 같은 사동 표현이나 맺히다, 물리다, 파이다, 뽑히다, 안기다 등의 피동 표현은 과연 예쁜 우리말이구나 감탄하게 만듭니다.


시를 쓰다 보면 같거나 비슷한 음운을 찾게 되는데 이때도 이히리기우구추는 요긴합니다. 각운으로 쓰기에 좋지요. 우수성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 언어를 놓고 우열을 따지는 것만큼 한심한 일은 없어요. 특징이 다르고 그 다름에서 매력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서 이히리기우구추는 어감부터 귀여움을 맡고 있다고 할까요?^^


시키는 것과 당하는 것


어려서는 제멋대로 살고 싶어 안달했습니다. 능동적으로 살고 싶었고 피동, 수동을 싫어했죠. 자유는 동서고금의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꿈입니다. 성인이 되고 나면 대부분 그 권리를 갖게 됩니다. 능동태로 사는 거죠. 청년을 거쳐 중년에 이르면 사동의 삶을 삽니다. 애들에게 공부를 시키고 부하에게 일을 시킵니다. 몇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피동과 사동이 맞바뀌는 셈입니다.


피동이 괴롭고 사동은 즐거운 인생일까요? 당하는 쪽은 억울하고 시키는 쪽은 뿌듯하기만 할까요? 반백 가까이 살아보니 얼핏 알 듯도 합니다.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수동태, 능동태를 거쳐 사동태의 삶을 지내오면서 꿈꿨던 자유의 자리에 부담이 앉아 있다는 사실을.. 도전의 용기를 잃어버릴 공포가 덮었습니다. 자유는 얻었으나 말의 엄중함, 판단의 준엄함이 다시 언행을 옥죕니다.


어린데 사동의 삶을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선시대라면 단종이나 철종 같은 어린 임금이, 지금이라면 재벌 2,3세가 그렇습니다. 원하는 걸 시킬 수 있는 자리죠. 행불행은 주관적인 것이어서 속단하면 안 되지만 이들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다는 걸 우리는 직감합니다.


다 컸는데도 피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립심이나 자율성이 없고 대세에 따라 삽니다. 나이가 있고 학벌이 좋아도 이런 유아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윗사람을 절대선이라고 생각해 감히 고언하지 못하고 탈선의 방관자나 동반자가 되기도 합니다. 체화된 주저함이 비겁함으로 번지는 경우입니다. 


피동, 능동, 사동으로 이동하는 삶


고등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은 수동태를 ~어진다로 번역하면 혼을 내셨습니다. 우리말은 영어와 다르게 수동태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요. 가령 The window was broken이라는 문장은 누가 창문을 깼다고 해석해야 했습니다. 우리말에도 수동태가 없진 않다는 걸 알았지만 그 선생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능동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읽었거든요.


그때 우리 학교 건물 벽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雄飛(웅비)하라 世界(세계)가 부른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어요. 진취성을 구호와 몽둥이로 강요하고 억압으로 성공을 종용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수동태가 아니면 반항으로 여긴 어른들이 사동을 배려로 여기며 가르치려 들었죠.  너희들 잘 되라고 시키는 거야.


지금 시대의 이히리기우구추를 생각해 봅니다. 시키고 당하는 주객체에서 사람이 소외됐습니다. 시류만 있는 듯합니다. 그 물결은 당연히 돈이라는 단 하나의 바다로만 흐릅니다. 아이들을 일찍 깨워 입히고 차에 태워 학교 학원 등지에 돌리고 귀가시켜 씻기고 벗긴 후 늦게 재웁니다. 이 사동은 부모가 아니라 시류가 시킵니다. 여기서 부모는 피동입니다.


엊그제가 어린이날이었어요. 아이답다라는 형용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더불어 어른다움도 가늠해 봅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당하든 시키든 이히리기우구추처럼 예쁘게 살면 좋겠습니다. 당당하게 능동태로, 가끔은 기쁜 마음으로 당하고, 시키면서도 서로 즐거우면 좋겠습니다.


P.S 표지사진은 누나인 연두의 책입니다. 어린이를 다시 생각하고 싶으면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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