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영하는 수필집 '여행의 이유'에서 이렇게 말한다. 호텔의 정돈된 리넨냄새와 촉감을 마주하는 순간이 여행의 기쁨이라고... 물론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목적지를 선호하는지, 어떤 포인트에서 감동을 느끼는지, 어떤 경우에 짜증이 솟구치는지 제각각일 거다. 그런데도 유행과 추이라는 건 있어서 요새는 SNS에 올려 주목받을 수 있는 사진을 남기는 것이 대세 아닌가 싶다(자랑과 관음은 우리 시대의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물결이다).
여행은 크게 감각 여행과 생각 여행으로 나눌 수 있다. MBTI 성격 유형의 S와 N의 차이와 비슷하다. 감각 여행의 대표선수는 시각(sightseeing)과 미각(tasting)이다. 유서 깊은 재즈바에 가거나 좋아하는 뮤지컬, 콘서트를 찾는다면 청각 여행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보고 먹고 듣는 것을 포함한 오감은 여행의 기본이다.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사조인 낯설게하기(make strange) 이론은 여행에도 유효하다. 낯선 곳에서 느껴지는 낯선 감각은 루틴을 깨고 감흥을 주는 법.
그런데 생각 여행은좀 다르다. 느끼는 여행이 아니라 깨닫는 쪽이다. 감각기관을 통해 얻은 정보를 두뇌 깊은 곳까지 데리고 가 재가공한다. 학습이나자기반성은 물론 통찰과 혜안까지도 노린다. 성지순례나 수학여행이 그렇다. 휴양이 주목적이라면 생각은 줄이고 감각에 온몸을 맡기는 것이 좋다. 생각여행이라면 전두엽까지 가동해야 하므로 더 피곤하겠지만 남는 게 크다. 어떤쪽이든 다시 돌아왔을 때 살아갈 힘을 채우는 과정이리라.
지금 공항버스 안에서 나도 내 여행의 역사와 취향을 돌아보려고 한다. 스물다섯에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첫 여행지는 호주. 서호주의 주도인 퍼스에서 1년 남짓 생활하다가 동부에서 가족들을 만나 시드니, 멜버른 등을 여행했다. 보름 동안의 여행 끝에 가족은 귀국시키고 나는 태국으로 갔다. 호주에서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았기 때문에 학비와 생활비를 대고도 여행 경비가 꽤 남았다. 퍼스에서 만난 선배와 방콕과 푸껫, 피피섬을 돌았다. 다시 방콕으로 돌아온 뒤 인도 캘커타로 갔다(추억하고 싶지 않은 고생이었다). 우리는 죽을 것 같은 더위를 피해 고산지대로 향했다. 인도 실리구리, 네팔 카트만두와 포카라를 거쳐 안나푸르나봉 근처에이르렀다. 히말라야 산마을에 며칠 고립되기도 했다(고등학교 지리부도 한 권만 들고 다녔는데 여행정보가 없으니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엉뚱한 우기에 가는 바람에 그 멋진 설봉 한번 못 보고 산거머리에게 헌혈만 잔뜩 하고 내려왔다).
직장을 다니며 해외연수와 출장을몇 군데 다녔다. 미국 서부, 중국 장가계, 튀르키예와 그리스 이집트,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일본 등이었다. 신혼여행은 뉴질랜드 남섬을 캠핑카로 다녔다. 아이들이 큰 뒤에는 베트남 다낭과 괌을 다녀오기도 했다. 적지 않은 여행 횟수였는데 지금 돌아보니 남는 기억의 양은 찍은 사진이 아니라 경험의 적극성에 비례하는 것 같다. 누가 데리고 가줘서 따라간 여행은 가물가물, 직접 설계해서 계획대로 무난히 치른 여행이 중간, 자유가 분방을 떨어 기대치 않았던 행운이나 엉뚱한 해프닝이 생긴 여행이 뇌리에 많이 남는다.
또 한 가지 깨닫게 된 점은 내가 절경에 감탄하지 못한다는 거다. 대표적으로 그랜드캐년과 장가계인데 남들이 와와 거리며 사진 찍는 동안 나는 무감한 채로 그냥 서있었다. 자연보다는 현지인들이 내 호기심을 산다.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떤 역사와 문화가 있는지, 말과 글은 어떤지, 상처와 일상은 어떻게 동거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런 호기심이 채워지는 여행이 내게는 최고의 여행이었다.
여행에서의 감동은 때로 사소한 것에서 온다. 비행기 옆좌석 아저씨의 유쾌함이나 우연히 도움 받은 현지인의 친절, 벼룩시장에서 만난 가성비 좋은 물건, 게스트하우스에서 듣게 된 기타 연주 따위. 그런 소소한 우연들이 주는 기쁨이 어쩌면 여행의 진면목인지도 모른다.그런 기대감에서 생각이든 감각이든 열어놓고 이륙한다. 예정보다 1시간 늦게 프랑크푸르트로 향한다. 구텐 타크! 돈 내고 사는 설렘, 발품을 팔아 얻는 감동, 여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