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팅힐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영화 때문에 오게 됐지만 이런 마을이 좋다. 아기자기하고 정겹다. she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윌리엄이 살던 파란 대문집과 그의 서점도 들렀다. 여전히 책을 팔고 있다. 인형도 팔길래 딸에게 주려고 하나 샀다(파리에서 그애 곰을 잃어버려 혼나던 참이다). 계산을 하면서 준비한 농담을 던졌다.
"오늘 휴 그랜트는 일 안 하나 봐요."
"네"
"줄리아는요?"
"없어요."
젊은 여자 직원이 쳐다도 안 보고 영수증을 내준다. 으이구, 런던 인간 아니랄까 봐! 질리게 듣는 농담이겠지만 이렇게 답해주면 안 되나?
"오늘 쉬는 날이에요. 촬영 갔거든요."
로맨틱 코미디의 동네인데 로맨스도, 웃음도 없다. 그래, 영화는 영화일 뿐이지.
윌리엄(휴 그랜트)가 운영하던 서점이다. 토끼 인형을 샀다
영화 얘기가 나왔으니 잡설 한 곡절. 프랑스 영화는 대체로 어둡고 심각하다. 반면 영미 영화는 밝고 가벼우며 해피엔딩이다. 영화라면 모름지기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고 프랑스인들은 생각한다. 영어권에서는 영화가 현실에서 누리지 못하는 카타르시스를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어제 본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 나오는 내용이다. 재미있는 것은 현실에서는 반대로 산다는 점이다. 프랑스인들이 가볍고 밝게 사는 반면, 영국인들은 어둡고 심각하다. 역시 영화는 영화일 뿐.
그러고 보니 영국 코미디 영화가 다 그러네. 러브 액츄얼리, 노팅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어바웃 타임 등등. 어둡고 무겁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가볍고 밝은 영화가 필요한 모양이다.
오늘은 날이 맑다. 휴 그랜트가 평범한 삶을 살았던 거리다
노팅힐에 오기 전에 박물관에 갔다. 숙소에서 멀지 않아 걸어갔다. 대기는 길지 않았다. 15분 정도 기다리니까 입장시켜 준다. 앞에 대기 중이던 뭄바이 출신 인도인 부부와 살짝 대화를 했다. 아저씨는 에스오일에서 일한단다(인도에서 가장 큰 정유사란다). 영화 얘기(역시나 기생충 vs 세 얼간이)와 소싯적 콜카타에서의 내 개고생담을 나눴다.
박물관에는 4시간 정도 있었는데 총평하자면 이렇다. 전 세계, 전시대를 다 갖겠다는 야욕의 수집물이다. 회화 작품도 많은 루브르에 비해 영국 박물관은 유물 위주다. 지역별, 시간별로 분류해 놓았다. 5천 년 전 미라부터 현대의 생활상까지 총망라했다.
로제타 스톤이다. 언어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여기에서만 30분 넘게 서 있었다. 나폴레옹 군이 이집트 원정 가서 발견했다가 영국에게 빼앗겼다
한국관도 있었다. 애국심인지 우국심인지에 이끌려 가보았는데(가장 외진 구석에 있다) 부실했다. 신라 불상, 고려청자, 조선 병풍 들이 구색 맞추기에 쓰이고 있다. 한옥을 재현해 놓은 공간도 보였는데 그다지 임팩트는 없다. 복잡한 생각이 든다. 여기에 우리 유물들이 많았다면 뿌듯했을까? 이들이 빼앗아 오고 사들인 우리 것들이 많아야 흡족할까? 모르겠다. 다른 지역에 비해 문화적으로 빈약하고 초라한 결과 같아 씁쓸하기도 하고 영국에게 많이 안 빼앗겨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 정말 잘 모르겠다.
해설사가 신석기 시대의 유물을 가지고 설명도 해준다
얼마나 유물이 많으면 만지게도 해준다. 복제품이 아니다. 운이 좋아 해설사 설명을 듣게 됐는데 간석기의 용도와 당시의 생활상을 들려줬다. 아이든 어른이든 질문을 받아 설명한다. 또 부럽다. 돈 받는 루브르와는 달리 여긴 무료다. 더 양심적이라고 해야 하나? 조상들이 전 세계에서 약탈해 왔으니 돈은 안 받는 건가? 그럼 뭐 하나. 물가가 살인적인데.. 이걸 보러 와서 돈 쓰게 하는 미끼 상품인지도 모른다.
어바웃 타임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의 조언을 들은 주인공이 하루를 한번 더 산다. 전날은 무미건조하고 그저그런 날인데 다시 사는 하루는 풍성하고 충만한 하루다. 우리는 영화에서처럼 시간여행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사진첩을 보고 박물관에 가는지도 모른다. 개인이든 나라든 인류든 역사는 시간을 되돌리지 못하는 인간의 고육지책이다. 해리포터가 마법을 부리고 노팅힐에서 평범함이 특별함이 되고 비틀즈가 역사를 썼던 도시. 러브액츄얼리처럼 각자의 사랑이 이루어지고(하지만 현실은 우울하다), 오만하기도 하고 편견도 있는 거 같은, 결혼식은 네 번 장례식은 한 번만 치를 것 같은 이 까칠한 도시에서 나는 삶과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불가역적이어서 더 소중하다. 내세를 믿는 안 믿는 현생에 충실하자.
바다코리끼 이빨로 만든 천년 된 체스 말이다. 해리포터에도 나온다. 저걸로 장기 한판 두고 싶다
이제 숙소로 돌아간다. 비틀스의 애비 로드는 결국 못 가는구나. 존과 폴, 링고와 조지에게 미안하다. 대신 오늘 밤엔 여러분들 음악을 들으며 잘게요. 꿀나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