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 안 식당에서 피쉬 앤 칩스를 씹고있스.독방을 쓰는데도 새벽에 깨 뒤척였다. 여파가 하루종일 힘들게 했다. 타워 브릿지를 끝으로 4시쯤 들어와 낮잠을 잤다. 저녁 배꼽이 울려 내려와 시켰는데 기대보다 맛있다. TV에서는 레알마드리드와 첼시의 유럽 챔스리그 경기를 중계하고 있다. RMA 벤제마가 한골 넣어 1:0, 지금은 쉬는 시간이다. 유럽에 온다니까 축구 경기를 보고 오라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파리에서 음바페와 메시를, 런던에서 손흥민을 보면 좋겠다는 거다. 그렇긴 하지만 사람마다 취향은 다르다고요. 그래도 밥 먹으면서 축구 중계를 보고 있노라니 그렇게 권한 사람들의 대리만족을 시켜주는 것 같아약간의보람을 느낀다.
피쉬가 빅피쉬고 칩스는 매니 칩스다. 하여간 유럽은 비싸게 받고 배불리 먹여준다
대화라는 걸 한 지 이틀이 되어간다. 유로스타에서 모건 프리먼 아저씨가 마지막이었다. 얼마예요, 어디서 사요, 화장실 어디예요, 어디로 가요 따위는 제외하고 말이다. 파리에서는 좀처럼 느끼지 못한 쓸쓸함이다. 변덕스러운 날씨 탓인가, 룸메이트 없는 독방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런던의 복수인가.. 식당 옆자리나 대기 이웃에게 말 거는 일도 없다. 여기서는 나한테 사진 찍어달라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찍어주기만 하고 말은 안 섞게 된다. 엄두가 나지 않는다. 런던의 도도함은 왠지 나를 주눅들게 한다. 뭐든 말해봐 들어는 줄게의 파리와는 다르다. All by myself를 처량하게 부르는 브리짓 존스가 된 느낌이다. 돌아온 가방이 윌슨이라고 해서 톰 행크스처럼 저 녀석과 대화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아무리 심심하다 해도... 톰도 몇 달은 지나야 윌슨에게 말을 하던데 난 겨우 이틀...
숙소 곳곳에 놀고 마시라는 안내가 붙어있다. 포모에게 안녕을 고하라는 꾀임이다
포모증후군이란 게 있다. Fomo-fear of missing out의 줄임말인데 잊혀질 공포란 뜻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살 수 있다. 그 깊이와 넓이, 방식은 제각기 다르겠지만 말이다. 지난 몇 편의 글에서 SNS 집착을 부정적으로 말했는데 사과하고 싶다. 어찌 보면 이 브런치도 소셜 네트워크 아닌가. 나중의 내가 여행을 기억하기 위한 기록이라지만 일기장이 아닌 이상 이 글도 포모증후군이 아니면 쓰지 않았을 거다.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고 싶은 게 모두의 바람이다.
글쎄. 영국이 여행객에게 정을 주지 않는 것에도 이유는 있을 거다. 난 언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어는 영국에서 시작됐지만 미국이란 확성기를 통해 전세계의 언어가 됐다. 어떤 영국인도 외국인이 다가와 말을 붙이면 "어라, 저 녀석 기특하게도 우리말을 하네"라며 국뽕을 느끼지 않는다. 프랑스는 꽤 있다. 기특함, 노력함, 답답함의 3단계로 이어지곤 하지만(이전 편 참고)... 우리는 훨씬 더할 거다. 코쟁이가 아뇽하심미까, 전는 이탈리아에서 왔슴미다, 부딱 잘 드림미까..라고 더듬거리면 귀엽지 않나? 많은 TV 프로그램에 외국인들이 나오는 이유가 그거다. 오, 조나단 나보다 조선 역사를 더 많이 아네! 국위선양하는 한국인에 열광하는 매커니즘도 비슷한데 손흥민, BTS, 삼성을 칭찬하는 외신을 보면 뿌듯하다(근데 정작 외국인들은 삼성, 현대차가 한국 거였어?한다. 국적에 관심이 없는 거다). 외국인이 우리를 알려고 하고 외국인이 우리를 높이 평가하는 모습에 우리는 우쭐해진다. 내가 골을 넣거나 그래미를 수상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한 마디로 한국은 국뽕에 취약한 나라이고 영국은 그 반대다.
영국 프리미어리그 팀에 속한 선수들의 국적을 보면 그들의 개방성을 알 수 있다. 11명 중 국적이 예닐곱 개다. 잉글랜드 국적은 두어 명. 자국 리그지만 외국인들의 일터이자 놀이터다. 한화 이글스에 두어 명 빼고 모두 외국인 선수라면 응원하겠는가. 글쎄다. 영어도 비슷하다. 이미 충분히 개방되어 자기네 거라 느끼지 않는 셈이다. 적의까진 아니어도 이방인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불란서에서는 봉주르 사빠 한 마디에도 왠지 칭찬, 접대, 환영을 받은 것 같은데 여긴 그렇지 않다.
맥도날드 키오스키가 주문을 하려면 앱을 까세요 하길래 빈정 상해서 까세요 라고 되뇌면서 나왔는데 오호! 근처에 분식집이 있었다.
아까 점심에 국립 미술관을 나와 우연히 발견한 한국 분식집 이름은 분식이었다(기르던 개 이름이 개였던 언어학 교수님이 생각난다). 열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 K팝 노래를 크게 틀어놨다. 소녀시대와 엑소, 손담비가 차례로 손님을 맞았다(사실 10년쯤은 묵은 노래들이었다). 역시 파는 사람 먹는 사람 통틀어 한국인은 나 뿐이었는데 나 빼고는 모두 고개를 까딱거리거나 어깨를 들썩이면서 노래에 흥을 표했다. 식당인지 클럽인지. 나는 라면과 떡볶이를 시켜 먹었다(PPL 아님. 내돈내산. PPL이 되게 분식집 사장님 연락을 하시던가). 한국에서 먹던 맛과 똑같았다. 역시 궂은 날씨엔 분식이 최고지.
외국에 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우(憂)국자가 된다. 집 나가면 집 걱정이고 나라 떠나면 나라 걱정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애국심이 눈곱 정도인 나도 강릉 산불, 심각한 미세먼지, 한심한 국내정치를 걱정하고 앉았다. 크게 도움도 안 되면서 말이지. 포모증후군과 국뽕의 합작품일 것이다. 한국에, 대전에, 내 일터에, 내 가족에게 미련이 없다면 여행이 아니라 이민을 왔겠지. 잊고 싶지 않고 잊혀지기 싫어서 생각하고 연락하고 뉴스도 보고 또 이 글도 쓰고 있는 것이다.
타워 브릿지를 걸어서 지나갔다가 시내 버스 타고 돌아왔다. 다리가 falling down 하기 전에 내가 손시려워 다운되게 생겼다
오빠 만세 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늘은 버킹엄 궁전 근위병 교대식과 국립 미술관, 타워 브릿지에 다녀왔다. 여행의 감동은 적극성과 자발성에 비례한다는 지난 번의 말처럼 솔직히 그저그랬다. 특히 근위병은 왕도 아니고 왕을 지키는(지키기는 하나 모르겠다. 저 모자를 쓰고 쇼하느라) 사람들의 근무 교대를 인파에 치여서 꼭 봐야 되나 싶었다. 미술관에서 고흐와 피카소의 작품을 볼 때는 잠시 행복했다. 이제 보니 야외에서 힘들고 실내에서 행복했구나. 영국 날씨 비위 맞추는 거 이제 포기. 시간이 남아(파리에선 없던!) 낮잠도 자고 넷플릭스도 봤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 시리즈다. 현 소개팅녀 앞에서 전여친을! 암튼 파리 시내를 새록새록 떠올리며 재미지게 보고 있다. 영어와 불어의 동음이의 때문에 벌어지는 해프닝이라든가, 문화적 차이로 옥신각신하는 모습이 재미있다.
파리보다 말은 더 잘 통하는데 왠지 말걸기가 어려운 도시, 런던
현소개팅녀인 런던에 미안해서 노팅힐도 다시 봤다. 내일 갈 거다. 휴 그랜트가 책을 팔까? 평범한 내게 쥴리아 로버츠처럼 어떤 유명한 영국 배우가 짠 하고 나타나 줄까? 미스터 빈이 앙증맞은 자동차를 주차하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다. 어바웃 타임의 레이첼 맥아덤스 같은 미인을 만난다거나.. 기대는 감동의 어머니다. 실망의 계모이기도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