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굳은 젤리는 없다
순영은 76번째 생일을 맞았다. 보라색과 하늘색이 섞인 작은 꽃들이 수놓아진 식탁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케이크를 올려두고 초를 킬 지 말지 잠시 고민했다. 초코 생크림에 블루베리가 올라간 케이크가 예뻐서 먹기 전에는 망가뜨리기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부엌에 있는 초코파이를 하나 가져온 다음 초코파이에 초를 꽂고 불을 붙인 후 눈을 감고 소원을 생각했다. 결혼을 하지 않았고 그녀의 부모는 이제 없기에 건강을 기도할 가족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옆 집 강아지를 위해 기도했다. 강아지의 주인을 위해 기도 할 수도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후- 하고 가볍게 초를 불고 그녀는 숟가락으로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포크보다는 숟가락으로 케이크를 먹는 것이 더 좋았다. 케이크는 조각케이크보다는 컸지만 작았기 때문에 순영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며 금세 케이크를 다 먹어버렸다. 틀어둔 낡은 선풍기가 회전하다 덜컥 덜컥 소리를 내면서 멈추었다. 순영은 멈춰버린 누런 선풍기를 베란다로 치우고 소파에 누웠다. 고장 난 선풍기처럼 자신의 몸도 여기저기 고장 나고 있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순영은 천장을 바라보며 엄마를 떠올렸다. 순영의 엄마는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순영은 자신도 엄마처럼 심장마비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늘 죽음이 꽤 멀리 있다고 느껴왔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랬던 것이 케이크를 고르러 가는 발걸음은 느렸지만 마음은 말랑한 젤리처럼 가볍고 달콤했다. 곁에서 축하해 줄 사람도 없었지만 그녀는 늘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렇게 그 나이를 가지게 됐던 세월 동안 때로는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시를 보면서 외로움을 쓸어 담듯 모아 잘 정리하고는 했다. 그리고 자신이 죽고 난 후 더러워질 집을 치울 사람에 대한 걱정을 했다. 구겨져 흐물거리는 종이 같은 자신의 팔과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티브이를 끄고 양치를 한 후 그녀는 침대가 아닌 소파에 누웠다. 친구의 아들 며느리가 보내준 얇은 보라색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조용해진 집 안에 장맛비 소리가 들렸다. 오른쪽으로 누운 후 식탁을 보니 정리하지 않은 케이크 박스와 숟가락이 보였다. 그때 문득 엄마의 잔소리가 생각났다. 그녀의 엄마는 늘 바로바로 치우라는 잔소리를 하곤 했다. 순영은 속으로 '엄마가 저 걸 봤으면 또 한 소리를 했겠지' 하고 생각하며 웃었다. 그렇게 엄마 생각을 조금 더 하다가 잠에 들었다. 순영은 새벽 내내 꿈을 꾸었다. 마트에서 보던 지렁이 모양의 젤리가 그녀의 집 안에서 둥둥 떠다니는 꿈이었다. 순영도 젤리처럼 지렁이 젤리들과 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포도사탕 향과 레몬향이 가득 퍼지는 꿈이었다. 순영은 말랑한 젤리들을 만지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자신의 팔을 눌러보았다. 종이 같던 자신의 팔이 젤리처럼 탱탱하고 말랑했다. 혹시나 싶어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그냥 살냄새가 났다. 젤리로 변한 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순영은 한참 동안 젤리들과 떠다니다 늦은 점심쯤 잠에서 깼다. 꿈에서 깬 순영은 일어나자마자 팔을 만져보았다. 딱딱하고 수분기 없는 감촉이었다. 순영은 소파 위에 이불을 두 번 정도 접어 올려둔 후 어제 치우지 않은 식탁을 정리했다. 마트에 가서 지렁이 젤리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