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는 차가 두 대 있다. 하나는 흰둥이, 다른 하나는 검둥이. 엄마가 부르기 시작한 이름을 우리 모두 따라 부른다. 엄마와 같이 산책을 하다 만난 배롱나무는 배롱이, 페르시안 길고양이는 귀족냐옹이, 마당의 남천나무는 남천이. 이렇게 엄마는 큰 고민 없이 이름을 지어낸다. 엄마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더 다정하고 친근하다. 이름 모를 객체로 넘쳐나는 내 세상과 달리 엄마의 세상은 주변과 연결되어 있다.
엄마 없이 혼자 산책을 하는 오늘 아침, 배롱나무를 마주하고 엄마 생각이 났다. 배롱이와 남천이, 귀족냐옹이가 있는 세상을 살아가는 엄마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혼자의 세상에 사는 나는 가끔 엄마의 세상이 어떨까 생각한다. 카페에 오는 손님1을 "콧수염 총각"이라고 곧바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그녀의 세상은 얼마나 더 밝고 풍성할까. 그녀는 그가 다음 번에 또 왔을 때 단번에 기억하리라. 콧수염총각은 이미 그녀의 세상에서 의미가 있어졌을테니까.
내 세상은 나와 상관 있는 사람만 뚜렷한 컬러다. 무심하게 시작하던 출근길에서 기억나는 것은 지하철 환승하는 길과 빠른하차 승강장 번호 뿐, 이외의 것은 모두 회색이다. 아파트 입구의 매실나무의 매실이 어떻게 익어갔던 지,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 은행잎의 색깔이 어떻게 변했는 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셀토스와 제네시스가 아니라 흰둥이 검둥이. 이름이 붙는 순간 우리의 세상에서 셀토스와 제네시스가 뚜렷한 화질의 컬러사진처럼 변한다. 김춘수 시인의 "이름"처럼. 흰둥이는 도로의 수 많은 똑같은 셀토스에서 가볍고 날렵한 우리집의 아이가 되고, 검둥이는 묵직하고 듬직한 조력자로 자리잡는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우리집앞 은행나무잎이 얼마나 커졌는 지 봐야겠다. 오늘 내 세상의 한 구석이 조금 더 밝아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