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살이의 시작
아이고 정신 없어라,
하와이로 떠나기 일주일 전. 설레는 마음은 둘 째치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강아지 똥책만 겨우 하고 남는 시간에 잠을 자기에도 부족했다. 겨우 정리하고 강아지를 맡기러 부산에 내려갔다. 강아지가 잘 지내는 지 확인도 할 겸 며칠을 보내고 올라왔다. 강아지 거처를 정하고 적응도 조금 시켰으니 그래도 큰 숙제는 끝냈다. 이제 내 거처를 옮기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주말에 부산에서 올라와서 출발하는 수요일까지 죽어라 일을 하고 잠을 쪼개가며 짐을 쌌다. 수요일이 될 때까지 한 발짝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데 그것을 공항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깨달았다.
출발하는 날, 그래도 늦지 않게 공항버스를 탔으니 다행이다. 하와이에서 2주는 친구와 온전한 휴가를, 나머지 2주는 재택근무를 하며 보낼 것이다. 배낭에 짊어진 노트북과 휴대용 모니터가 꽤나 무겁다. 공항에 도착해서도 카페에 앉아 못다 한 일을 마무리하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동안 누적된 피로가 긴장이 풀리며 쏟아졌다. 영화를 보며 꼬박꼬박 졸다 보니 어느새 하와이에 도착했다. 교환학생 시절 이후 무려 십 년 만이다. 다음 하와이에 갈 때는 운전에 능숙하고 여유로운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운전은 못하고 어른도 되지 못한 채 나이만 먹었다. 나만 그대로인 줄 알았는데 하와이도 그대로다. 파삭하게 화창한 날씨, 낮게 깔린 뭉게구름, 바람에 주체 없이 흔들리는 야자수들. 공항의 거북이무늬 의자까지.
기나 긴 입국대기줄에서 멍 때리고 있을 무렵, 내 앞의 할머니가 초초한 얼굴로 말을 건다. 어쩌다 보니 일행들과 떨어져 혼자만 줄에 있었던 그녀는 연신 불안한 모양이었다. 집문서처럼 손에 쥔 파일에는 누군가가 정성스레 적어준 호텔 주소와 자기소개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그녀는 귀에 익은 부산 사투리로 사연을 얘기했다. 그녀의 얘기를 듣는 내내 우리 외할머니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리가 아픈 것도, 남매들과 어렵게 살아온 것도, 이제야 자식들이 호강시켜 주는 것들도 우리 집 같았다. 그녀의 입국심사대에 함께 동행해서 무사히 심사를 통과해 남매를 찾아가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 할머니는 이제 다리가 너무 아파서 해외여행은 생각지도 못하는데, 우리 할머니의 조금 더 젊은 시절을 그려 보았다. 내가 더 아이일 시절에 그녀가 더 여유로웠다면 더 좋았겠다 싶다. 내심 우리 할머니가 여행을 많이 못 한 것이 아쉬웠다.
입국장을 빠져나와 짐을 찾으러 내려가는 길, 에스컬레이터 아래쪽 멀리에서 나를 보고 웃는 얼굴을 알아보았다. 목이 빠지게 나를 기다리고 있던 워니였다. 그녀는 부산에서 나는 서울에서 출발하는 다른 비행기를 타고 왔다. 와이파이도 잘 터지지 않아 어떻게 찾을까 했는데 이렇게 쉽게도 찾아졌다. 워니는 나를 참 잘 찾는다. 저 멀리서도 나를 한 번에 찾은 워니 덕에 문제없이 공항을 빠져나왔다. 고가도로와 택시들로 복작한 공항. 그럼에도 저 뒤로 보이는 새파랗고 뭉게구름 진 하늘이 누가 뭐래도 하와이였다.
양손 가득 캐리어를 끌고서 날씨가 너무 좋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벌써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호들갑을 떠는 이 맛에 함께 왔지. 혼자서는 도저히 이 맛이 나지 않는다. 조금 무리해서라도 워니와 날짜를 맞추기를 참 잘했다 싶었다. 이번 하와이 살이가 너무 기대된다. 여행과 일상의 중간 어디에 머무를 나의 한 달. 그 후의 나는 어떻게 변해 있을지 어떤 새로운 욕망과 소망을 가지게 될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