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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물이 Jan 03. 2022

7. 크리스마스의 추억

새벽에 다녀간 산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최초의 기억은 열한살 때 연필세트와 공책 몇권을 받았을 때이다. 열번의 크리스마스 동안 내가 선물을 받은 적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날 아침 엄마는 일찍 일을 하러 나갔고 외삼촌에게 삼촌 집으로 오라는 전화를 받고 동생과 함께 삼촌 집으로 향했다. 우리 집과 삼촌 집은 아이가 걷기에도 골목만 조금 지나면 되는 가까운 거리였고 다섯 살 차이가 나는 귀여운 사촌 동생과 호탕한 외숙모가 단란 하게 사는, 친척 집 중  내가 가장 안전하다 느끼는 장소 였다.


큰외삼촌은 엄하고 때론 무섭기도 하고 어쩔땐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특전사 출신이셔서 그런지 키도 크고 무표정으로 있으면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외삼촌이 잔소리를 하면 무섭기도 했다가 장난을 치면 어색하게 웃기도 했는데 워낙 잘 우는 나를 일부러 울리려고 무섭게 혼내는 척을 하시기도 했다. 다섯 남매중 장녀인 엄마 바로 아래 동생인 외삼촌은 밑에 동생들에게도 권위 있는 형이고 오빠였다. 무뚝뚝한 삼촌과 반대로 외숙모는 아담한 체구에 동그란 얼굴형, 큰 눈에 웃음이 많고 애교도 많은 요즘 말로 인싸인 성격으로 누구와도 낯을 가리지 않고 말을 잘하는 시원시원한 성격이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바쁜 엄마를 대신해 나와 동생을 챙겨주는 두 분이 참 고마웠고 사촌 동생 선물을 사며 우리 남매 것 까지 준비했다는 것에 너무 감사했지만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무뚝뚝하게 고맙습니다. 한마디 한 것이 다였다. 만일 내가 활발하고 밝고 어른들한테도 살갑게 치대고 애교 있고 눈치도 안보는 성격이었다면 좀 더 기쁜 마음을 잘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 항상 친척들 사이에서 부모 없이 동생과 남겨진 상황이 많다보니 자연스럽게 어른들 눈치를 보게 되었고 그저 얌전하게 조용히 있는게 정답이라는 걸 너무 빨리 알아버린 탓에 애어른이 된 나는 감정을 안으로 꾹 눌러 담는 법을 먼저 배웠다.


그 보다 더 전의 크리스마스 기억을 떠올려 보면 유치원 다닐 때였으니 한 여섯살 쯤 이었을까.

부산 진구 연지동 어느 주택에 네 식구가 세들어 살 때 아빠는 집에 있는 시간 보다 나가서 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어느 날은 외박하기도 했고 어느 날은 새벽에 아빠가 있는 곳을 알게 된 엄마가 술에 잔뜩 취한 아빠를 데려오기도 했다. 불꺼진 방 안에서 동생은 잠에 푹 빠졌고, 나는 엄마가 나가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는데 고요한 방 안에 똑딱 똑딱 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를 들으며 혹여나 동생이 깨서 엄마가 없는 걸 알아차리면 울 것이 뻔했기에 동생이 깰 까봐 조마조마 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엄마가 어서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날도 엄마는 아빠를 찾으러 우리를 재워놓고 밤에 나갔는데 동생이 나가는 소리에 하필 바로 잠에서 깨어 엄마를 찾으며 울었다. 고작 한 살 차이였는데 나는 다행히 눈치가 빠른편이어서 엄마가 곧 올거라며 동생을 달랬지만 도저히 울음이 그칠 기미가 없어 같이 엄마 찾으러 가자고 말하고는 동생을 업고 밖으로 나섰다. 나는 또래보다 키도 크고 발육이 빠른편이었고, 동생은 또래보다 키도 몸도 작은 편이었기에 업기엔 수월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나는 그 밤에 주인 아주머니의 현관문을 두드렸고 아주머니는 우리를 걱정하면서 동네 아래 가면 골목에 포장마차가 있는데 거기로 한 번 가보라고 하셨다. 지금 같으면 다섯살, 여섯살 아이를 혼자 두지 않겠지만 그때는 유치원도 혼자 왔다 갔다 할 정도 였으니 밖에 나가는게 그리 무섭진 않았다.


우리 집은 뒷산 근처에 있어 오르막 길이었고 아주머니가 말한대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골목안으로 들어서자 밤이 되면 열리는 어른들의 낙원을 그때 처음으로 보았다. 주황 불빛에 시끌시끌한 포장마차 거리를 걸으며 엄마가 있는지 아빠가 있는지 확인을 하며 쭉 걸어가는데 우리에게 여긴 왜 왔는지 물어보는 사람 반, 얼른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사람 반이었다. 취기 가득한 목소리로.


한바퀴를 쭉 둘러봐도 엄마와 아빠는 찾을 수 없어 동생에게 그만 집에 가자고 했고 그렇게 다시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데 이제는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하기에 동생을 업는게 힘에 부쳐 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때 알았다.

동생이 신발을 신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고르지도 않은 땅을 맨발로 걸으니 발이 아픈게 당연 했고, 동생에게 신발을 내어주고 나는 맨발로 집까지 걸어갔다. 보름달이 뜬 밤 우리는 내복 차림으로 손을 꼭 잡고 걸었고, 맨발에 닿던 땅의 감촉이 눈을 감아도 생생하다.


그렇게 기대를 안고 집으로 갔으나 우리가 나온 상태 그대로였고, 지칠대로 지친 우리는 불을 켠 채 누워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가 엄마를 찾으러 나간 얘기를 주인 아주머니께 전해 들은 엄마는 다시는 그러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했고 나는 엄마가 안나가면 안되냐는 말을 안으로 삼켰다.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난 어느 크리스마스 새벽. 여전히 아빠 없이 셋이서 잠이 든 날. 

조용히 문이 열리고 케익 상자가 방 안으로 슥 들어왔다. 나는 반쯤 뜬 눈으로 케익을 두고 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봤는데 주위가 하얗게 후광이 비쳐 보인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잠에 들었다.

그 날 아침 방안에 떡하니 있는 케익 상자를 보며 꿈이 아님을 알았고, 엄마는 산타가 놔두고 갔다고 말했다.

나는 그때는 정말로 산타가 놔두고 간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산타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케익 상자가 아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난 지금도 케익을 놔두고 하얀 눈 처럼 사라지던 아빠의 뒷 모습을 기억 한다.

그날 아빠는 진짜 산타 되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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