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응어리는 결국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객관적으로
살면서 응어리를 가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살면서 여러 일로 인해 얻어지는 사건 사고, 그리고 경험만큼이나 응어리는 비례적으로 생겨난다.
뭔가를 이루지 못해서, 뜻대로 되지 않아서, 누군가에게 속아서, 또 어떤 이는 상실로 인해서...
응어리의 이유는 사람 수만큼이나, 그리고 살면서 겪는 일들의 횟수만큼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 삶에서 얻어지는 응어리는 스스로 해결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다시 수습하여 원래대로 돌려놓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응어리를 스스로 해결한다는 말은 무엇일까? 완벽하게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
응어리를 푼다는 것은 원상복귀의 의미가 아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잘못된 일에 대해 되돌리고 싶겠지만 이미 자신이 그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응어리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문제에 상응하는 대가를 돌려받는 것? 만일 그렇다면 매우 좋겠지만 응어리를 지울 만한 100%의 보상은 사실 불가능하다. 혹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100%의 회복을 바라는 마음에 무리를 하지만, 결국엔 그로 인해서 자기 외의 사람들이 또 다른 상처로 새로운 응어리를 만들게 된다. 중요한 것은 100%의 회복만을 생각할 뿐, 자세히 조명해 보면 매우 이기적인 방법이라는 점이다.
응어리를 푼다는 것에 대해서 좀 더 달리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100%의 회복이 불가능하다면 말이다.
일어난 사건에 대해 집중하기보다는 다른 것에 대해 집중하거나 오히려 일을 잊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 나은 해결책일 수있다. 하지만 잊는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어쩔 수 없이 갖게 된 아픔으로 생긴 응어리라면 그 응어리를 제대로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응어리로 아파오는 심적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방법이 가장 빠르게 적응하여 완화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적응하기까지의 고통에 대한 공포다.
결국 공포를 이기는 방법이 근원적으로 응어리를 해결하는 방법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포를 이겨야 할까? 똑같이 복수해서? 어떤 특수한 훈련을 통해서? 그거야 사람마다 그 방법은 다 틀리겠지만 필자의 경험을 말하자면 나의 일이지만 남의 일처럼 바라보는 객관적인 힘이 필요하다.
무엇으로 잘못되었다면 그 잘못의 원인을 제대로 규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규명하는 과정에서 나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판별하여 이해할 수 있는데, 규명과 판별 그리고 이해를 통해서 스스로의 잘못을 인지하게 되고 잘못된 결정이 자기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면 그때부터 응어리를 줄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을 회피한다. 이유는 사실 공포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가 문제의 원인이었다는 점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섣불리 남들에게 못난 사람으로 보이기 싫다는 말이 좀 더 명확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엔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는 과정에서 자신의 치부를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자신의 응어리의 크기를 줄이는 데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응어리를 계속해서 담고 살면 언젠가 터지게 마련이다. 터지고 난 뒤에 수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유는 그 응어리를 자신만이 알고 있었을 뿐, 남들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응어리가 곪아서 터져버리게 된다면 터져버린 사람은 터짐으로 인해 어느 정도 해소가 되겠지만 전혀 응어리에 대해 무지했던 남들은 고스란히 피해를 보게 되게 된다.
결자해지라고 말한 것처럼 응어리는 결국 스스로가 해결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스스로가 치유되고 남들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가족 속에서 만들어지는 응어리
친구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응어리
대인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응어리
조직에서 만들어지는 응어리
그 어떠한 응어리든 반드시 스스로가 꼼꼼히 살피어 자신을 누르는 공포와 고통을 넘어서라도 응어리를 직시하는 것이 스스로를 치유하며 남을 위하는 길이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