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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삼 Apr 17. 2020

배를 타려 했던 기억

결혼을 하고, 학위를 받고,, 명색이 박사 학위를 받았음에도 한 달에 200만 원 조금 넘게 받으며 연구원으로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솔직히 연구실에서 일을 한다는 것을 제외하고 오히려 모든 것이 열악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아이가 태어나고,, 좀 더 나은 생활을 꿈꿨던 시기...

그때 나를 알던 사장님들은 자신의 회사 사원들보다 못한 월급을 받는다며 놀라워하셨던 기억이 있다. 놀라만 하고 나를 쓰려는 사람은 전무했다. 하하하.


그래도 나는 배운 짓이 도둑질이라며,, 하던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참으로 오랜 시간을 연구원에 머물렀다. 그리고 기회가 되어 연구교수까지 일을 하고 그만두었다. 그나마 연구교수가 되어 제대로 된 급여를 받으며 살았다.


연구교수 임기를 1년을 앞두고서 늘 고민이 많았다. 과연 무엇을 해야 할지가 고민이었고, 우리 세 식구가 잘 살려면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지 망막했던 게 사실이다.


그때 생각했던 것이 바로 배를 타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었던 내 입장에 아내도 동의했던 바였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약 4년이 걸렸다.


배를 탄다고 해서 멸치 배를 타는 것은 아니고 원양어선이나 화물선을 타기 위해 준비를 한 적이 있었다. 잊고 지냈던 토익시험도 보게 되었고, 관련 책자도 틈틈이 보았던 기억이 있다. 심지어 양성 프로그램에 입학하기 위해서 정말 정성껏 입학 서류를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나이에 상관없이 그리고 전공에 상관없이 교육생을 뽑아서 교육시켜 항해사 및 기관사로 양성하던 시스템이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지금도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최고 고령 지원자가 40살로 알고 있었는데 내가 좀 더 나이가 많았지만, 아시는 분이  써주겠다는 말씀믿어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물론 6개월이라는 장시간의 기숙사 생활을  하며 교육을 받아야 하고 실습을 통해서 자격이 부여되지만 일단 정식 자격증을 받게 되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에 크게 매리트를 느끼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까지 배를 타려고 했던 이유는 단 하나다.

학위를 취득했어도 비전이 없었고, 학교 일 말고는 다른 것을 해 본 이 없었기  때문에 그 어느 누가 날 찾겠나 싶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학위가 효력을 발휘하려면 전히 똑똑하거나, 아니면 전공에 있어서 일명 교수 라인을 잘 타야만 한다. 세간에 떠도는 소문 중에 돈 이야기와는 별개의 이야기이다. 어쨌든 흔히 말하듯이 돈도 없고 백도 없고 줄도 없던 나에겐 박사학위는 허울 좋은 겉치장에 불과했다. 나는 똑똑하지도 않았고, 늘 부족함이 많았던 남성이었다.

그래서 아내와 신중하게 논의해서 내린 결정이 바로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일을 찾던 중에 찾은 것이 바로 그 일이다. 한국 해양수산연수원, 해기사 양성 프로그램


궁금해서 다시 찾아보니 내가 알아봤던 때보다 좀 더 손쉬워진 듯싶다. 특히나 전액 국가 지원이 가능하다고 하니... 아마도 내가 다시 30대라면 선택하지 않았을까 싶다.




가끔씩 아내와 술 한 잔 기울일 때마다 그때 일을 생각한다.

당시 우리 두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했던 사건이어서 그럴 것이다.

실제 시험을 보기 위해서 책을 보고 일부 공부도 하고 있었고, 토익 시험도 준비하고 점수를 받아 놓았었다.

관련 서류를 취합하여 입학할 수 있도록 정말 정성을 들였다.


나는 그저 밥벌이를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새 일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임하다 보니 당연한 결정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아내는 나름 심적으로 고통이 심했던 모양이었다.

술 한 잔 하면서 별일 아닌 것마냥 스쳐 지나는 일처럼 말하지만, 아내가 생각했던 그 무게감은 그대로 느낄 수가 있다.


당시 나의 처지를 잘 알고 계셨던 선박수리업계 모 사장님께서는 은근히 만류하셨다. 솔직히 좋은 일이라면,, 그리고 내 나이가 좀 더 젊었더라면 그분도 적극 지지해 주셨을 것인데 자꾸만 더 참고 하던 일을 하라고 하셨다. 결국, 모든 준비를 끝내 놓고 입학서류를 제출하기 전에 서류 제출을 포기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평상시처럼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뭔가 새로운 것이 있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더 새로운 일이 있을 거란 막연한 희망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단지 아내와 나,, 그리고 나를 아껴주신 그 분만 아는 비밀처럼 묻어두고..

그렇게 지내고 있는데,,, 2018년도 새해에 아내의 취직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지금도 생각이 난다. 그때 취직이 되어 정말 좋아하던 아내의 모습이...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가 기뻐했던 것은 10년 동안 지원했는데 경력단절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취직을 못하다가 극적으로 취직한 이유도 있겠지만, 아마도 헤어지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그리고 더 이상 배 타러 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더 기뻐했던 것 같다.


정말 그때는 그렇게 망막했고,
그 망막함을 견뎌보고,,,
그렇게 견디다가 새로운 길이 열려서 그렇게 운 좋게 살고 있다.



고학력이지만 지금 이 사회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의 입장에서는 정말 천운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제 충분히 쉬었으니 ,,, 천천히 새로운 일을 준비하여 내가 다시 일어서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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