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삼 Aug 29. 2019

해주고 싶은 마음, 받기 싫은 마음

뭔가를 남에게 해주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반면, 그런 호의를 받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대가(代價)와 같은 바람이 없는 베풂이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일부 사람들은 상대의 의중에 상관없이 일단 마음대로 해주고 나중에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의 대가(代價)가 없을 때 흔히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라며 상대를 탓한다. 왜일까?

가고 오는 정을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받긴 했지만 돌려줄 것이 말뿐일 경우, 받았다는 그 자체가 적잖이 부담이 된다.


해줄 수 있는 것이 정말 행복하다는 것을 잘 안다. 나도 한때 아무런 바람 없이 해준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런 바람 없이 해주었음에도 상대가 나를 비우호적으로 대하면 괜스레 본전 생각이 나기 시작한다.


나는 그렇게 잘해 줬는데, 뭐야 이건


사실 상대가 원하지도 않았던 것을 내 마음대로 해줘 놓고, 그것을 빌미로 스스로 나 자신을 분노라는 결박 속에 가두는 경우가 있다. 결국 누군가에게 뭔가를 해 줬다는 것은 적어도 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자는 바람이 있었던 것인데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인 셈이다.

이런 내 모습이 비논리적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로부터 10번을 해주고 싶어도 1번만 해주고 바라지 않고 있으며, 남이 뭘 해준다 하더라도 "아니요, 괜찮습니다"라고 정중히 사양을 한다. 그리고 어느새 주지 않고 받지 않는 것이 나의 생활신조 중에 하나이자 원칙이 되어버렸다. 개인주의적으로 볼 수 있겠지만 나로서는 주지 않고 받지 않는 것이 나와 가족을 지키는 가장 좋은 해법이 되었다.

나는 뭔가를 받을 경우에는 늘 입에 "저는 드릴 것이 없습니다"를 달고 산다. 그런데도 일단 받았으면 나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내 수준에 맞는 선물이나 행동으로 갚아가지만, 부족함이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상대에게 적은 보답을 하는 것이 나 자신을 더욱더 작게 만드는 것 같아 버거울 때가 많다.


사실 내가 이점에 대해 상당히 민감하게 구는 이유는 따로 있다.

나는 원래 어렸을 때 내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을 매우 좋아했었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서 느낀 것이 하나 있다면 주는 사람은 늘 줘야 하고 받는 사람은 늘 받는다는 점이다. 결국 이런 모든 과정이 당연시되면서 나중에는 받는 사람들이 왜 더 이상 주지 않냐고 따지는 경우가 생기고, 나중엔 받던 사람들이 떠나버린다. 말 그대로 호구가 되어본 적이 있어서다. 어찌보면 주었기 때문에 상대의 공짜심리를 더 키운 것이다.  결국, 주는 것보다 정작 공짜로 받는 것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고 난뒤부터 잘 받으려 하지 않는다. 넙죽넙죽 받고서 나도 더 이상 상대가 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할까 봐서...나 스스로도 그런 사람이 될 것 같아서...


가고 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사심이라는 것이 이끼처럼 붙기 시작하면서 가고 오는 정이 서로에게 짐이 되어 되돌아올 때 정말 속물이 되어버린 듯싶다.


그래서 적당선이 중요하다.

나는 남에게 뭔가를 줄 때는 자주 주지 않는다. 만일 줄일 이 있다면 주고 잊어 버린다.

그리고 받으면 반드시 갚아준다.

이때 상대보다 더 좋은 것을 준비해서 갚아줄 경우 반드시 이와 같은 말을 한다. "너무 고마운데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니 가랑이가.... "라며 말하고 다음번에는 부담 없는 것을 나누자고 말한다.

반대로 상대보다 덜 좋은 것으로 갚을 경우, 정말 사죄하다시피 나를 낮추며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너무 고마웠는데, 제가 드릴 것은 이것밖에 되지 않아서 송구합니다"라고...

그럼 상대는 나에 대해서 더 이상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방법은 생각보다 효과적이다.

뭔가를 되돌려주었기 때문에 감사에 대한 표시를 한 것이고 이와 불어 자신을 낮추는 언사를 통해서 기분 나쁘지 않게 내 뜻을 전달할 수 있으며, 생각보다 상대는 이런 모습에 기분은 나쁘지 않지만 부담스러워한다. 그리고 부담스러운 것을 느끼는 순간부터 가고 오는 것을 하지 않거나 적정선을 찾아간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모습을 상대가 선호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모습을 선호한다는 것은 상대도 같은 생각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그 사람과는 오히려 가고 오는 것에 서로가 신경을 쓰지 않고 친구가 된다. 실제로 나에게 그런 사람이 두 명이 있다.


나는 선물이나 선심이 가고 오는 가운데 그 어떠한 셈이 존재하지 않았으면 한다. 하지만 세상을 살면, 특히 밖에서 일을 할 경우, 셈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셈을 덜할 수 있는 방법을 나 스스로가 찾아야 하며 나 스스로가 어떤 원칙을 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가고 오는 가운데 우정이나 신뢰가 싹트는 것이 아니라, 가고 오는 가운데 불신이 싹틀 수 있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겸손과 겸양에 대해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