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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 Feb 22. 2020

가성비 높은 아빠 되기

"화내지 마세요" 카드와 소원카드 

제대로 된 아빠가 되고 싶다.

아이와 둘째 아이 모두 집에서 낳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내의 의견에 따라 집에서 아이 둘을 출산할 때 보조 역할을 했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출산 현장에 함께 참여한 전문가의 지시를 받아 보조역할로 앉게 된 자리 덕분에 아이 둘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아빠를 제일 먼저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아빠의 역할은 끝난 줄로 알았다. 


지난 15년 동안 육아에 대해 크고 작은 어려움이 분명 많았을 텐데 아내의 배려 덕분에 온전히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브레이크 없는 벤츠'처럼 달리기만 하던 어느 날 잠시 멈춰 서기로 했다. 인생이란 도로 위에서 제대로 방향을 잡아서 달리고 있는지 중간점검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누군가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살아온 소방관의 삶과 소소한 성과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먼저 지켜야 하는 것은 바로 가족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가성비 좋은 아빠가 되기로 결심했다. 비록 영화 '테이큰 (Taken)'에 나오는 리암 니슨처럼 싸움을 잘하고 멋진 아빠는 아닐지라도 어렸을 적 모두가 꿈꾸었을 법한 아빠가 되어 보기로 했다.


우선 빠른 퇴근으로 어필해 보자. 


주한 미 공군 오산기지소방서 화재예방팀. 업무 특성상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오후 3시 30분에 퇴근한다. 집에서 소방서까지 거리가 3킬로미터 정도니 퇴근해서 집에 오면 10분 정도 걸린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세상의 모든 아빠들이 오후 4시면 다 집에 오는 줄로만 알았다.


집에 도착해서 이른 저녁을 먹고 집에 모아둔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나면 아빠를 독차지하려는 초등학교 5학년 딸이 기다리고 있다.


4시 30분부터 공기놀이, 공놀이, 권투로 '3종 세트'를 마치면 일단은 합격점수를 받을 수 있다. 요즘은 권투 대신 '민화투'에 빠져 매일 저녁 함께 연습하며 제2의 '고니'를 꿈꾸고 있다. 세상에... 대한민국에서 오후 4시 30분에 딸과 앉아서 민화투를 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아빠란 정말 흔치 않을 것 같다.

 

손이 작아 조금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요즘은 제법 폼이 난다.


남들은 아빠가 주한미군에서 근무하니까 아이들에게 영어공부만큼은 많이 시킬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전혀 관심 없다. 어차피 나도 먹고살기 위한 간절함으로 공부했으니 지금 필요하지도 않은 것들을 아이들에게 강요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


어렸을 때는 그저 많이 웃고 떠들고 노는 것이 최고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고 함께 놀아 줄 수 있는 아빠라면 충분하다. 리암 니슨, 보고 있나?


'화내지 마세요' 카드와 소원카드

해마다 가족들에게 2장씩 제공하는 '화내지 마세요' 카드와 소원카드


매년 가족에게 카드 2장씩을 선물하고 있다. 첫 번째 카드는 소원 카드고 또 다른 카드는 '화내지 마세요' 카드다.

소원카드는 말 그대로 (상식선에서 타당한 수준의) 요구를 아빠가 들어줘야 하는 카드고, 다른 카드는 일종의 사면권과 같다. 아빠가 충분히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이지만 이 카드를 내면 아무 조건 없이 그냥 한번 봐줘야 한다.  


처음 아빠가 되었을 때 나는 엄격한 아빠가 되려고 했다. 엄격해야 아이들이 반듯하게 자란다는 근거 없는 믿음 때문이었다.  


주한미군에서 근무하면서 다양한 미국 부모들의 모습을 보았다. 몇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면 미국 부모들에게도 분명히 엄격한 규칙이란 것이 존재하고 기본예절에 대해서는 아이들이 숙달할 수 있도록 반복해서 교육도 시킨다. 하지만 그 외에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자율적으로, 그리고 독립적일 수 있도록 개성을 존중하고 많이 놀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는 것이다.


어차피 네 인생이다.

개인적으로는 중학교 3학년까지는 열심히 놀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아니, 필요하면 더 놀아도 된다. 추운 겨울, 손가락이 굳어 움직이지 않아도 구슬치기를 하느라 하루 종일 동네 골목에서 살았던 기억이 난다.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아버지도 딱히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셔서 정말 원 없이 놀았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어두운 터널 속을 쉬지 않고 달리는 사람은 불안하기 마련이다. 혹시라도 그 터널을 나왔을 때 내가 가려던 방향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황당하고 두려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적어도 터널에 들어가기 전 이 터널이 맞는지 정도는 확인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 작업이 바로 놀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매일 아이들이 많이 놀면서 자신에게 잘 맞는 것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기도한다. 그리고 다치지만 말고 두발로 멀쩡하게 집에 들어온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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