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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 Dec 07. 2023

미스터 가성비

[소방서 다이어리]

Prologue: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을 가감 없이 적어 보려고 합니다. 부디 이 글로 인해 누군가 상처받지 않길 바라며 소통을 통해 내 작은 세상도 더 풍성해 지길 기도해 봅니다.


언젠가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조금이라도 가격이 저렴한 주유소를 찾아다닌다는 한 유명 배우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적어도 나는 연비를 걱정하거나 값싼 기름을 찾아다니지는 않는다. 주유소를 찾아다닐 시간에 일을 하나라도 더 하자는 것이 어쩌면 나만이 즐길 수 있는 플렉스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50대인 나는 올해로 28년 차 소방관이다. 본업 이외에도 스포츠 도핑검사와 외부 강의까지 하고 있으니 모두 합하면 세 가지 일을 하고 있는 셈인데, 언젠가 누군가 나에게 말해준 것처럼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라는 자세로 한번 들어온 일이나 강의는 거의 거절하지 않고 하는 편이며 일을 통해 호기심도 채우는 아직 미성숙한 '어른이'이기도 하다.


애당초 재테크 분야에는 관심이 없어서 남들 하는 주식이나 코인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그저 매월 받는 월급과 강사료, 그리고 도핑검사 수당을 모아 불과 3년 전에야 비로소 은행 대출과의 정식 결별을 선언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족과 이웃, 그리고 국가에 피해를 주지 않고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있다면 난 밥값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나는 스스로를 '미스터 가성비'라고도 부른다.


돌이켜보면 내 삶에 한줄기 햇살이 드리워진 시점은 마흔이 넘어서다. 20대와 30대에는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생의 방향성도 갖지 않은 채 그저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며 살았다. 어설픈 순발력은 늘었을지 몰라도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지는 못했다.


어느덧 28년 차 소방관이 되었고, 강의 경력 14년에, 도핑검사관으로 활동한 지도 7년이 되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나마 철이 들었는지 제법 진득하게, 또 진지하게 일을 하고 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아무 조건 없이 나에게 젊었던 20대의 시간으로 되돌려 보내주겠다고 제안한다고 해도 나는 거절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보다 더 이상 열심히 살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2020년 '브런치(brunch)'라는 매체를 만나 현재까지 약 3년 동안 즐거운 글쓰기 생활을 하고 있고 그사이 9개의 브런치북도 만들어졌다. 전문적으로 글을 배운 것이 아닌 까닭에 남들이 쉽게 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들을 했으면서도 결국은 평범한 글로 나열할 수밖에 없었던 장기 아닌 장기도 확인할 수 있었다.


주한미군 소방관이란 직업이 우리나라 소방공무원과는 달리 68세까지 일할 수 있으니 당분간은 소소한 현장의 이야기들을 계속 브런치에 채워갈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전반에 대한 불신이 의심으로, 심지어는 회사나 조직의 혹(lump)으로 우리의 가치가 평가절하된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70살 가까이 현역으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미스터 가성비라는 나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 주는 축복이 아닐까?


스스로를 '미스터 가성비'라고 부르는 것이 조금 민망하긴 하지만 이미 인생의 중간 지점을 돌아선 50대 아저씨의 브레이크 없는 뻔뻔함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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