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 Dec 10. 2023

아주 평범한 하루

[소방서 다이어리]

Prologue: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을 가감 없이 적어 보려고 합니다. 부디 이 글로 인해 누군가 상처받지 않길 바라며 소통을 통해 내 작은 세상도 더 풍성해 지길 기도해 봅니다.


새벽 4시 30분.

따뜻한 이불속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켜 멍멍이 자세를 취하고 잠시 스트레칭을 한다. 그 상태에서 몸을 접으면 바로 기도하는 자세가 되는데 기도를 통해 매일매일 내 삶에 베풀어 주신 축복에 대해 감사한다는 고백을 한다.  


소방서에 출근해서 한 시간 정도 운동을 하고 나면 어느새 아침 7시. 그때부터 내 업무는 시작된다. 소방검열관은 부대 내 화재예방을 전담하는 일을 하는데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네 가지 영역에서 활동하게 된다. 소방검사 및 규정집행, 소방교육과 각종 인. 허가 업무가 그것이다.  


오늘은 얼마 전 완공된 교회를 방문해 새로 설치된 시설물들에 대한 교육이 예정되어 있고, 오후에는 소방 엔지니어들과의 미팅도 잡혀있다.


교회에 들어서니 캡틴 김이 반갑게 맞아준다. 교회 목사님인 그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항상 웃는 선한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한국말도 잘하지만 미국에서 나고 자란 탓인지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번에 신축된 건물은 교회와 성당이 공간을 함께 공유해서 사용하게 된다. 미국식 실용주의의 결과인지, 서로를 향한 열린 마음의 결과인지,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 군대식 스타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금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찌 됐든 예쁘게 지어진 교회 안에 있으니 나의 모난 마음이 잠시나마 부드러워진 것 같다. 담당 기술자들을 만나서 소방 관련 장비에 대한 사용과 유지 보수에 관한 내용을 전달받고 다시 소방서로 복귀했다.


점심식사는 보통 10시 반에 먹곤 하는데 사람이 분비지 않는 시간이라서 좋다. 메뉴는 주로 부대 내 한국 공군 식당에서 한식으로 해결하는데 오천 원이라는 가격에 비하면 퀄리티는 상당한 편이다. 예전에 미군들과 함께 소방차를 타고 출동하던 시절에는 미군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했었다. 메뉴도 다양하고 온갖 기름지고 칼로리가 높은 음식들이 많아 한번 먹으면 도무지 조절이 안돼 체중이 급격히 증가해 버렸다. 3개월 정도 미군 식당에 다니다가 왠지 큰일이 날 것 같은 마음에 그다음부터는 아예 그곳으로 발길도 주지 않고 있다.    


사무실은 나를 포함해 한국인 후배 한 명과 미군 한 명이 함께 사용하는데 12시부터는 후배가 편하게 쉬거나 업무를 볼 수 있도록 잠시 사무실을 비켜준다. 아침마다 후배와 하는 우리만의 의식이 있는데 서로에게 "잘 부탁한다."라는 말을 건네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후배가 잘해 줘야 내 하루가 편안하고, 또 후배 입장에서는 괜히 선배라고 고집을 부리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 등 내가 잘해줘야 그가 편하니 어쩌면 서로를 위해 요긴한 부탁이 아니었을까 믿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나는 후배의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다. 감사하게도 대학에서 체육을 전공한 후배 역시 선배에 대한 예우가 각별하니 이게 왠 복인가 싶을 때가 많다. 

 

오후 2시. 미팅을 하기로 한 팀이 사정이 생겼는지 거의 3시가 다 되어서야 사무실에 나타났다. 3시 반에 퇴근을 해야 하는데 이야기는 끝이 날줄 모르고 이왕 온 김에 이것저것 여쭤보고 싶다며 신이 나서 그동안의 일들을 소상히 전달해 주었다. 그렇게 일방적인 시간은 흘러갔다.


물론 대화 자체가 어려웠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문 목적과 시간이 애매하다 보니 내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4시가 넘어서자 이제 퇴근해야 한다는 직장인들의 킬러 멘트를 전달하고 서둘러 미팅을 정리했다. 


퇴근하는 차 안에서 오늘 하루를 돌아보며 소방검열관으로서 몇 점을 주어야 할지를 생각해 본다. 대략 80점 정도는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후배가 없었을 때는 나 혼자밖에 없었으므로 미군들보다는 나아야 한다는 근거 없는 애국심의 발현으로 매일 100점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면 요즘은 잘 뽑은 후배 덕분에 조금은 뒤로 물러서 있는 편이다. 


예전만큼 퍼펙트한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아쉬울 것은 없다. 이미 후배가 그동안 내가 했던 일들을 잘 소화하고 있으므로 그것으로 족하다. 그렇게 감사한 또 다른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이전 05화 미스터 가성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