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핑검사관, 파리를 달리다]
내 마음속 서랍에는 여러 개의 안경이 있다. 모든 것이 행복해 보이는 마법의 안경도 있고, 걱정의 안경, 그리고 별로 꺼내고 싶지 않은 분노와 미움의 안경도 서랍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나는 때때로 이 안경들을 바꿔 써 가면서 세상을 바라보곤 한다. 파리올림픽에 가져갈 짐들을 챙기다가 문득 이번 올림픽에는 어떤 안경들을 챙겨가야 할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지난해 4월 파리올림픽에 파견할 도핑검사관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았을 때만 해도 나는 파리에서의 화려한 시간들을 꿈꾸는 행복의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곧 합격자 발표가 날 거라던 당초 예상과는 달리 발표가 7월에서 8월로, 그리고 다시 12월로 늦춰졌을 때는 초조함으로 가득 찬 안경을 쓰고 있었다.
12월에 선발 발표가 나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안경으로 바뀌었지만 이것도 잠시. 필요하지도 않은 비자를 받아오라는 조직위원회의 억지 섞인 일방적 지시와 보안을 이유로 근무장소와 일정을 철저히 공개하지 않아 준비를 어렵게 만드는가 하면, 그들이 제시했던 정보마저 올바르지 않아 혼란의 혼란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새 내 마음속 실망과 분노의 안경들이 내 눈을 가려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도 여러 불평과 불만들이 모두 해소된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숙소를 배정받지 못한 한 검사관은 텐트를 가지고 가야 하냐며 비꼬기도 하고, 비행기표를 받지 못한 검사관은 이게 도대체 뭐냐며 단톡방 분위기를 냉랭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 모든 불평의 원인 상당수가 기획과 실행을 담당하는 사람들로부터 기인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역시 이 큰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식사 시간마저 줄여가며 일하고 있으니 우리도 어느 정도는 그들을 이해하고 격려해 줄 수 있는 안경을 써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노심초사하며 기다렸던 항공권도 무사히 도착했고, 근무장소와 일정도 발표가 되었으며, 텐트에서 묶지 않아도 될 호텔까지 배정을 받았으니 이제 모든 걱정은 해결이 된 셈이다.
도핑검사는 ‘따로 또 같이’ 해야 할 일들이 참 많은데 동료들의 애로사항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결국 주어진 환경에서의 선택은 오롯이 내 몫이다. 내가 파리에 가는 이유에 대해서도 누군가 대신해서 정답을 제시해 줄 수는 없으므로 나 스스로 이번 파견의 목적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준비를 해야 한다. 이젠 한동안 쓰지 못했던 초긍정의 안경을 꺼내어 겉에 쌓여 있는 먼지를 말끔히 닦고 파리로 떠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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