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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 Aug 02. 2020

일곱 가지 색깔의 소방관

자원봉사,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시간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난다.


스리랑카의 어느 한 마을을 달린다. 파란 하늘을 그대로 투영한 듯 시원한 바람이 동네를 가득 채우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지만 오히려 기분은 상쾌하다. 까맣고 깊은 눈동자를 가진 한 무리의 동네 사람들이 혼자서 애쓰고 있는 한국에서 온 외국인을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 방송사의 해외봉사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 수십 대 일이라는 경쟁률을 뚫어야만 했고, 또 한편으로는 방송을 통해 소방관으로서 의미 있는 성과도 남기고 싶었다. 그렇게 나의 첫 자원봉사,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인도의 눈물이라고 불리는 스리랑카. 그중에서도 실론티의 고장 누워러엘리야에 도착해 마을학교 보수공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턱없이 부족한 봉사단원, 하지만 감당하기 힘든 양의 공사로 인해 봉사기간 내내 안전 하나는 제대로 챙기겠다는 소방관의 포부는 이내 무너져 내린다.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며칠을 부수고 망치질하고 또 색칠을 해야만 했으므로 무언가 근사하게 위험요소를 발견하고 사전에 예방하리라던 내 고상한 소망은 금세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이의 창피함으로 바뀐다.

       

그렇게 학교가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출 무렵 주어진 꿀맛 같은 이틀의 자유. 그 첫 시작을 달리기로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겠노라 다짐한 사람으로서 이곳 스리랑카에서의 프로젝트를 통해 얼마나 안전에 기여했는지 나름의 정산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에 오기 전 한국의 지인들이 기부해 준 얼마간의 돈을 모아 7시간이나 떨어진 곳에 가서 소화기를 구입했다. 공산품 가격이 대단히 비싼 관계로 우리 돈 60여만 원을 지불했지만 건네받은 소화기는 고작 10대 정도다.     


소화기를 직접 보는 것이 처음이라며 감사 인사를 건네는 교장 선생님의 손을 잡았을 때 내친김에 소화기 사용법도 교육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작가들에게 떼를 쓰고 어렵사리 책임 PD로부터 허락을 받았다.      


드디어 소방관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 스리랑카 마을에서의 첫 번째 소방교육이다.                                                                                          

개그맨 한민관 씨의 사회로 진행된 스리랑카 누워러엘리야 초등학교에서의 첫 번째 소방교육이다.

한국어에 능통한 현지 통역의 도움을 받아 직접 불을 붙이고 소화기로 불을 끌 때 큰소리로 환호하던 아이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비록 갑자기 내린 비 때문에 촬영분이 모두 통편집되긴 했지만 내 진심이 잘 전달되었으므로 그걸로 족하다. 그런데 아직도 그 소화기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학교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을까?     


그 이후로도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계속되었다.                                                                

2012년 제주세계자연보전총회 자원봉사자 발대식에서 대표 선서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2012년 제주세계자연보전총회에서는 이천 여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의 대표를 맡아서 봉사했고,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는 도핑관리실에서, 2017년 아부다비 국제기능올림픽에서는 국가대표팀 통역을, 그리고 2019년에는 국회를 비롯해 몇몇 장소에서 소방관 토크쇼 강연도 진행했다.                                                                


2017년 아부다비 국제기능올림픽대회 헤어디자인 부문 경기를 마치고 33개국 대표선수와 감독 등이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비록 봉사의 제목과 내용은 다르지만 내 목적은 오로지 '모두가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하는 것이다. 그동안 발생했던 안전시스템의 실패나 붕괴는 불완전한 인간이 항상 안전할 것이라고 믿는 어리석음을 가장 아픈 방식으로 일깨워 주었다.        

서로 다른 일곱 가지 삶의 이야기지만 결국은 하나가 된다.

                                                                  


올해로 25년 차 소방관.

그동안의 다양한 봉사활동을 통해서 세상을 더 멀리, 또 더 폭넓게 보고 배울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소방학교에 출강도 하고, 한 문화예술 단체에서 이사직도 맡고 있으며, 정식으로 수당을 받는 스포츠 도핑검사관으로도 일하고 있다.


지난해에도 러시아 카잔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 통역으로 참여했으며, 간간히 소방 칼럼과 브런치에 글도 쓰고 있다. 서로 다른 일곱 가지 삶의 이야기지만 결국은 하나가 된다.      


내가 지금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또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안전을 이야기하고 또 때때로 그 씨앗을 뿌릴 수만 있다면 그 순간이 바로 가장 나다운 시간이 된다.      


지금도 봉사활동이 마무리될 무렵이면 어김없이 달리기를 한다.      


그동안 달렸던 예쁜 마을과 도시들. 호주의 시골 동네 커리커리에서도, 중국의 충칭과 일본의 오키나와에서도, 아부다비, 두바이, 러시아, 필리핀, 괌, 미국 보스턴, 그리고 대한민국 곳곳에 뿌렸던 안전의 씨앗들이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기를 나는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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