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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컴퍼니 Jan 08. 2017

달밤의 생쑈

그야말로 끔찍한 밤이었다

“삑삑삑삑, 띠리릭.”

오전 12시 40분. 우리 집으로 가는 복도 조명은 인기척이 있을 때만 불이 들어온다. 이날도 야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가려는데 집 문 앞에 불빛이 반짝였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보는데 검은 형체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여자였다. 우리 집 문 앞에 어떤 여자가 서서 비밀번호를 계속 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엔 취해서 그런 건가 싶어 몇 차례 저러다 말겠지 하고 기다렸다. 멀찍이 서서 보는데 문에 아침에 출근할 때까진 없었던 붉은 자국이 나있는 것이 조금 신경 쓰였다. 그런데 그 여자는 계속 번호 키를 누르고 틀리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우리 집 번호 키를.

세 번째 틀렸을 때 보다 못해 “저기요”라고 말했다. 그가 휙 돌아봤다. 검은 생머리에 검은 서클렌즈를 낀 것 같은 눈의 그 여자. 표정이 없었다. 온 얼굴이 창백한 데다 퀭한 왼쪽 눈가에는 피가 흘러내려 굳은 듯한 자국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바닥과 문에 있는 벌건 것에 시선이 갔다. 여자는 “아… 죄송합니다…”라고 하더니 돌아서는 대신 다시 우리 집 번호 키를 누르는 것이었다. 그 순간 복도 조명이 다시 꺼졌다. 삑삑삑삑 띠리릭, 삑삑삑삑 띠리릭. 나는 미친 듯이 경비실로 내달렸다. 삑삑삑삑 띠리릭.


“저기요, 저 늦은 시간에 죄송한데요. 어떤 여자가 자꾸 우리 집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피 같은 빨간 것도 있고…”

자다가 깬 아저씨는 “학생, 일단 내가 가볼까”라고 했지만 그간 봐온 흉흉한 기사들이 떠오르며 ‘만약 피라면?’ ‘다친 건가 찔린 건가?’ ‘찔렸다면 누가?’라는 생각이 들어 아저씨를 말리고 112에 전화했다. 경찰은 2분 후 도착한다고 했다. 쾅쾅쾅쾅. 누군가 경비실 문을 두드렸다. 그 여자였다.

“죄송한데… 저희 집… 비밀번호가 잘못됐나 봐요… 예비 키로 문 좀 열어 주시겠어요?”

나를 슬쩍 보더니 머뭇거리던 아저씨는 여자에게 호수를 물었다. 그때 나는 숨도 못 쉬고 입구에 쭈그리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하기 싫었다. 아저씨는 열쇠를 찾는 척하며 시간을 끄는 듯했다. 나는 경찰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아저씨가 열쇠를 꺼내더니 위층으로 올라갔다. 설마? 위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긴 우리 집이었다. 나는 한달음에 뛰어 올라가며 외쳤다.

“아저씨!!! 거기 우리 집인데 그 사람한테 문을 열어주시면 어떡해요!!!”

“뭐? 학생이 몇 층 몇 호인지 착각했던 거 아니야?”

얼빠진 나를 보고 술에 취했다 여겼는지 아저씨는 그가 너무도 또렷하게 우리 집 호수를 말했다며 되려 내게 잘못 안 게 아니냐고 물었다. 내가 아니라고, 무슨 짓을 하신 거냐고 말하자 아저씨는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때마침 경찰이 도착했다. 2시간 같은 2분이었다. 그런데 여자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경찰도 아저씨도 나도 당황하던 차에 위층에서 비척비척 걸어 내려오는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그 여자였다.


“이분이 그 여자입니까?”

나는 덜덜 떨며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여자는 경찰의 등장에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손에는 화장실 두루마리 휴지가 들려 있었다.

“아… 현관문 열리는 순간 알았어요. 저희 집 아닌 거…”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이었다. ‘회식’을 ‘많이 했다’라며 주술 호응 맞지 않는 말을 해대던 그는 분명 집 호수만큼은 똑바로 우리 집을 말했다. 그제야 긴장이 풀려 보아하니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현관문과 바닥에 쏟아진 시뻘건 것은 그의 토사물이었다. 회식 때 선짓국이라도 먹었는지 가히 피바다를 방불케 했다. 현관문이 열리며 그는 내 신발 위에 토핑 얹듯이 먹은 것을 쏟아냈고, 자주 신는 정장용 구두와 스니커즈, 샌들과 슬리퍼 등 6켤레가 사망했다. 아저씨는 아래층에서 대걸레를 가져왔다.

나는 도저히 참혹한 현장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남은 것은 출근길에 신은 플랫슈즈 외에 신발장에 있어서 목숨을 건진 어그부츠와 여름용 플립플랍뿐이었다. 신의 한 수가 있다면 현관에 야근이 끝나면 버릴 재활용 쓰레기를 쌓아놨었다는 것. 쓰레기 상자는 일종의 바리케이드 역할을 해 흉포한 침입자의 거실 진입을 차단했다. 게으름이 약이 되다니.

여자의 흔적이 남은 재활용 쓰레기 상자와 걸레, 현관용 발매트를 버렸다. 스탠딩 스팀다리미는 차마 버릴 수 없어 걸레로 닦아내고 걸레를 버렸다. 도저히 빨아서 쓸 자신이 없었다. 급한 대로 신발들을 화장실 바닥에 쏟아붓고 샤워기를 틀었다. 신고 있던 신발도 채 벗지 못하고 변기에 앉아 최대 수압으로 신발들을 한참 씻어 내고야 정신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밤바람이 서늘했지만 창문을 열고 잘 수밖에 없었다. 잠도 잘 오지 않았지만 출근을 위해서는 눈을 붙여야 했다. 살기 위한 잠. 끔찍한 밤이었다. 창밖에 달이 유독 밝았다. 지금은 노란 포스트잇에 메모를 쓰고 있다.

‘안녕하세요. 과음하신 것 같던데 속은 좀 괜찮으신지. 다름이 아니고 어제 일 때문에 제 신발들에 문제가 생겨서요. 세탁비 때문에 메모 남깁니다. 보시면 연락 주세요. 010-XXXX-XXXX’ <끝>




* 팩션 [faction] / 역사적 사실(fact)과 가공의 이야기(fiction)를 더한 문화예술 장르로 이 글도 여기에 해당된다. 정말이다. 설마 이런 일이 진짜로 있을라고. 하하.




보기 좋은 회사가 다니기도 힘들다. / JOB : what looks good also wears you out good.

보기 좋은 떡은 먹기 좋을지 몰라도 보기 좋은 회사는 다니기 힘듭니다. 하물며 보기 안 좋은 회사는 말해 뭐하겠습니까. 그런 회사 다니는 흔한 일개미 조랭이의 직장생활 이야기입니다. kooocompan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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