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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장군 Nov 04. 2020

더 부드러운 대화의 의미

뉴질랜드에서 생각을 보내요

지금 우리 팀에는 6명의 남자와 내가 있다. 그리고 이 7명은 각기 다른 문화에서 왔다. 팀장인 Luke는 브라질 이민자, 상품개발매니저 Robin는 인도계 시크교 이민2세대, 그와 일하는 애널리스트 Miggy는 필리핀에서 와서 이민 프로세스 진행 중이고, 재무매니저 Reuben은 유럽계 키위, 고객(슈퍼마켓들) 담당자 Range는 아랍계 이민 2세대, 수익(P&L) 매니저인 나는 한국인 외노자, 나와 같이 일하는 애널리스트 Dorel은 인도계 이민 2세대이다.

우리 팀은 냉동,냉장음식과 고양이강아지사료를 담당하고 있는데(Frozen, Chilled, Petfood), 여러 프로덕트팀 중에서도, 특히 퍼포먼스와 팀웍이 좋은 팀으로 알려져있다. 올 5월 제일 늦게 조인한
나도 다행히 잘 자리잡아서, 이 2-30대 남자 동료들과 즐겁게 또 때로는 피튀기게, 논의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서로 지지하고 있다.

내가 여자 프로페셔널로서 느끼는 업무 분위기는, 단적으로 말해, 여태까지 어떤 곳보다 편하다. 많이 생각해봤는데 그 이유 중 대부분은 ‘부드럽고 잘 들어주는 남자들의 존재’ 때문이다.

작년 직장을 포함해서, 뉴질랜드 어디서도 발견할 수 있는(그리고 한국에서는 아직은 찾기 어려운) 게 아주 부드럽고 경청하는 남자 캐릭터이다. 난 사무직이니, 당연히 주로 대화(수다, 논의, 심지어 싸울 때도)에서 느낄 수 있다.

상대의 반응을 살피고, 질문이나 커멘트가 있는지 자주 물어본다. 상대가 말하면 들으려고 하고, 동시에 말하면 웃으면서차례를 정한다. 문맥에 어긋나서 지금 같이 얘기할 수 없으면 (무시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명시적으로 조금 후 얘기하자고 제안한다. 가능한 한 유머를 종종 섞어서 말하고 내 말을 듣는 상대 입장을 내가 고려하고 있다는 걸 알려준다.

전체 조직으로 느껴지는 차이는, 어떤 위치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게 더 권위가 있는 게 아니라, 그 위치(예, 팀장, 이사)기 때문에 해야 할 말이 있다. 코로나로 여러 달동안 재택근무를 해야만 했고, 그래서 리더들은 약간 강박적으로(?) 지금 전체 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앞으로 계획이 뭐고 어떤 변수에 따라 달라질지, 개인을 위해 회사에서 제공하는 건 뭔지 등등을 커뮤니케이션한다. 그리고 항상 ‘floor를 open한다’, 질문이나 의견을 묻고 피드백에 고마워하고, 질문에 답하거나 어떻게 답할지 알려준다.

미국회사에서(서울, 뉴욕) 일해본 나는 미국계회사의 대 직원 커뮤니케이션 프로토콜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뉴질랜드에서 일하면서, 사실은 그때보다 훨씬 더 존중받고 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는 걸 매일 피부로 느낀다. 위의프로토콜도 분명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존중의 분위기와 일상에서의 표현’이다.

남편과도 자주 얘기하는데, 둘 다 격하게 동의하는 건 한국사회가 특히 남자들에게 가르쳐주지 않는/훈련시키지 않는‘soft’함이다. 내 생각에는 평등하고 경청하는 대화와 피드백은 여성의 역할도 강점도 아니다. 그냥 훈련이다. 그게 왜 중요한지 알고, 어렸을 때부터 시간을 들여 가족과 학교, 지역사회와 나라에서 배워야 하는 분야이다. 그건 어른이 되서 필요하다는 걸 알아도 사실 꽤 고치기 어려운 자아의 일부분이다. 여전히 (이제는 세계최고 수준인) 많은 한국드라마에는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남자캐릭터들이 아주 많고, 많은 외국인들은 그 abrupt한 방식(소리지르고, 집어던지고,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버리는?)이 갑자기 너무 ‘깬다’고 한다.

부모로서, 어른으로서, 리더로서, 그런 걸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는 것은 그게 왜 중요한지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내가 뉴질랜드에서 배운 부드러운 대화의 의미는 ‘존중의 표현’이다. 같은 상황에서 더 의견을 교환하고, 더 듣고 의논하는 것. 심지어 갈등상황에서도, 각자의 agenda는 분명 있지만, 그걸 push하기 보다는 (척이라해도!) 상호적으로 합의할수 있는 부분을 분리해서 볼 수 있게 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는 그 언제보다도 더 내 의견을 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대신 내 의견의 전달방식(delivery)에 대해서는 나도 더 고민한다. 여긴 내 지위나 지난 경험이 내 의견을 무조건적으로 방어해주지 않는다. 나 역시 상대의 의견을들어야 하고, 제대로 반영했다는 것을 보여주거나 그럴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요즘 빠져서 보는 드라마 ‘청춘기록’을 보면 한국의 20대 남성상은 달라지고 있다. 재력이나 권력에 자아를 뺏기지 않고, 자신을 정확히 표현한다. 여성도 당연히 똑같이 존중하고 경청하고 남성 스스로가 일방적인 걸 싫어한다. 보면서 정말 그냥 너무 좋다. (사족으로는 그럼에도 그들이 너무 많은 걸 해주는(가방 들어주고 데려다주고 등등) 건 싫다.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게 기본이다!)

회사도, 사회도, 이렇게 나아지고 있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여기서 경험하는 이 새로운 분위기는, 나뿐 아니라 모두에게, 서로 더 신뢰하게 해주고, 이 시간들이 각자에게 더 의미있는 경험이 되게 하니까.

우리 팀 - 왼쪽부터 나 Dorel Robin Reuben Range Miggy 글구 Lu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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