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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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凡人)으로 살아냈다.
다행일까. 불온일까.
의미를 얻기 위해 투쟁했다. 삶은 그래야만 했다. 고귀함을 추구했고, 상투성은 죄악이었다.
죽이고 싶었고, 사랑했고, 흔들렸다.
그렇게 실망하고 분노했다.
다만 울분과 원망을 구제해 줄 수신인은 없었다.
의미는 순수히 주관적이기에, 의미 부여는 순전히 개인만의 고유한 창작이기에.
결국 여기 이렇게 서 있다. 모진 수난을 겪으며 허공을 떠돌다 인간적인 추락을 비행한, 소년이 있다.
지금 서 있는 이곳은 진창인가 꽃밭인가.
부랑아는 단말마를 지르고
잃을 것 많은 사람만이 우두커니 서 있다.
정녕 다행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