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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땅별 May 08. 2024

자살을 생각하다

소망 없는 불행(페터 한트케 저)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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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신에 대한 불경인가? 인간의 주체적 결단인가? 자유의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자들. 그들을 보며 의문한다. 인간에겐 스스로 삶을 파괴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가? 파괴라는 말도 사회가 우리를 훈육하기 위한 과정에서 비롯된 단어일지도 모른다.


내 삶에는 언제나 죽음이 공전했다. 자연사•사고사•병사 등 죽음의 양식은 다양했다. 죽음을 직시할수록 두려움이 커졌고 곧이어 밀물처럼 밀려오는 압도적인 두려움이 나를 덮쳤다.


그럴수록 자살한 사람이 떠올랐다. 내가 자살을 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어째서 그가 스스로 삶을 마감했는지가 궁금했다. 그는 삶을 회피한 걸까. 죽음을 맞이한 걸까.


삶을 회피한다는 생각이든, 죽음을 환대한다는 생각이든 살아있는 자들은 죽은 이에게 아무런 답도 얻을 수 없었다. 고인은 더 이상 말할 수 없으므로. 장례식의 주인공은 살아있는 사람들이었다. 생자(生者)는 사자(死者)의 몫을 다해 장송곡을 불러야 했고 조의를 표해야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주체적 죽음에 대해 의문해도 사회는 추모를 강요했다.


그것이 불쾌했다. 망자의 죽음에 금언(禁言)하며 두 번 절하고, 소주 한 잔 털어먹고 잊어야 하는 추모가 싫었다. 관계자가 통곡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일개 조문객인 나로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는 사실이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라벨링. 낙인찍기. 내가 타인의 자살을 해석하려고 한 순간 사회는 내게 해석을 멈추라고 채근했다. 타인의 죽음을 해석하는 게 어째서 라벨링인지 의문했으나 사회 질서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별다른 도리도 없었다. 나는 미력했다.


누군가의 일생을 들여다보는 것. 그의 감정상태를 분석하는 것. 결코 낭만이 될 수 없는 그의 가난을 응시하는 것. 환경과 물질과 감정과 심리가 얼마나 그를 괴롭혔을지 내 멋대로 해석하는 것. 그가 여러 변수로 인해 자살이라는 함숫값을 얻었다고 가설을 설정하는 것. 이 모든 게 낙인찍기였으며, 무용했으며,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를 무시할 수 없기에, 내 삶조차도 죽음이 근거리에서 노려보고 있기에 나는 그의 삶을 해석하는 척이라도 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내 슬픔을 위로할 수 있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는 무용한 노력이었다. 나는 나만의 추모를 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현생에서 무엇을 결핍했기에 그는 어째서 삶을 스스로 마감했을까. 소망 없이 끈질기게 살아내는 과정이 힘들어서 그랬던가. 사회가 그렇게 만든 것인가. 정녕 그런 건가. 사회는 그를 보고 극단적 선택이라고 말한다. 어찌나 무감한 말인가. 그 단어가 더욱 낙인찍기가 아닐지 확신한다.


정신이 약해서, 현실 판단 능력이 떨어져서 극단적으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니. 얼마나 무정한 말인가. 이 얼마나 잔혹한 말인가. 그의 상황을 모르고 너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하는 자들이 내뱉는 천편일률적인 그 말이 참으로 못되다고 생각한다. 그를 그저 교정의 대상으로 바라본 게 아닌가. 그는 진리의 은유였으며 이해의 대상이 됐을지도 모르는 것인데. 나는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이분법으로 결코 바라보지 않으련다. 다만 그저 존중하련다.


부디 행복하길 바란다. 그곳이 천국이든 윤회든 공허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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