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큰 획
나는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다.
다만 가해자가 선생이었다.
선생이라고 써놓고 한참을 망설이며 선생님이라고 고쳐 써야 하는 걸까 고민한다. 도저히 선생님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선생님이라 불리기엔 한참 모자란 이기에 거칠게 들리는 선생 대신 생님이라 표현한다. 앞으로 종종 등장할 그들 모두는 통일하여 생님으로 부르겠다. 어딘가 나사가 빠진 그들은 '선생님'이라는 단어에서 '선'이라는 한 글자쯤은 빼주어야 맞는 것 같다.
학교에 빠지면 큰일이 생기는 줄 알았던 한 초등학생이 있었다. 고학년이 되도록 그 마음은 여전해 늘 남들보다 일찍 학교에 갔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학교 복도를 걷는 기분은 하얗게 눈 쌓인 길에 처음으로 발자국을 내는 기분이었다.
부지런해서라기보단 습관처럼 일찍 학교에 가는 일에 안정감을 느껴서 좋아했던 그 아이는 생애 처음으로 월요병이라는 걸 앓는다.
토하도록 학교에 가기 싫은 마음. 조용히 가라앉아 어딘가로 흘러 사라지고 싶은 마음. 아이는 자신이 왜 그런지 이유를 알지 못하고 그해 평생 자신을 따라다닐 아토피 피부염을 얻었다.
시간이 흘러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고 나서야 아이는 깨달았다. 자신이 생님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는 사실을. 그걸 깨달았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여전히 아이가 살던 시대는 야만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학생 인권이 야만의 시대를 지나 과보호의 시대로 들어선 이유는 아마도 나 같은 피해자가 여럿 있었기 때문 아닐까?
생님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던 해, 새 학기에 처음 만났다. 담임이었던 그 사람은 젊은 교사였고 학생들과 가깝게 지내려 했다. 학생들과 가깝게 소통하고 방과 후엔 기타를 치며 아이들에게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다.
교사가 학생과 가깝게 지낸다는 게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아가 형성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교사의 감정을 흡수하고 그의 뜻에 따라 쉽게 조종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는 절제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교사라면 숨겨야 할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거나 행동했다.
시골엔 카페보다 다방이 많던 시절이었고, 누군가는 다방을 운영하는 부모님을 두고 있었다. 우리 반 역시 번화가에서 다방을 운영하는 부모님을 둔 학생이 있었다.
"누구네 부모님이 다방을 하지. 너흰 다방이 뭔지 아니?"
그런 말을 꺼내고 음흉하게 웃던 생님의 표정은 아직도 가슴에 박혀있다. 내 일이 아니더라도 그런 말이 듣는 이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지 느껴졌고, 교사가 저래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다른 아이들은 딱히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날 이후 다방을 운영하시는 부모님을 둔 아이를 놀리거나 따돌리기 시작했다.
생님은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휘두르는 걸 좋아했다.
친했던 친구들과 같은 반이 되지 못한 나는 담임이었던 생님이 만든 학급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솔직하다 못해 무례했고 당찼던 나는 생님에게 말했다.
"선생님 친한 친구들이 다 옆 반에 있는데, 반 바꿔 주시면 안 되나요?"
돌이켜보면 괴롭힘의 시작점이었을 말. 그 말을 듣던 그의 표정은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한참을 대답 없이 있다가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 답하던 게 떠오른다.
나는 옆 반 학생들이 좋았고, 옆 반 선생님이 좋았다. 그 반은 소외되는 이 없이 모두를 서로가 챙겼고, 따뜻한 온기가 교실 밖을 넘어서 복도까지 넘쳐흘렀다.
아마도 선이 빠진 생님의 열등감 버튼을 제대로 누른 "반 바꿔 주세요"가 아니었을까 싶다.
생님의 공격은 유치했다. 하지만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겐 유효타로 먹혔다.
기타를 연주하던 생님은 방과 후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그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모여들었고, 그사이에 섞여 있던 나에게 그는 웃으며 말했다.
"너는 내 연주 듣지 마."
처음 당하는 노골적인 성인의 배척 앞에 나는 인지 능력이 마비되었다. 어쩌면 자신을 보호하려던 보호 본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말을 듣고도 생님이 나를 싫어한다는 걸 몰랐다. 그리고 그가 테이프가 닳도록 노래를 듣던 가수들처럼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듣지 말라고 하면 듣지 않았다.
아 그런가 보다.
그냥 안 들으면 그만이지 하며 돌아섰다.
그런 생님이 만든 학급 분위기는 늘 숨 막혔다. 그래서 쉬는 시간이면 옆 반을, 점심시간에는 도시락을 들고 과학실로 향했다. 그때마다 곁에는 다른 반 친구들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생님이 학생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이제부터는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들고 교실 밖으로 벗어나지 마세요. 꼭 교실 안에서만 도시락을 먹으세요."
신기하게도 그 말까지만 생각나고 내가 어떻게 점심을 먹었는지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학교에 갈 뿐이었다.
생님은 아이들을 괴롭히길 좋아했는데 내가 보기엔 별 이유가 없어 보였다. 느리고 느긋하고 마음이 따뜻한 한 학생이었는데 그 아이도 생님의 표적이 되곤 했다. 그 착한 아이는 왜 생님의 표적이 되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5~6명이 모여서 요리를 만드는 수업이 있었다. 생님은 다른 조는 다 찼으니 너희 셋이 한 조를 하라며 적의를 드러냈다.
그 셋은 부모님 직업을 비하당한 아이와 순하디 순한 아이 그리고 나였다. 어쩌면 같은 학급에 있는 아이들을 향한 선포와 같았다. 이 셋과 놀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별생각 없이 신났다. 요리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다른 조에 비해 조원이 반밖에 안 되지만 조 과제는 우리의 승리였다. 우리가 만든 음식이 제일 맛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나 보다. 부모님 직업을 비하당한 아이는 결국 전학을 갔다.
떠나지 못한 자는 어떻게 어떻게 그해를 버티고 생존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당하기만 하지 않았고, 절제를 모르는 생님의 괴롭힘의 강도는 그의 성정에 비해서는 낮았다.
왜인지 생각해 보니, 이른 아침 잡초를 뽑으며 대화를 나눴던 어른 덕분이었던 것 같다.
이른 아침 학교에 도착한 나는 영역을 돌아보는 강아지처럼 학교를 둘러보는 걸 좋아했다. 그때 교감 선생님을 만났다. 인사를 하고 교감 선생님과 화단에 난 잡초를 함께 뽑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대화 주제는 주로 교실에서 내가 겪은 일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교감 선생님께 조잘거렸고, 교감 선생님은 웃으며 그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생님의 강한 공격을 막았던 건 교감선생님이라는 방파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생님은 가끔 분노를 삭인 눈으로 나를 보며 아무런 공격을 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아마도 교감 선생님이라는 방파제가 그의 본성을 막아냈으리라.
고작 초등학생밖에 안 된 아이들을 괴롭히며 자존감을 채웠을 그가 교감선생님께 은근한 훈계를 들었을 상상을 하면 상처받은 마음이 조금 위로가 된다. 어려도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는 그 작은 상상이 여전히 남아있는 상처를 어루만져 준다.
사전적 의미로 보자면, 초등학생인 내가 성인인 교사에게 당한 일은 학교폭력이 아니라 아동학대다. 하지만 초등학생보다 미성숙한 이에게 당한 일이기에 아동학대보다는 학교폭력이라 칭하고 싶다.
그가 지금은 교직에 있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앞으로도 두고두고 그를 글감으로 쓰며 어린 날의 상처를 갚아 줄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