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교 때까지 모난 부분이 많은 아이였다가 고등학생이 된 이후 모난 부분을 갈아낸 것처럼 성격이 변했다. 남들 눈에는 그랬다.
사실 속은 그대로였다. 겉으로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배웠을 뿐이었다. 큰 계기는 없었다. 지나치게 솔직하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지나치게 정의를 찾으면 배척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참지 못하고 한 마디를 할 때가 있었다. 저항할 힘이 없는 사람이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을 볼 때였다.
우리 고등학교에는 유독 지하철 노선을 잘 외우는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자폐 성향이 있어서 조금 눈에 띄었다. 그래도 수업을 듣고 혼자서 돌아다닐 정도로 학교생활이 가능했다. 나는 지하철 노선도를 틀리지 않고 외우는 암기력이 부러웠다. 그 아이는 한 학년 아래 후배였기 때문에 만날 일이 없었고, 암기 비법을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반 앞 복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텅 빈 교실에는 주변을 살피며 경계하는 여린 초식동물 같은 그 후배가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나와 같은 학년인 학생 두 명이 있었다.
"너 지하철 노선도 잘 외운다며, 여기서 2호선 노선 외워봐."
얼어붙은 표정의 후배는 우물쭈물하며 당황했다.
교실에 들어선 나는 말문이 막혔다. 교실엔 우리 넷뿐이었고, 그 아이를 도와줄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뭐 하는 짓이냐고 왜 사람을 괴롭히냐고 말리고 싶었지만, 마음을 삭히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남의 반에서 뭐 하냐?"
그냥 그 한마디만 했다. 그리곤 교실 문을 열어서 얼어붙어 있던 후배를 내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의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 시절 우리 학교엔 잔인할 정도로 나쁜 학생이 없었고, 있다 했어도 그런 모습을 드러낼 환경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행동을 조금 짓궂은 장난 정도라고 생각했던 두 동급생은 내 태도에 기가 눌렸다. 그래서인지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 우리 반으로 갈게."
그러곤 천천히 일어나 교실을 벗어났다.
속으로 얼마나 안심되던지. 사실 이 행동은 철저히 계산된 행위였다. 목소리를 높여서 화난 듯 말하면 두 사람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 예상했다. 동급생 한 명은 악의 없이 짓궂은 편이었고, 다른 한 명은 강약약강의 표본 같은 성향이었다. 그러므로 일단 기선을 제압하면 승산 있는 싸움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예측대로 들어맞았다.
당시에는 해야 할 일을 계산하면서 하는 내가 참 부끄러웠다.
계산 없이 정의로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괴감이 생겨서 한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
시간이 훌쩍 흐른 지금의 눈으로 보자면 그 당시의 모습이 그저 귀엽고 대견하다.
아쉽게도 나는 그때보다 더 연약할지도 모르겠다. 단단한 어른은 되지 못했고 조금 더 유연한 사람이 겨우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상황에서는 목소리 높여 부딪칠 수 있는 사람이길 바라는 마음이 남아있다.
살아가면 갈수록 겁이 많아져서 어지간한 일에는 나서지 않게 된 나이지만, 적정성의 정의감은 지킬 수 있길. 그런 사람이길, 여전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