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사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간사해서 헛웃음이 나온다.
광고에서는 기계가 하는 설거지가 나의 노동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라고 한다. 물도 아끼고 전기도 아끼고 나의 컨디션 관리까지 해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매달 날아오는 물세, 전기세 고지서에서 드라마틱한 숫자변화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한 시간씩 윙윙 돌아가는 기계소리를 들으면 과연 지구를 좀 더 위하는 방식으로 선택한 것인 맞는지 종종 의문스럽기까지 했다. 게다가 의외로 손이 많이 간다. 애벌 설거지를 한 뒤 그릇을 간격에 맞게 차곡차곡 넣어야 하며, 테트리스를 해야 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혹여나 기계 안에 곰팡이가 생길까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베이킹 소다로 소독도 해야 했다. 냄비를 여러 개 사용한 날이면 결국은 손 설거지도 병행해야 한다. 보조인 듯하면서도 완벽한 보조 노릇을 하지 못하였기에 난 내가 식기세척기 없이도 잘 살 줄 알았다.
하지만 반푼이의 빈자리는 컸다. 새로운 도시로 이사와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고 적응하기 바빠도 일상 루틴은 환경변화와 상관없이 똑같게 돌아간다. 아침을 챙겨 먹어야 했고 저녁도 해 먹어야 한다. 끼니를 먹고 나면 어김없이 설거지거리가 잔뜩 쌓인다. 큰 조리도구들은 둘째치고 그릇들이라도, 물 마시고 난 유리컵이라도 대신 닦아주던 식기세척기가 그리워졌다. 세탁기와 청소기만 있으면 문제없을 줄 알았는데, 크나큰 착각이었던 거다.
베트남에 마련한 나의 새 보금자리에 특징은 주방이 작다 다. 다른 아파트에 비해 큰 편이라고 하는데 그래도 작다. 내가 막 매 끼니마다 진수성찬을 차려내야 하기에 공간이 작다고 불평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난 행동이 야무지지 못하고 덤벙거리기에 공간이 좀 커야 한다. 그래야 내가 다치지도 않고 깨 먹지도 않는다. 그런 나에게 작은 싱크대, 좁은 조리 공간, 얕은 수납장이 주어진 거다. 그래, 여긴 더워서 여러 가지 밑반찬을 만들 기력도 없으니 메인 요리만 한두 개 해서 먹자. 요리공간이 좁으니 요리 가짓수도 줄이는 거다. 근데 먹고 난 그릇들은? 누가 닦지? 아무리 줄자를 갖다 이리 재고 저리재도 식기세척기를 놔둘만한 공간이 없다.
월셋집으로 이사를 왔기에 처음부터 빌트인 스타일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최신 스타일 아파트도 아니고 주방가구 자체도 연식이 좀 있었기에, 집주인이 허락한다 해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였다. 그래서 조금 더 작은 사이즈로, 그릇만이라도 넣어서 돌릴 수 있는 식기세척기를 찾아보기로 했다. 아침 설거지거리를 돌려놓고 출근하면 딱 좋을 듯하였다. 그럼 퇴근하고 바로 저녁 식사 준비를 하면 되지 않는가. 저녁 먹고 나서도 기계를 돌려놓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면 딱일 듯하였다. 그림을 완벽하게 다 그려놨는데 이럴 수가. 딱 5 센티미터. 그 얕고 좁은 수납장이 하필 5센티미터 낮게 위치를 잡고 있는 바람에 공간이 안 나오는 것이다. 폭, 넓이 모두 다 맞는데, 높이. 높이가 딱 5센티미터 안 맞는 거다.
이제 그만 미련을 버리고, 고무장갑 쇼핑을 가야겠다. 신랑꺼 하나, 내꺼 하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