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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기정 Dec 28. 2018

인간의 복수 본능

셰익스피어의 복수극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본능은 복수 본능 아닐까요? 오래전부터 복수극은 가장 인기 있는 영화의 장르 중 하나입니다. 무협 영화나 카우보이 영화, 갱 영화나 조폭 영화 등 국적을 가리지 않고 복수는 끊임없이 영화의 주제로 등장합니다. 이는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대리만족을 제공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동물 세계의 보복이란 종족의 생존을 위한 자기 방어의 의미가 강하지만 인간의 복수는 확실히 종족 보존의 본능을 초월하는 비이성적인 뭔가가 있습니다. 중세까지 존재했던 결투 문화를 생각해 볼까요. 가문 간의 불화 혹은 개인 간의 명예 문제로 결투가 성행했습니다. 명예란 아주 사소한 문제로부터도 손상되었습니다. 외모를 비하한다거나 겁쟁이라는 말을 잘못해서도 실제 결투가 발생하고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결투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인데 겁쟁이 취급을 받느니 싸우다가 목숨을 잃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시의 정신세계였습니다. 복수의 명분은 정의 실현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만, 고대로부터 정의의 일차적인 정의는 되갚아 주는 것입니다. 불의에 대해서 몸소 심판하는 것이지요.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 끔찍한 유혈 복수극이 있다는 걸 아시나요? <타이투스 안드로니쿠스>가 바로 그것인데 유혈의 정도가 심해서 영국에서도 이 연극을 상연할 때는 극장 밖에 구급차를 대기시킨다고 합니다. 상연 중에 졸도하는 관객이 발생하기 때문이지요.  이 극은 로마의 장군  타이투스가 고트족을 정벌하고 고트족의 여왕과 왕자 셋 등 포로를 데리고 귀환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타이투스는 말하자면 개선장군인데 그의 장남 루키우스가 고트족 여왕의 장자를 제물로 바쳐서 그동안 로마의 희생자들을 위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타이투스는 고트족과의 전쟁으로 10년 동안 25명의 아들 중에 21명을 잃었으니 그럴듯 기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타모라 여왕은 자식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타이투스에게 무릎을 꿇고 간청하지만 타이투스는 이를 냉정하게 거부하고 여왕의 아들은 결국 제물로 바쳐집니다. 타모라는 미모가 뛰어났는지 로마 황제의 눈에 들어 혼인을 하고 왕비가 되면서 본격적인 복수극이 시작됩니다. 타모라의 남은 두 아들은 타이투스의 딸을 겁탈하고 혀와 손을 잘라버립니다. 한편 타모라의 심복 아론으로 하여금 타이투스의 두 아들에게 황제의 동생을 살해한 누명을 씌워 사형 선고를 받게 합니다. 이번에는 타이투스가 탄원을 하지만 로마의 황제는 타모라의 영향을 받아 사형 집행을 명합니다. 타이투스의 장남 루키우스는 추방을 당합니다. 아론은 타이투스의 일족 중 하나가 팔을 하나 잘라서 바치면 황제는 두 아들을 살려줄 것이라고 부추겨서 타이투스는 자기 왼팔을 아론에게 자르게 합니다. 하지만 두 아들은 사형을 당하고 자신의 팔만 자른 결과가 됩니다. 아론의 간계였던 거지요. 이 정도 되면 누구라도 복수심에 불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딸이 당한 비극을 보고 타이투스는 자기 심정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 비참에 이유가 있다면

그렇다면 나의 비탄을 제재할 수 있으리.

하늘이 울면 대지가 흘러넘치지 않는가.

바람이 분노할 때 바다는 광란으로 차지 않는가.

크게 부푼 얼굴로 위협하면서.

그리고 그대는 혼란의 이유를 알고 있는가.

나는 바다다. 들어라 바다의 한숨이 어떻게 부는지.

그녀는 울부짖는 하늘이고 나는 대지다.

그러면 나의 바다는 그녀의 한숨에 감동한다.

그러면 나의 대지는 쉴 새 없는 그녀의 눈물에

홍수가 나고 익사한다."


타이투스는 황제와 타무라를 저녁 식사에 초대한 자리에서 치욕을 당한 자기 딸을 칼로 베 버립니다. 놀란 황제 웬일이냐고 묻자 타이투스는 자기 딸이 타라의 아들들에게 치욕을 당한 것을 얘기합니다. 황제가 그들을 데려오라고 하자 어미와 황제가 맛있게 먹은 파이가 그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칼을 뽑아 타모라를 죽입니다. 왕비를 잃은 황제는 타이투스를 죽이고, 추방당했던 타이투스의 장남 루키우스가 돌아와서 황제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는 타모라의 심복 아론을 산채로 매장합니다. 끔찍한 복수극이 이렇게 멸족 단계에 이르러서야 끝이 납니다.


이러한 유혈 복수의 결과로 무엇이 얻어졌을까요? 셰익스피어는 왜 이런 유혈 복수극을 썼을까요? 어느 쪽이든 정의가 이루어진 걸까요? 복수나 보복으로 정의가 회복되지는 않습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입니다. 역사적으로도 대부분의 전쟁은 정의 회복과는 별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양쪽에 엄청난 희생을  가져왔을 뿐입니다. 정치적인 보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승자는 대부분 패자에게 어떤 형태로든 상당한 보복을 행합니다. 패자가 나중에 권력을 잡게 되어 승자가 되면 자기가 당했던 기억을 잊지 않고 이자까지 붙여서 보복을 하는 것은 인간의 대표적인 어리석음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셰익스피어의 <타이투스>는 복수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정의는 결코 복수를 통해서 실현되지 않습니다. 가장 큰 자비는 복수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버려야 마음의 평화를 찾을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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