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may have a hundred children and live a long time, but no matter how long we live, if we do not get our share of happiness and do not receive a decent burial, then I say that a baby born dead is better off. (전도서 6:3)
'수많은 자녀를 낳고 장수하더라도 주어진 행복을 받지 못한다면'
영문 성경에서는 ‘행복(Happiness)’을 ‘받는 것(Receive)’이라 한다.
던진 공을 받는 것과 같이 행복을 ‘받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share of happiness’를 잘 받았을까?
시간이 흐르며 사람은 생각과 계획대로 삶이 살아가지는 것이 아님을 절실히 체험해 나간다.
청년 시절에 꿈과 이상이 크면 클수록 더욱 그렇다.
이루지 못한 것들을 향해 자신과 타협할 지점을 찾아가는 여정은 일상이 되고,
오래전 계획과 실현은 타인의 삶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행복한 삶'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
"당신은 거룩을 위해 사십니까 아니면 행복을 위해 사십니까?"
말씀 묵상 시간에 종종 등장하는 질문이다.
질문 자체가 거룩과 행복을 구분하고,
굳이 설명을 더하지 않아도
‘행복보다는 거룩하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구나’라고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래 행복보다는 거룩이지’
사라질 행복보다는 '영원한 거룩을 추구하며 사는 삶을 살아야지'라며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어쩌면 행복할 자신이 없어서 거룩이란 이름 뒤에 숨어버렸던 것은 아닌지 묻고 싶어진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신중한 모습 뒤에 가려진 소심함의 근원을 찾아서
원치 않게 자리 잡힌 이 소심함을 던져버렸으면 좋겠다.
신이 아닌 내가 세워놓은 계획대로 살아가야만 행복할 수 있다 착각하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다 보니
어느새 나만의 ‘거룩’이란 이름으로 포장하려 했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But, how can anyone know what is best for us in this short life of ours- a life that passes like a shadow? How can we know what will happen in the world after we die? (그러나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전도서 6:12
무엇이 가장 좋은 것임을 논할 수 없는 삶이기에
내게 던져진 행복의 분량을 잘 받아(receive) 누리는 삶이 곧 거룩한 삶을 향하는 길임을 기억해본다.
거룩한 삶이란 내게 주어진 행복의 몫을 찾아가는 삶의 여정인가보다.
지극히 인간적인 내 목표를 완성하기 위해
정작 중요한것들을 놓치며 바쁘게 채찍질하지말자.
타인을 바라보며 내게 주어지지 못한 것에 집중하는 어리석음도 취하지 말자.
그들에게 던져진 행복의 분량을 바라보는 삶보다는
누리지 못한 '내 행복의 몫(share of happiness)'을 찾아 누리는 복된 삶 살기를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