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예술은 언제나 결핍에서 태어난다.
" 이 글은 <<위대한 열등감>> 을 주제로 진행 중인 작가의 인문 교양 시리즈 일부입니다."
<<위대한 열등감>> 지나김 예술감독
가장 화려한 한 남자의 삶의 끝에 울려 퍼진 고요한 위안
-in His grace
도시로 향한 젊은이는 더 큰 가능성을 꿈꿨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거대한 현실의 벽이었다.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며, 기대했던 삶과 닿을 듯 닿지 않는 간극을 직면하는 순간. 19세기말, 산업화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은 더 나은 미래를 찾아 떠났지만, 오히려 자신의 자리를 잃고 낯선 공간 속에서 부유하는 존재가 되었다. 레이데의 이 작품은 그 절박한 감정과 정체성의 혼란을 강렬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프란츠 리스트의 내면을 닮은 듯하다. 사람들은 리스트를 피아노의 황제라고 불렀다. 화려한 무대, 열광하는 관객, 귀족들의 찬사. 어디를 가든 그는 반짝였다. 하지만 정작 리스트 자신은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겼고, 때론 어릿광대처럼 느꼈다. 누구보다 화려했지만, 누구보다 외로웠다. 마치 그림 속 고개를 푹 떨군 남자처럼…
막이 내리고 조명이 꺼진 순간, 찬란했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남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보았기에 이토록 흔들리는 눈빛을 하고 있을까?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슬픔이 자리하고 있고,
그것은 때때로 소리로 터져 나와야만 하지요.”
그 유명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대 연습곡, 초절기교 연습곡의 화려한 주인공 프란츠 리스트. 클래식 음악 최초로 팬클럽을 탄생시킨 엄청난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동시대 활동했던 대문호 하인리히 하이네는 리스트의 공연에 쏟아진 감정의 폭발을 묘사하기 위해, 1844년 음악평론지를 통해 <리스토마니아>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합니다. 리스트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기절하고, 그의 손수건과 장갑을 차지하려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머리카락, 그가 마셨던 커피 찌꺼기, 담배꽁초까지 이슈가 될 정도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예술가입니다. 하지만 말년에 돌연 가톨릭 성직자가 되기를 선언할 정도로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평온하고 고요한 작품을 남깁니다. 그가 말한 내면의 깊은 슬픔, 무엇이 그를 이토록 슬프게 만들었을까요?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모든 게 잘되어 가는 것 같은데,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쓸쓸합니다. 모두가 나를 부러워하고 손뼉 쳐 주지만, 그 안에서 공허함을 느낍니다. 프란츠 리스트도 그랬지요.
그는 피아노의 황제였습니다. 그가 무대에 서기만 해도 여인들은 기절했고, 콘서트홀은 함성으로 가득했습니다. 손수건 하나, 머리카락 한 올까지 쟁탈전이 벌 어질 지경이었으니까요.
리스트는 당대 최고의 스타였습니다. 최초의 아이돌, 지금의 팬클럽과 같았던 ‘리스토마니아’라는 당시의 신조어가 생겨났을 정도였거든요.
그림 속 리스트는 파리의 살롱 한복판에 앉아 있습니다. 피아노를 중심으로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둘러앉아 있습니다. 피아노 위 <베토벤의 흉상>을 비롯하여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와 <빅토르 위고>, 쇼팽의 연인 <조르주 상드>, 파리의 작곡가 <베를리오즈>, 이탈리아 작곡가 <로시니>에서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화려한 이들 곁에 피아노를 연주하는 리스트를 바라보는 한 여인이 있습니. 연인이자 그의 후원자이자 여인이었던 <마리 다굴 백작부인>의 모습입니다.
그림 속 리스트는 완벽해 보이지요.
화려한 19세기 파리의 예술 한가운데 선 남자.
모든 것이 그를 위해 마련된 무대처럼 보입니다. 시간과 예술의 정점이 한 응접실에서 마주 보고 있는 순간입니다.
"저는 언제까지 어릿광대 노릇을 하며,
응접실에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야 할까요?"
-1835년, 리스트가 라메네 신부에게 보낸 편지 중
하지만 정작 리스트 자신은 어릿광대처럼 느꼈나 봅니다. 피아노 앞 프란츠 리스트는 모두가 바라보는 중심에 있지만, 그의 마음은 그렇게 늘 그곳에서 한 걸음쯤 비켜서 있었습니다. 그 화려한 살롱의 조명 아래에서 그는 말없이 자신의 자리를 견디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친애하는 친구여, 당신의 결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다만 이렇게 늦은 점 용서 바랍니다.
저는 가난하고 ‘골치 아픈 존재’라서, 제 시간을 제 뜻대로 쓸 수가 없거든요.”
훌륭한 식사를 약속드릴 수는 없어요. 그건 가난한 예술가들의 일이 아니니까요.”
— 리스트가 친구 윌리언 메이슨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누군가의 인생을 들여다보다가, 오히려 나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있지요.
프란츠 리스트의 편지가 그렇지는 않은가요?
살롱의 주인공, 피아노의 황제.
모두가 부러워한 화려한 삶 속에서 그는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 ‘가난한 예술가’라 부릅니다.
그 화려함 뒤에, 누구보다 상처 입은 자존심이 숨어 있었습니다
예술가들에게는 어쩌면 한 번쯤 지나야 하는 통과의례처럼, 리스트에게도 가난과 자기 회의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봐주는 무대의 한가운데 서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그곳에서 한 걸음쯤 떨어져 있었습니다.
리스트는 감사의 말에도, 축하의 인사에도 늘 미안하다는 말부터 꺼내곤 했습니다.
누군가를 초대하고 대접하는 일은, 어쩌면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라 여겼던 걸까요?
살롱의 조명 아래, 그는 말없이 자신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헌신으로 바친 시간들 뒤에, 당당히 남자답게 행동할 수 있는 순간은 오지 않는 걸까요?
저는 언제까지 어릿광대처럼 사람들을 즐겁게 해야 합니까?
제 초라하고 겸손한 운명이 어떻게 되든, 제 마음만은 의심하지 말아 주세요.”
-가톨릭 신부 라메네에게 전한 그의 편지 중
화려한 그 무대 뒤에서 리스트는 단 한 사람에게라도 진심이 전해지기를, 그렇게 바라며 음악을 완성해갑니다. 모두가 그의 이름을 외치던 그 순간, 그는 정작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걸까요?
화려함 속에서 리스트가 마주한 건 찬란한 빛이 아니었지요.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도, 그는 스스로 어릿광대가 된 듯한 쓸쓸함을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다음 편, 〈화려함의 대가라는 이름 /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서, 위로가 피어오른다〉 에서 계속됩니다.
" 이 글은 <<위대한 열등감>>을 주제로 진행 중인 작가의 인문 교양 시리즈 일부입니다."
to His glory
지나 김 | 코리안팝스오케스트라 예술감독
예술을 읽고 지식으로 풀어냅니다.
클래식과 인문, 감성과 이성을 잇는 언어로 오늘의 삶을 해석합니다.
<<K-POP에서 만난 클래식 예술 살롱>>저자
주간경향-<<일상 속 심포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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