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주권과 이기성
우리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창조한 존재들이다. 그것도, 하나님을 위해서, 찬양하기 위해서 우리는 태어났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 질문해야한다.
"하나님, 왜 이렇게 이기적이세요?"
이 질문의 응답은 오히려, 우리를 한 차원 높은 신앙생활으로 이끌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할 것이다.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해 단호히 답한다.
로마서 9:20
오, 사람아, 그대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 감히 말대답을 합니까? 만들어진 것이 만드신 분에게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굉장히 신뢰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분의 권한을 전폭적으로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포장한 이면에는 하나님의 이기성이 숨겨져있다.
우리랑 그저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셨다고? 만들어진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러기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넘쳐나며 인생이 너무도 고된 여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해볼 부분은 '생명'에 관한 것이다.
애초에, 생명은 이기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길가에 심겨진 나무들을 보고, 개미들을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나무들은 더 많은 물을 얻기 위해서, 뿌리를 깊게 내리박는다. 개미들은, 더 많은 음식을 찾기 위해서 오늘도 질서정연한 생활을 이어간다.
하나님이 만드신 생태계는 기본적으로 '생리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즉, 생명체들의 이기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숨겨진 놀라운 사실이 있다. 나무의 이기성이 없었다면, 나무가 빨아들이는 지구의 생태계에서의 이산화탄소는 배출된 상태로 있을 것이다. 나무가 제대로 성장하지 않으면, 도시는 무더위가 더욱 심해지며, 지구의 생태계는 지금보다 훨씬 위태로워질 것이다.
개미도 마찬가지다. 개미가 없었다면, 죽은 시체나, 길가에 떨어진 음식을 치우지 않아 엉망이 될 것이다. 모든 동물들과 식물들이 그렇게 상호작용하며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그 기반에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이기성이 내포되어있다. 당연하게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이기성으로 인한 행동들이 오히려 생태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이타적인'행동으로 이어지는 광경이 지구에서 펼쳐지고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신비가 있다. 마냥 이기적인 세상에서, 질서가 있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신묘망측한 생명의 법칙을 만드셨고, 그분이 태초에 그런 속성을 지닌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영생을 '내가'얻었다는 사실, 하나님이 '나를'사랑한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 정상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겠는가?
애초에, 내가 죽게 생긴마당에 무슨 다른 사람을 살리겠는가..
내 생명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은 결코 나쁜 행동이 아니다. 이게 인간이다. 인간은 이런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하는 사실은 세상에서 이기성을 채우려해봤자,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채워지지 않는 구멍은 하나님 한분으로만 채워질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걸 채워주실 때, 하나님과 나는 서로에 대해 즐거워하며 기뻐할 수 있는 관계가 된다.
이제는, 그 즐거움이 나에게만 있기에는 너무나도 큰 것임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차원 높은 평안과 즐거움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 안달이 날 것이다.
이렇게 우러나오는 것이 바로 건강한 이타성이다.
우리가 사랑을 행하고, 남의 유익을 구하고, 겉으로 이기성이 없어 보이는 행동을 할 수 있는 까닭은
"하나님이 나의 이기성을 다 채우셨기 때문이다!"
생명은 물론이고, 이 세상에서 부족한 것등등,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셨다. 정복하고 다스리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며, 먹을 거 입을 거 염려하지 말라고 말이다.
실제로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고,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직접 주시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걱정할 것이 참말로 하나도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합리화로서 작용할 수 없을 뿐더러, 그냥 사실 그 자체이다.
그래서, 말씀을 제대로 믿음으로 사는 이들은 가장 본인의 이기성을 잘 알고, 그것을 하나님안에서 다 채우는 사람들이다.
세상 것으로는 채울 수 없음을 자각하고, 현명하게, 하나님앞에서 다 구하는 자들이다.
이런 이들도 세상으로 빗겨나갈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아냐, 내가 너의 요새야. 아냐, 내가 너의 아빠야, 내가 너의 창조주야"
그래서, 금방 돌아올 수 있는 회복탄력성이 있는 것이다.
글을 정리해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이기적이든 이타적이든 성품이 좋든 나쁘든 뭐라고 주장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있는 토기에 불과한 존재들이다.
운이 좋게도, 감사하게도, 우리를 만든 토기장이는 우리가 바라던 이상적인 성품을 가진 존재임에 안심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이기성을 다 채우고도 모자라, 흘러 넘치는 사랑으로 다른 사람에게도 갖다 주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이기성은 세상의 언어이지만, 성경에서의 용어로서는 자유의지로 대체될 수 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자유의지와 이기성을 주신 까닭은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사랑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토기에 불과한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위험이 있음에도, 이런 것들을 전부 주신 분임을 안다면,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마냥 기계적인 분이 아님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분은 자신을 설명할 때, 질투하는 자, 즐거워하는 자로 설명하신다.
시104:31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본인의 기쁨을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실망할 이유가 없는 이유는, 그 기쁨에 동참할 수 있는 권한을 토기들에게 너무도 많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찬양함에 기쁨을, 누군가를 섬기는 기쁨을, 서로 사랑함에 기쁨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음에 기쁨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 기쁨을 함께 누리고 싶으셔서 그분의 주권, 이기성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다.
시 104:34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이 즐거워하리로다
이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는, 하나님이 마냥 이기적인 분이라고 생각할 수 밖엔 없을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 귓속말로 알려주자.
"너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그거, 이미 하나님이 주셨어. 우리가 할일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찬양하는 것밖에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