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숙명 (少女의 宿命)

by 끄적쟁이

따스한 햇살이 내려앉은 오후, 강미나는 따가운 햇살과는 대조적으로 온몸을 끈적하게 짓누르는 짜증을 애써 무시하며 교복 치마를 펄럭였다. 낡은 담벼락을 넘어선 자유는 달콤했고, 보상이라도 하듯 친구들과 함께 나눈 담배 연기는 쓰디쓴 해방감으로 그녀의 폐를 가득 채웠다. 열다섯 살, 중학교 2학년. 그녀에게 학교는 답답한 감옥이었고, 이런 탈선 행위만이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키득거리며 어른들을 비웃는 듯한 수다를 이어가던 그때였다.


"미나야, 너 괜찮아?"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닿기도 전에, 미나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굳게 닫혔던 눈꺼풀 안에서 홍채가 격렬하게 떨렸고, 몸 안의 모든 피가 얼어붙는 듯한 차가운 한기가 심장을 움켜쥐었다. 입술 사이로 절규와도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살...려...주세요...."


미나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미나의 것이 아니었다. 앳된 소녀의 음성이 아닌, 고통에 절규하는 듯한 낯선 여인의 목소리. 친구들은 미나의 눈이 뒤집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담배를 내팽개치며 사색이 되어 도망쳤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정신을 차린 미나는 눈앞에 펼쳐진 텅 빈 풍경에 눈을 가늘게 떴다. 또 시작인가.


보건실에서 간단한 진정제를 받고 나온 미나의 얼굴은 창백했다. 복도를 지나 반으로 돌아가는 길, 귓가를 맴도는 웅성거림을 애써 외면했다. "야, 쟤 또 저랬대.", "정신병 있나 봐." 수군거림과 따가운 시선은 이제 익숙했다. 몇 번이고 겪어 본 일이었기에, 미나는 굳게 다문 입술을 더욱 비틀 뿐 신경 쓰지 않았다.


쉬는 시간, 미나는 도망갔던 친구들을 찾아 나섰다. 잔뜩 겁에 질린 채 눈을 피하는 그들을 억지로 붙들고 캐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건네진 친구들의 말을 듣자 미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살려주세요?" 그 짧은 세 글자에 그녀는 섬뜩한 기시감을 느꼈다.


"...할아버지...도와줘요...."


누구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도 아닌, 그녀 자신의 귓가에만 맴도는 혼잣말이었다. 과거부터 이따금 겪어온 이상한 현상. 그럴 때마다 아버지 민성이 잊지 않고 늘 강조하던 "핏줄"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녀 안에 흐르는 고조 할머니의 강력한 무당 피, 그리고 선택받은 자만이 겪는다는 신병.


하굗길, 미나는 다시 그 골목길을 찾았다. 어둠이 막 내려앉기 시작한 골목은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친구 두 명은 이미 약속 장소에 와 있었다. 담배를 피우다 벌어진 일이라 그런지,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깨고 한 친구가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며 눈을 반짝였다. 중고거래 사이트였다. 담배를 파는 판매글, 그리고 판매자가 지금 바로 옆 골목이라는 말에 아이들은 기뻐했다. 구매 가능한 나이의 사람이 아이들에게 웃돈을 받고 판매하는 식이었다.


미나도 담배를 살 겸 동행하기로 했다. 세 명의 소녀들은 발걸음을 재촉해 골목 깊숙이 들어섰다. 약속 장소에는 덩치가 매우 큰 남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자세한 얼굴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보낸 눈웃음은 섬뜩할 정도로 인자했다.


"안녕, 예쁜이들."


남자의 손짓과 함께, 미나의 기억은 그 순간부터 흐릿해졌다.

차가운 습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억지로 떠보니 시야를 압도하는 암흑. 그리고 손과 발을 묶고 있는 굵은 밧줄의 감촉. 흐릿해진 의식 속에서도 본능적인 공포가 심장을 난도질했다. 미나가 눈에 익숙해질수록, 지독한 곰팡이 냄새와 퀴퀴한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낡은 지하실. 폐쇄된 공간의 한가운데에는 쇠로 된 수술대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벗어날 수 없는 절망감에 세 소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거칠고 알아듣기 힘든, 조선족 억양의 한국말과 중국어가 뒤섞여 울렸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대화였다. "수술 준비해.", "이번엔 제발 쓸 만한 놈들로", "새로운 제물이다." 그들의 말이 지하실 벽에 부딪혀 마치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처럼 날카롭게 울렸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존재들이 미나의 눈앞에 나타났다. 반투명하고 흐릿한 형상들. 그들은 영혼이었다. 자신의 또래인 듯한 아이들의 원혼. 희생된 아이들의 수만큼 많은 영혼들이 지하실을 부유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의 원혼이 미나에게 다가왔다. 미나의 얼굴 앞으로 바짝 다가선 영혼의 텅 빈 눈동자가 미나의 눈을 응시했다. 마치 그들의 눈을 통해 모든 것을 보여주려는 듯.


그 순간, 미나의 고개가 격렬하게 뒤로 젖혀졌다. 그녀의 눈은 흰자위만 보인 채 뒤집혔고, 몸 안에서 마치 폭발하듯 끔찍한 영상들이 뇌리를 강타했다. 이곳은 그들이 꿈에 그리던 담배를 미끼로 자신과 같은 청소년들을 꾀어내어 납치한 후, 산 채로 장기를 적출하는 지옥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장면들.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어가는 아이들. 그리고 육신을 벗어났음에도 떠나지 못하고 지하실을 떠도는 무수한 원혼들.


아이들의 고통과 분노, 절규가 미나의 감각을 지배했다. 피비린내, 절망, 고통. 그녀는 그 모든 감정들과 동질화되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제갈이 물려 있어 소리는 내지 못했지만, 묶인 몸으로 침대 위에서 날뛰는 미나의 몸짓은 흡사 칼날에 꿰뚫린 듯 고통스러웠다.


그러다, 지하실의 벽을 뒤흔들 만큼 우렁찬 남성의 목소리가 미나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 목소리는 그녀의 입에 물려 있던 제갈을 단숨에 찢어버릴 듯한 압도적인 힘을 지녔다.


"이런! 쳐죽일 놈들!"


그리고 미나의 몸이 순간적으로 지면에서 살짝 공중에 떠올랐다. 손목과 발목을 묶고 있던 굵은 밧줄이 마치 썩은 실오라기처럼 손쉽게 툭 끊어졌다. 소녀의 가냘픈 몸이 아니었다. 강력한 신령이 강림한 듯한 위용. 그녀의 머리카락은 화난 신의 분노를 대변하듯 불꽃처럼 하늘로 치솟아 나부꼈고, 뒤집힌 흰자위 속으로 검은 눈동자가 이글거리며 문 밖을 꿰뚫어 보았다.


미나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놀란 듯, 지하실 문이 "쾅!" 하고 벌컥 열렸다. 문간에 들어서던 두 명의 남성은 미나의 모습에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이어서 미나의 입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는 우렁찬 남성의 목소리였다. 수백 년 된 쇳소리가 섞인 듯한, 장군 같은 위엄이 서린 호령이었다.


"이런 쳐죽일 놈들! 니들이 이러고도 사람이더냐! 내 오늘 친히 너희들의 목숨을 빼앗고, 영혼까지 취해, 소멸 시켜 버리겠다!"


두 남성은 얼이 빠진 모습으로 미나의 모습을 쳐다볼 뿐이었다. 자신들이 납치해 온 어린 소녀에게서 이토록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터. 그들의 눈도 공포로 뒤집히며 입에서는 거품을 흘리기 시작했고, 고개를 젖히더니 흐느끼듯 침을 질질 흘렸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는 모습은 흡사 갓 태어난 새끼 짐승 같았다. 압도적인 힘 앞에 무력하게 짓밟힌 인간의 추악한 모습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앵앵거리는 사이렌 소리, 쿵쾅거리는 발소리, 날카로운 무전 소리가 뒤섞인 혼돈 속에서 미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니 3명의 아이는 경찰들과 구급대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함께 갇혀있었던 두 친구는 구급차에 실려 가 치료를 받고 있었고, 구급대원은 그녀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며 정신을 차리게 하려 애썼다.


그 정신없는 현장 속으로, 누군가 익숙한 실루엣이 급하게 달려 들어왔다. 강형사였다. 굳게 닫혔던 미나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며 흐느낌으로 변했다. 비록 사춘기 딸의 흡연과 엉망이 된 학교생활 탓에 부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이 지옥 같은 순간에 기댈 수 있는 존재는 서로뿐이라는 듯, 미나는 민성의 품에 안겨 겨우 제정신을 차렸다.


경찰들로부터 상황 설명을 들은 민성의 얼굴은 분노와 혼란으로 일그러졌다. 아이들을 담배 판매로 꾀어내 납치, 감금하여 장기를 적출하려는 범죄 조직이었다는 것. 더 충격적인 것은, 여태 이런 방식으로 납치된 아이들 중 다시 돌아온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다행히 미나와 친구들은 스스로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는 경찰의 설명에 민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리고 연약한 아이 셋이서 어찌 범죄 조직의 손아귀에서 도망쳤단 말인가.


경찰이 보여준 CCTV 영상과 아이들의 진술을 통해 상황은 일부 파악되었다. 미나의 몸에 '할아버지 신'이 내려왔을 때, 두 범죄자는 정신이 나가 주저앉았다고 했다. 그 틈을 타 미나는 묶인 친구들을 풀어주고, 자신도 천천히 지하실을 빠져나왔다는 것. 그곳은 학교 근처 단독주택의 지하실이었다. 탈출한 친구 중 하나가 가까운 편의점에 가서 신고를 했고, 미나는 그 편의점 밖 파라솔에 앉아 있었다. 울며 신고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능숙하게 담배 하나를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입에서 다시 쇳소리 가득한 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먼... 맛이... 퉷!"


담배를 바닥에 내던지며 인상을 찌푸린 그 늙은 목소리는, 신고하는 아이들을 향해 불호령을 내렸다.


"이 놈들아! 사내녀석 무서운 줄 알아야지!"


호통을 친 후, 파라솔 테이블에 그대로 몸을 기댄 미나는 이내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그녀의 심장만이 요동치며 이 밤의 끔찍한 진실을 증언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미나에게 씌인 천존장군의 소행이었을까. 민성의 뇌리에는 아내가 겪었던 알 수 없는 비극, 그리고 이제 딸 미나에게서 시작된 이 피할 수 없는 '고리'의 연결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의 가족을 옥죄는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는 이제 딸 미나를 중심으로 다시 힘찬 굉음을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