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소년과 서책

by 끄적쟁이

에필로그: 소년과 서책 에필로그: 소년과 서책


1. 소년의 각성


내 이름은 강호연, 올해로 열두 살. 평범한 초등학생일 리가 없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다.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었으니까. 지하실의 악몽은 아직도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눈앞에서 펼쳐진 초현실적인 경험들은 내 평범했던 일상을 산산조각 냈다. 그날 이후로 누나는 잠을 잘 때마다 차가운 땀을 흘리며 흐느꼈고, 가끔은 알 수 없는 힘이 몸을 뒤흔드는 듯 격렬한 경련을 일으켰다. 밤만 되면 찾아오는 미지의 힘은 누나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아빠는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술병이 늘어가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아빠의 깊어진 한숨 소리가 밤마다 내 방문 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나는 내 방 침대에 걸터앉아 손바닥을 뒤집었다. 그날, 내가 피 부적을 만들겠다고 칼로 베었던 상처는 아물었지만, 그 선명한 흉터는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남아있었다. 피를 잃는 고통보다 더 생생했던 것은, 내가 만들어낸 서책의 첫 환영술이 성공했다는 사실이었다. 미나 누나를 지키고 싶다는 간절함이 미약하게나마 내 안의 뭔가를 깨웠다. 그것은 순수한 오컬트 덕후의 호기심을 넘어선, 어떤 필사적인 의무감이었다. 누나를 구해야 해.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이 세계에 매달렸다. 낡은 서책을 밤낮으로 파고들었다. 그 서책은 나에게 엄청난 가능성을 열어주었지만, 동시에 끝없는 미스터리를 안겨주었다. 한자로 빼곡한 문장들은 난해했고, 그림들은 기괴했으며, 내가 지금껏 접했던 단순한 오컬트 지식과는 차원이 달랐다.


2. 익명의 인도자


깊은 밤, 내가 찾는 건 언제나 익명의 세계였다. '퇴마 오컬트 초자연 현상 탐구'라는 허름한 인터넷 카페. 그곳에는 나와 같은 외로운 영혼들이 모여 있었다. 내가 글을 올리면 누군가 답글을 달았고, 나와 같은 궁금증을 가진 이들이 정보를 공유했다. 그중 유독 내 눈길을 끈 닉네임이 있었다. '전우치'. 그의 댓글은 항상 짧고 굵었으며, 핵심을 꿰뚫는 듯했다. 처음엔 중2병 걸린 허세라고 생각했지만, 몇 번 대화를 주고받을수록 나는 그에게서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느꼈다.


나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 누나의 이상 증세에 대해, 지하실에서의 경험에 대해, 그리고 내 몸에 나타나는 알 수 없는 육체적 피로감에 대해. 모든 것을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역시나 짧은 한 문장.


<전우치> : "동방의 낡은 지혜를 배우려거든, 피에 물든 어둠 속에서 등불을 찾으라. '황혼서점'이라는 곳에 가보면, 네 해답의 일부가 있을지 모른다."


동방의 낡은 지혜? 피에 물든 어둠? 나는 그의 조언이 너무나 추상적이라 처음엔 의심했다. 하지만 그날 밤, 잠에서 깨어나 땀으로 젖은 얼굴로 '뼈… 바다… 나를 해방시켜줘…'라고 중얼거리는 누나를 보고 나는 결심했다. 무엇이든 해봐야 했다. '황혼서점'. 나는 그 이름을 수십 번 되뇌었다.


3. 낡은 책방의 비밀


다음 날, 나는 아빠에게 친구 집에서 밤샘 공부를 한다고 둘러대고 집을 나섰다. 며칠 밤샘 탓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지도 앱을 뒤져 '황혼서점'이라는 곳을 찾아갔다. 주택가 깊숙한 골목에,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음침한 곳에 서점 간판이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유리창은 먼지로 가득했고, 간판은 글자가 지워져 얼룩덜룩했다. 마치 서점 자체가 시간의 저편에서 튀어나온 유물 같았다.


문을 열자, 낡은 종이 냄새, 묵은 먼지 냄새, 그리고 알 수 없는 향냄새가 뒤섞인 독특한 향이 코를 찔렀다. 내부는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책장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켜진 희미한 전구들이 공간을 더욱 기괴하게 만들었다. 서가의 책들은 대부분 오래된 한자 서적들이었고, 제목조차 읽을 수 없었다. 나는 '전우치'라는 사람의 말을 따라 서가를 뒤적거렸다. 누나의 신병과 관련된 책, 해신에 대한 기록, 피로 물든 조상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어디에도 내가 찾는 책은 없었다. 빼곡한 한자들 속에서 내 머리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여기… 주인 아저씨! 아무도 없어요?"


몇 번이고 불러보았지만, 메아리만 돌아올 뿐 대답은 없었다. 서점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마치 나 혼자 다른 차원에 떨어진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 주인은 대체 어디 간 걸까. 아니, 애초에 서점 주인이 있긴 한 걸까. 나는 초조해졌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누나는 매일 밤 고통받고 있었다.


발길을 옮기던 나는 서점 가장 깊숙한 곳, 햇빛조차 닿지 않는 음습한 구석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곳에는 낡고 녹슨 철제 금고 하나가 놓여 있었다. 금고는 단순한 금고가 아니었다. 녹슨 철문 위로 시뻘건 부적들이 겹겹이 붙어 있었고, 검은 금줄이 X자로 감겨 있었으며, 굵은 쇠사슬이 엉성하게 묶여 있었다. 금줄 사이에서는 희미한 푸른빛이 깜빡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치 안에 봉인된 무언가가 있다는 듯. 그 어떤 박물관에서도 보지 못했던 고색창연한 기운이 금고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단순히 '오래됐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시간의 무게와 어떤 영적인 힘이 얽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마치 홀린 듯 그 금고 앞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내 안에서 끓어올랐다. 금고의 차가운 철문에 손을 뻗는 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마치 누군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내 심장을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 등골에서부터 서늘한 한기가 올라왔다. 내 귀에는 주변의 낡은 책장들이 마치 거대한 생물처럼 숨 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분명히 혼자였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그 순간이었다.


4. 운명적인 조우


"크흠, 크흠!"

갑자기 내 어깨에 투박하고 차가운 손 하나가 툭 하고 놓였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기침 소리.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온 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내 뒤에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 서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구겨진 면 티셔츠, 하지만 그의 눈빛은 짙은 안개처럼 깊었고, 만 년을 살아온 듯한 고요함과 알 수 없는 서늘함을 담고 있었다. 섬뜩할 정도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눈동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의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아니, 움직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듯, 처음부터 그곳에 정지된 그림처럼 서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혹은 감사의 인사를 건넬 틈도 주지 않고,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으나, 왠지 모르게 주변의 공기를 울리는 듯한 깊은 진동이 있었다.


"네가 찾는 책은 이거다."


그 한마디와 함께 그의 차가운 손이 내 손에 낡고 두툼한 서책 하나를 툭 하고 건넸다. 그 서책은 내가 서점에서 뒤적였던 어떤 책보다도 훨씬 오래되어 보였다. 가죽으로 덮인 겉면은 해져 있었고, 모서리는 다 닳아 있었다. 거기서 느껴지는 고리타분한 기운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내 손안에서 맥동했다. 그 묵직한 서책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엄청난 힘을 담고 있는 봉인된 유물 같았다.


그 남자는 내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왔던 길 반대편 어둠 속으로 아무 소리 없이, 그림자처럼 스르륵 사라졌다. 마치 연기처럼 흩어진 것 같았다. 방금까지 그가 서 있었던 공간에는 희미한 잔향과 함께 묵은 먼지 냄새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이 기묘하고 비현실적인 만남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꿈속의 일 같았다. 하지만 내 손에 들린 낡고 묵직한 서책은 현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내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그는 누구였을까. 그리고 어떻게 내가 찾는 책을 알았을까. 알 수 없는 미스터리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5. 지식의 빛, 현대의 주문


집에 돌아와 낡은 서책을 펼쳤다. 안에는 역시나 빼곡한 한자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는 읽을 수 없을 터. 그때 내 머릿속에 번뜩 스치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ChatGPT, 네가 필요해!"

나는 스마트폰으로 낡은 서책의 한자들을 한 장 한 장 사진 찍어 ChatGPT에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역과 함께 해설을 요청했다. 인공지능은 내가 올린 한자들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번역해 주었고, 의미를 알 수 없던 구절들에 대한 해설까지 덧붙여 주었다. 해신에 대한 이야기, 강영호 선조의 기록, 그리고 그의 후손들에게 흐르는 어떤 특별한 '피'에 대한 내용까지. 놀랍게도 내가 지금껏 어렴풋이 짐작했던 정보들과 상당 부분 일치했다. 나는 미칠 듯한 희열을 느꼈다. 과학과 오컬트의 기묘한 만남이었다. 이 서책이 바로 '전우치'라는 사람이 말한 '등불'이었다.


며칠 밤낮으로 나는 ChatGPT와 함께 서책을 해독했다. 잠자는 누나의 곁을 지키며, 노트북 화면에 코를 박고 새로운 지식을 빨아들였다. 밤마다 느껴지던 육체적인 고통, 기운 소모는 여전했지만, 그 지식은 내게 엄청난 힘이 되었다. 특히 서책의 한 귀퉁이에 희미하게 쓰인 부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부적은 주변의 '나쁜 기운'을 잠시 동안 묶어두는 환영의 부적이었다.


나는 낡은 서책에 쓰인 대로 연습장에 부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서책의 그림을 따라 정성스레 먹물 묻은 붓펜을 움직였다. 복잡한 한자와 알 수 없는 문양들. 나는 몇 번이고 실패했지만, 땀으로 범벅이 된 종이 위에 마침내 비슷한 부적 하나를 완성할 수 있었다. 완성된 부적에서는 희미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6. 작은 기적의 시작


밤늦도록 잠 못 들던 미나 누나가 거실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에서 깨어난 아빠가 불안하게 누나를 달래는 소리. 나는 침착하게 먹물 부적을 손에 쥐었다. 내가 지하실에서 성공했던 환영술. 그때처럼 몸을 베어 피를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서책의 새로운 구절을 통해 알게 된 사실. 강력한 의지와 영적 집중만으로도 미약하게나마 그 힘을 발현시킬 수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부적에 정신을 집중했다. 눈을 감고, 내 몸 안에 흐르는 미약한 기운을 부적에 불어넣는다고 상상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온몸의 신경이 부적에 쏠리는 느낌이었다. 부적 위로 희미하게 푸른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하압…!"


작은 기합과 함께 부적을 허공에 던졌다. 부적은 섬광처럼 빛나더니, 거실 방향으로 희미하게 흩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했다. 실망감이 밀려왔다. 그때였다. 거실에서 들리던 누나의 흐느낌이, 그리고 아빠의 불안한 속삭임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정적이 흘렀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거실 바닥에 앉아있던 누나는 잠든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아빠는 멍하니 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눈에는 보였다. 누나의 침대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커다란 덩치의 맹견 두 마리. 털이 곤두서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희미한 그림자들에게 으르렁거리며 꼼짝 못하게 하는 모습이었다. 희미한 그림자들은 맹견들을 피해 누나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 거실 한구석에서 불안하게 빙빙 돌기만 했다. 원한으로 가득 찼던 그들의 얼굴은 답답함과 초조함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들은 누나를 향해 절규하는 듯한 기괴한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기라도 하듯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호연아… 누나가 잠들었어. 그것도 아주… 편안하게."


아빠의 목소리에는 믿기지 않는 감격과 동시에 기묘한 경외심이 깃들어 있었다. 내가 던진 환영 부적이 성공한 것이었다. 아주 미약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나는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코끝이 찡했다. 밤마다 찾아오던 육체적 고통이 다시 온몸을 휘감았다. 팔다리는 감각이 없고, 온몸의 마디마디가 쑤셨다. 기운이 고갈되어 숨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서책의 해설 그대로였다. '미약한 도술은 육체의 근원을 깎는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이 아니었다.


내 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와아아! 내가 해냈어! 진짜루! 누나, 이제 좀 쉴 수 있겠다! 히히!" 이젠 나도 누나를 지킬 수 있었다는 기쁨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