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부적

by 끄적쟁이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강호연은 낡은 MTB 자전거의 페달을 맹렬히 밟았다. 체인이 삐걱거리는 소리는 녀석의 거친 숨소리와 뒤섞여 맹목적으로 앞으로 내달리는 심장 소리 같았다. 뒤로는 초등학교 친구들 몇 명이 다소 불안해하는 얼굴로 뒤따랐다. 그들은 지금 '다른 초등학교 형들'과의 싸움을 가는 중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열두 살. 어린 나이에도 호연은 이 싸움판의 '대장'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민성에게 조기 교육으로 주짓수, 삼보, MMA 체육관을 전전하며 '싸움'이란 것에 본능적으로 익숙해져 있었다. 발차기, 조르기, 꺾기. 복잡한 격투 기술들은 호연의 작은 몸에 마치 맞춤 옷처럼 유려하게 스며들었고, 결과는 늘 호연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의 주먹은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자, 녀석을 둘러싼 불합리한 세상에 대한 반항의 표현이었다.


학교 정문 앞 공터에서 만난 상대편 대장은 키가 머리 하나는 더 큰 6학년 남자아이였다. 우쭐대는 어깨와 거만한 눈빛에서 익숙한 비열함이 느껴졌다. 녀석은 손가락으로 호연을 가리키며 낄낄거렸다. 아마도 SNS를 통해 주워들었을, 호연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리는 단어들이었다.


"야, 너희 엄마 귀신한테 잡혀갔다며? 소문에 네네 누나도 얼마 전에 병원에 실려 갔다면서? 귀신 들려서 칼로 난도질하고 자해했다고 하던데? 키득키득. 야, 너네 집안 다 정신병자라며? 어휴, 병원에나 처박혀있지."


어린 아이의 악의적인 조롱은 호연의 심장에 칼날처럼 박혔다. '정신병자 집안'. 그 말이 녀석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순간, 그의 눈빛은 핏기 하나 없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보다도 더 잔인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싸움은 시작과 동시에 끝났다. 결과는 뻔했다. 머리 하나는 더 컸던 6학년 녀석은 채 30초도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서 울면서 나뒹굴었다. 호연은 그 위에 올라타 UFC 옥타곤에서 파운딩이라도 하는 듯이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핏대가 터지고 콧등이 뭉개지며 피가 튀었다. 주위에서 친구들이 혼비백산하여 달려와 겨우 뜯어 말리고 나서야 싸움은 끝났다. 호연의 주먹에 턱이 돌아간 6학년 아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피 섞인 침을 뱉고 있었다.


"호연아, 전화 온다, 야!"


거친 숨을 고르는데 호연의 주머니 속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액정을 확인하니 '아빠'. 싸움 때문에 걸려온 전화는 아니었다. 민성의 목소리에는 깊은 한숨과 진저리 나는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


"호연아, 미나가 또... 또 자해를 했대. 지금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이야. 너도 알지? 싸우고 다니지 마. 아빠가 얼마나 힘든지. 네가 사고 치면 이 아빠는 이제 누구한테 기대고 사냐?"


늘 같은 잔소리, 늘 같은 한숨. 호연은 누나의 '신병'이라고 하는 이상한 현상을 세상에서 가장 가까이에서, 그리고 가장 자주 지켜본 존재였다. 겪을 때마다 심장이 시리고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지긋지긋했다. 자신의 존재마저 지우고 싶게 만드는, 이 집안의 지긋지긋한 '고리'. 마치 운명처럼 얽혀버린 이 지독한 핏줄의 저주는 끝없이 이 가족을 잠식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누나 미나는 약 기운 때문인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지만, 곁에는 아무도 앉지 못한 채 맴도는 알 수 없는 불안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버지는 거실 소파에 앉아 캔맥주를 비우고 있었다. 텅 빈 눈동자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지독하게 삶에 지쳐버린 중년 남자의 쓸쓸한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호연은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소리를 애써 죽이며 다가갔다. 평소 살가운 말 한마디 없이 서먹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차가운 세상과 홀로 싸우는 아버지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 그는 아버지의 넓은 팔을 조심스럽게 끌어당겨 안겼다. 불현듯 찾아온 어린 아들의 품은 어설펐지만, 민성에게는 그 어떤 위로보다 따뜻한 것이었다. 민성은 호연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묵묵히 등을 두드렸다.


"아빠, 나 엄마 왜 죽었어? 그리고 누나는… 왜 그래?"


어린 질문은 가혹한 현실을 너무나 아프게 헤집고 들어왔다. 민성의 얼굴이 비틀어졌다. 그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만 더욱 힘주어 아들을 끌어안았다. 이 어린 아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사랑했던 아내의 처절한 죽음, 그리고 그 끔찍한 운명을 그대로 되밟고 있는 딸. 이 모든 진실은 열두 살 아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짐이었다. 호연은 아버지의 그 침묵의 무게를 알았다. 대답을 얻지 못할 질문이었다.


호연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의 작은 방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답답한 마음에 노트북을 켜고 익숙한 오컬트 사이트들과 도술 관련 정보를 다시 검색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무력했고, 누나는 고통받았다. 이 엉망진창이 된 우리 집안의 화목함을 위해서는,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전우치 도인 클럽' 게시판, 헌책방에서 겨우 구해낸 낡고 해진 한문 서책… 그의 손때가 묻어 반질거리는 서책이 이제는 그의 삶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그때, 로그인한 사이트에 익명의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제목: 자네, 제법인데?]


[익명의 사용자로부터]


자네가 이런 것에 흥미를 보이고 파고다니는 것을 나 정도 되면 모르겠는가. 나는 자네의 상황을 미리 짐작하고 있네. 자네의 가족 중 누군가에게 분명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야. 아마도 '신명'의 기운과 '원한'의 기운이 뒤엉켜 있을 터. 자네에게 귀신으로부터 잠시 누이를 보호할 수 있는 부적을 쓰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겠네. 아래 설명을 명심하고 한 글자도 빠뜨리지 말고 따라 하게나. 이건 장난이 아냐. 자네 가족의 목숨이 달린 일일세.


메시지는 부적의 재료, 형태, 붓으로 쓰는 방법, 심지어 부적을 붙일 위치와 외울 주문까지 아주 상세하고 길게 이어졌다. 호연은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구세주라도 만난 듯한 벅찬 기분이었다. 가슴이 격렬하게 뛰었다. 하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재료 중 닭의 피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깊은 밤, 닭피를 구할 길은 없었다. 호연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닭피. 신성하고, 어둠을 쫓는 정화의 피. 서책에서도 닭의 붉은 볏과 피는 양기를 상징한다고 했었다.


"젠장… 닭피가 왜 필요해…."


호연은 머리를 굴렸다. '피… 닭피… 붉은 피…'. 그의 눈은 거실 테이블에 놓인 커터칼에 머물렀다. 주춤거렸다. '사람 피는 금기', '명(命)을 깎아 쓰는 것'. 서책의 경고가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누나는 고통받고 있었다. 아버지도 힘들어했다. 자신이 아니면 누가 이 집안을 구할 수 있을까. 호연은 이를 악물었다. 커터칼을 챙겨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그는 자신의 방 책상에 앉아 낡은 서책을 펼쳤다. 숨을 고르고, 메시지에 적힌 대로 한자 한자 따라 적기 시작했다. 푸른 먹물과 피의 조화. 가늘고 떨리는 손가락 끝을 커터칼로 긋자,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붉고 따뜻한 피가 방울져 맺혔다. 아릿한 아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 피를 먹물에 조심스럽게 떨어뜨려 섞었다. 먹물은 핏빛을 머금으며 불길하면서도 선명한 붉은색으로 변해갔다. 호연은 작은 붓을 들고 메시지에 그려진 부적 문양을 낡은 한지 위에 한 획 한 획 그려나갔다. 그의 심장은 북처럼 쿵쾅거렸다. 어린 소년에게는 무겁고도 두려운, 신성하면서도 불길한 의식이었다. 부적 위로 선명하게 피어나는 핏빛 문양. 그 안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힘에, 호연은 숨을 멈췄다. 이게 바로 도술인가. 그릇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어린 호연은 알지 못했다.


누나가 잠든 사이, 호연은 살금살금 미나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열자마자 자욱하게 깔린 음습한 기운이 코를 찔렀다. 한기가 온몸을 휘감는 듯했다. 미나는 침대 위에서 잔뜩 웅크린 채 불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호연은 방 모서리 네 방향에 자신이 피로 그린 부적을 조심스럽게 붙였다. 그리고 숨을 고르며 서책에서 배운 대로, 혹은 마치 ChatGPT에게 음성 명령을 내리듯이 나지막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귀신불가범… 물러나라… 퇴귀살령….”


주문이 이어질수록, 방 안을 감싸던 음습한 기운이 움츠러드는 듯했다. 핏빛 부적들이 희미하게 붉은빛을 발산하며 호연의 몸과 동화되는 듯한 강력한 효력이 느껴졌다. 그의 몸속에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들어 오는 듯한 강렬한 충만감에 희열을 느꼈다. 드디어 해냈다! 누나를 구할 수 있다는 기쁨에 어린 가슴은 벅차올랐다. 이 맹목적인 믿음이 불러올 파국을, 어린 호연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자정 무렵. 피로 그린 부적이 방 네 귀퉁이에서 미약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희미한 붉은빛은 여전히 발하고 있었지만, 그 빛은 마치 힘겹게 박동하는 심장처럼 불안정하게 일렁였다. 호연의 귓가에는 차가운 새벽 공기만이 들리던 것이 아니었다. 멀리서부터 낮은 울림처럼 다가오는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땅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수십 개의 북소리 같기도 하고, 수많은 그림자들이 한꺼번에 바스락거리며 다가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심장이 급격히 수축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불길한 예감.

부적에서 뿜어져 나오던 붉은빛이 점차 탁해졌다.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그린 핏빛 문양은 서서히 검붉은색으로 변하며 생기를 잃어갔다. 방 안의 기온은 몇 초 만에 영하로 곤두박질쳤다. 창문이 닫혀 있는데도, 스산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살갗을 파고들었다. 호연의 어깨는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한은 외부의 냉기라기보다는, 내면에서 솟구치는 거대한 공포에 가까웠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는 더 이상 멀리서의 울림이 아니었다. 미나의 방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는 듯한 거칠고 끈적거리는 소리. 콰아앙! 쾅! 쾅! 나무 문짝이 통째로 뜯겨나갈 듯 흔들리더니, 잠금장치마저 덜컹거리는 것을 넘어 산산이 부서지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다. 벽에 붙어있던 부적들이 '파직! 파지직!' 소리와 함께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희미한 빛마저 사라지자, 방 안은 순식간에 암흑에 잠겼다. 그리고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많은 존재들이 핏물 같은 적안(赤眼)을 번뜩이며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그림자가 스스로 생명을 얻은 듯, 벽과 천장에서부터 섬뜩한 기척을 내며 스멀스멀 기어들어왔다. 지하실에서 희생된 아이들의 일그러진 얼굴, 몸이 잘려나간 기형적인 모습, 그리고 인간의 형상을 잃은 채 추악한 덩어리가 된 악령들까지. 수십, 수백 마리의 원혼과 잡귀들이 피 냄새를 맡고 미나의 방으로 미친 듯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욕망과 굶주림으로 이글거렸고, 찢어질 듯한 입에서는 "이리 내놔!", "내 살을 갈랐으니, 네 피를 받아야지!" 저주와 탐욕에 가득 찬 목소리들이 방 안을 꿰뚫듯 채웠다.


그 압도적인 공포와 물리적 압력이 어린 호연의 몸과 정신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온몸의 신경이 칼로 난도질당하는 듯했고, 마치 그의 심장을 뽑아낼 듯한 고통에 호연은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흐흑… 으아아아악!" 어린 소년의 울부짖음은 결계가 깨지는 소리와 귀신들의 비명에 파묻혔다. 그는 자신의 실수, 금기인 사람의 피를 사용했기에 일어난 이 참혹한 결과에 절규했다. 고작 12살. 이 모든 것을 감당할 힘이 없었다.


[아버지 민성의 시점]


민성은 거실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차가운 캔맥주가 놓인 테이블 위로 누군가의 슬픈 한숨 같은 것이 스쳤다. 오늘 들었던 미나의 자해 소식, 그리고 늘 힘들어하는 딸을 보며 느꼈던 무력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의 존재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도, 아까 아들 호연이의 작은 등에 그어진 상처가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싸우지 말라고 잔소리했지만, 그는 알았다. 그 싸움은 자신과 아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몸부림이었음을. 그때였다.


"아아악! 흐흑… 으아아아악!"


호연이의 절규였다. 날카로운 비명은 민성의 폐부를 꿰뚫는 듯했다. 소리가 미나의 방에서 들려왔다. 동시에 방 안에서는 가구가 쓰러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유리 조각이 산산조각 나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뒤섞였다. 술기운에 취해 있던 민성의 몸이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그는 곧장 소리의 근원지인 미나의 방으로 거칠게 뛰쳐갔다. 문고리를 잡는 순간, 손끝에 닿는 알 수 없는 냉기와 불길한 기운에 몸서리쳤다. 마치 오래된 납골당의 문을 여는 듯한 섬뜩함이었다. 민성은 망설이지 않고 문을 잡아챘다. 그의 손에 느껴진 엄청난 저항감. 무언가 거대한 힘이 안쪽에서 문을 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손잡이를 돌려 문을 잡아챘다.


방문이 굉음과 함께 벌컥 열리자, 민성의 눈에 비친 것은 차마 인간의 눈으로는 믿기지 않는 아비규환의 지옥도였다.


방 안의 가구들이 제멋대로 뒤집히고 날아다니며 벽에 부딪히고 있었다. 전등은 이미 산산조각 난 채 터져 나갔고,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형체를 드러내는 수많은 그림자들이 딸 미나가 잠든 침대 위로 시커먼 손아귀를 뻗치고 있었다. 민성은 알 수 없는 냄새와 냉기가 한꺼번에 폐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숨을 컥컥 막혔다. 마치 곰팡이 핀 썩은 내와 피비린내가 뒤섞인 듯한 역한 냄새.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침대에 창백하게 누운 미나, 그리고 방 한구석에 쓰러져 울고 있는 어린 호연을 노리는 섬뜩한 형체들이었다.


"이게... 뭐야...!!"


컴뱃 삼보 챔피언 출신의 본능적인 싸움꾼답게, 민성의 몸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이 자식들, 당장 멈춰!" 그는 주먹을 쥐고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들을 향해 맹렬히 휘둘렀다. 훈련된 그의 주먹은 살을 찢고 뼈를 부수는 파괴력을 지녔지만, 그의 주먹은 헛된 공기만을 갈랐을 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림자들은 조롱하듯 그의 팔을 스쳐 지나갔고, 오히려 "크크크… 우후후…" 하는 끔찍한 웃음소리로 그를 비웃는 듯했다. 소리를 지르며 위협했지만, 어둠의 존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오직 미나를 향해 더욱 굶주린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안 돼! 이 자식들아, 내 딸에게서 떨어져!"


민성은 무력하게 주저앉았다. 육체적인 힘으로는 결코 대적할 수 없는 존재들. 그의 딸과 아들을 감싸고 도는 이 미쳐버린 현장 속에서, 그는 낯선 공포와 함께 생전 느껴보지 못한 압도적인 무력감을 느꼈다. 그저 자신의 두 팔을 뻗어 침대 위 미나와 방 한구석에 쓰러져 울고 있는 호연을 감싸 안으려 할 뿐이었다. 귀신들은 그저 미나를 먹잇감처럼 바라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호연은 바닥에 엎드린 채, 자신의 실수 때문에 누나와 아버지마저 위험에 빠뜨렸다는 자책감에 비참하게 울고 있었다. 고작 12살. 이 모든 것을 감당할 힘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들의 절규와 무력함은 방 안을 가득 메운 악귀들의 비웃음 속에서 더욱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그때였다.


죽은 듯이 잠들어 있던 미나의 몸에서 섬광처럼 강렬하고 눈부신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칠흑 같은 밤하늘에 별이 터진 듯, 혹은 수천 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떠오른 듯한 압도적인 빛이었다. 눈을 똑바로 뜰 수 없는 그 거룩하고 강력한 에너지에, 방 안을 가득 메웠던 모든 귀신들은 마치 뜨거운 불에 닿은 것처럼 일제히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공포와 경외심, 그리고 한없는 원한과 아쉬움이 뒤섞인 비명이었다. 그들은 마치 거대한 존재 앞에서 자신들의 존재가 소멸될 것을 두려워하는 듯, 급격히 움츠러들며 주춤거렸다. 일제히 움츠러든 악령들은 혼돈 속에 섞여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방 밖으로 물러나려 했다.


광채가 점차 희미해지더니, 그 자리에 거대한 형체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숱 많은 검은색 수염이 그의 턱과 입가를 뒤덮었고, 세월의 풍파에 깊이 패인 험상궂은 주름은 그의 얼굴에 위엄과 동시에 인자함을 새겨 놓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인간의 것이라고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굳건한 기개가 서려 있었다. 이 조선 시대의 장수가 입었을 법한 낡고 웅장한 갑옷을 입은 존재는, 하얀 머리와 검은 수염의 외모에서 태고의 시간에서 튀어나온 듯한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그의 번개 같은 눈빛은 방 안을 꿰뚫듯 둘러보며 침범한 불경한 존재들을 하나하나 지목하는 듯했다. 옆구리에 차고 있던 긴 칼의 손잡이에 그의 굵은 손이 닿았다. 그 묵직한 손짓만으로도, 온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그리고 장군의 입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는 지하실을 흔들던 귀신들의 비명과는 차원이 다른, 천지를 진동시키는 우렁찬 천둥 소리였다.


"허허! 이놈들 보소! 지옥 문을 열어도 될 만한 피 냄새에 이리도 몰려왔더냐! 허나 이 자는 내가 있는 곳! 감히 너희 같은 잡귀들이 발붙일 곳이 아니다! 썩 물러가라! 내가 이 자에 있는 한, 감히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내 이 자리에서 직접 명하노니, 즉시 사라지지 않으면 소멸의 벌을 내릴 것이다!"


장군의 우렁찬 호령과 함께, 그의 손에서 푸른빛이 번뜩이는 긴 칼이 번개처럼 뽑혀 나왔다. 차가운 칼날이 허공을 가르자, 방 안에 가득했던 모든 귀신들은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원한 가득한 목소리를 토해내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존재 자체가 지워진 듯했다. 빛이 사라지자, 다시 찾아온 어둠은 이전보다 더 깊고 고요하게 모든 것을 감쌌다.


방 안에는 여전히 지독한 피 냄새와 냉기가 남아 있었지만, 모든 물리적인 흔들림은 멈춰 있었다. 민성은 얼이 빠진 채 눈앞에 펼쳐졌던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칼을 거둔 장군은 바닥에 주저앉아 겁에 질린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어린 호연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험상궂은 얼굴에 알 수 없는 웃음기가 어렸다.


"이 녀석아! 도술이 무언 줄 알고 함부로 하는 것이더냐! 비록 네 누이를 향한 마음은 가상하다마는, 그리 무모한 짓을 하다가는 너와 네 누이의 목숨까지 끊어버릴 참이었느냐!"


장군의 목소리에는 엄중한 꾸짖음이 담겨 있었지만, 이내 희미한 미소를 띠며 호연이의 머리를 지그시 쓰다듬었다. 그 투박하지만 따뜻한 손길에 호연은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아빠도, 장군도 그 앞에서 너무나 작게 느껴지는 스스로의 무력함에 북받쳐 오열했다.


"허나… 제능은 있구나… 허허… 헌데, 이 정도 혼쭐을 내었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갈 때로다."


장군의 눈빛은 마치 오랜 옛 지인이 호연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호연이의 손에 들려 있던 피 묻은 서책으로 향했다. 마치 작별 인사를 하듯 고개를 끄덕인 장군의 형체가 스르륵, 새벽 안개처럼 희미해지며 완전히 사라져갔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느껴지던 묵직한 기운만이 미약한 잔향처럼 남아있을 뿐이었다.


방 안에는 여전히 지독한 피 냄새와 냉기,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리는 고요함만이 남아 있었다. 민성은 멍하니 방 안의 처참한 흔적들을 바라보았다. 날아간 가구들, 깨진 전등, 그리고 그 모든 것 위를 덮고 있는 차가운 공포의 기운. 호연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눈물을 훔치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피와 먹물로 범벅된 손가락. 그리고 그의 머리 위에는 장군이 쓰다듬었던 자리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의 눈에는 어린 소년의 순수한 슬픔과 동시에, 알 수 없는 힘에 대한 새로운 갈증과 함께,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거대한 세계에 대한 경외심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가족을 둘러싼 고리였을까. 호연은 더 이상 이전의 평범한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그의 심장에는 전우치와 같은 도인의 위대한 여정에 대한 희미한 기대와 함께, 가족의 '고리'를 파헤쳐야 하는 무거운 숙명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민성은, 이성을 초월한 존재들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그리고 자신들의 가족에게 어떤 '고리'가 씌워져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긴 밤이 지나고, 가족의 새로운 장이 펼쳐질 참이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