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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리아코알라 Nov 28. 2021

한 번은 웃음이 나왔는데
한 번은 웃음이 들어갔다

오래전 호주에 살 때였다. 

이민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영어 선생이었던 나는 늘 뭔가 좋은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재물은 나와 거리가 멀었고 가진 거라곤 평생 언어를 가르친 경력뿐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내가 평소 알고 지냈던 몇몇 한국 아이 입양 호주 가족들을 도울 기회가 생겼다. 그들의 대부분은 아이들을 위해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했다. 이미 대부분 초급은 뗀 상태들이었다. 문화를 접할 기회는 종종 있었지만 한국어를 학교가 아닌 곳에서 아이들을 재우고 늦은 시간에 배울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로 했다. 그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구체적인 목표와 레벨은 다양했지만 다들 열심히 했고, 실력도 점점 늘었다. 나는 내가 잘 알고 지내던 한인들과 한국어를 공부하던 호주인들을 모아서 한 달에 한 번씩 한국어의 밤도 열었다. 그곳에서 배운 한국어를 쓸 기회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정기적으로 한국의 위탁모들께 쓰는 편지도 번역했다. 그리고 입양가족이나 한국문화가 관련되는 행사에도 열심히 참여하거나 주최하였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서 호주 입양인 가족들을 여러 방법으로 도왔다. 왠지 한국인으로서 고맙기도 하고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가까운 지인 분과 얘기를 나누는데 한 순간 뭔가 불편한 말씀을 하실 듯 보였다. 그리고는, 


"... 저기... 근데, 혹시 자기도 입양아야?"

(네?! 아닌데요. ㅎㅎ)

"저기, 근데 한인회에는 자기가 입양아라고 소문이 다 났어. 애들을 보면 입양아가 아닌데, 저렇게 열심히 입양 가족들을 돕고 행사도 하고 하는 걸 보니 자기가 입양아가 분명하다고. 근데 아니야?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물어보면 좀 뭐 할까 봐 이제야 물어보네..."

(아이고, 진작에 물어보지 그러셨어요. 전 입양아는 아닌데 다른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시면 뭐 굳이 해명하실 필요는 없어요. 입양아라고 생각해도 괜찮거든요.ㅎㅎ)


진심이었다. 상상도 못 했던 소문이었지만 나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다. 그냥 웃음이 나올 일이었다. 


그리곤 며칠 전 한국에서였다.  

남편과 얘기를 하던 중 우연찮게 듣게 된 말이 있다. 무슨 얘기를 하다가 그 말이 나왔는지 그 말이 있기 전 대화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그만큼 내게 그 말은 충격적이었다. 열심히 서로의 의견을 얘기하다 약간 감정이 고조되었고, 답답해진 남편은 (영어로)"... 아니 그러니까 생각을 해봐. 누가 당신한테 이렇게 말하면, 아니 나한테 그렇게 말한다 해도 기분 나쁠 텐데, 호주 시민권 때문에 나랑 결혼했다고 하면 기분이 어떻겠어?..." 나는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옛날 내가 가르쳤던 한 필리핀 학생이 떠올랐다. 얼핏 보기에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는데 자신의 남편은 자신보다 나이가 더 많았다고 했다. 남편이 쓴다고 했던 어휘로 미루어보아 한 세대는 훌쩍 뛰어넘게 차이가 나지 않을까 싶었다. 나와 학생들은 모두 그 학생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뭔가 조심하는 기운이 항상 수업 중에 감돌았다. 나도 각별히 언행을 조심하려 노력했다. 물론, 의도치 않게 결국 상처를 주기는 했지만. 그런데 곧이어 남편이 무심코 던진 한 마디가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 정말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너무 듣기 싫더라고." 


...'~때마다', '싫더라'는 말은 실제로 그런 상황이 한 번 이상 있어왔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나는 시민권 따기를 10여 년간 거부했으며 나 스스로 '나는 굳이 호주인이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여기서 잠시 살뿐이다.' 하며 항상 당당했었다. 그런데....


어느샌가 백인이 주류인 서양에 사는 '동양에서 온 쬐끄만 비백인 여자'의 모습이 오래된 영사기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나인 듯 내가 아닌 듯.


"Are you their nanny?" (*애들 보모예요?)


(저 한국에서 영어를 10년 가까이 성인들에게 가르쳤어요.) 

"It's good that you get to have real teaching experience.(*이제 제대로 된 티칭 경험을 하게 되어 좋겠네요.)


(전 호주대학에서 언어학 석사 했어요.)

"So, you CAN read and write English?" (*그러니까 영어를 읽고 쓸 줄 알기는 안다는 거죠?)

https://brunch.co.kr/@koreakoala/26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우리는 둘 다 입을 다물었다. 남편은 그런 사실을 내가 알게 되어 미안하고 겸연쩍었을 것이고, 나는 그런 사실을 내가 알지 못하도록 전혀 내색하지 않은 것에 고맙고 미안했다. 약간은 어색한 저녁을 보내고 맞은 그다음 날의 나는 왠지 더 부드럽고도 동시에 더 단단해진 것 같았다. 


여담 1. 한국어에서 영어로 가장 가르치기 어려운 말 중 하나가 You라는 걸 그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알게 되었다.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이 "What is 'You' in Korean?"이라고 하면 뭐라고 해야할까? '너', '니', '네', '당신'(반말), '당신'(극존칭), '그쪽', '자기'(애인끼리 부르는 경우 외). 나의 해결책은 중상급이 될 때까지 웬만하면 쓰지 말라는 거였다. 한국인도 힘들어서 보통 주어를 생략하니까. ㅋ

-너 이름이 뭐예요?

-당신 성함이 뭐예요?

-니 이름은 무엇입니까?

-당신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다시 한 번 말해 주세요. 


여담 2. 미국에선 아이를 입양하면 완전한 미국인으로 기르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반면 다문화를 중시하는 호주인들은 아이들의 한국인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도 참 많은 신경을 쓴다. 그 아이의 한국인 정체성도 존중하는 것이다. 내가 알았던 가족들은 한 가족만 빼고 모두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다. 아이가 커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하기까지는. 다행스럽게도 그 모든 아이들이 너무나 훌륭하게 다 잘 자랐다. 그중 두 아이는 자폐가 심했지만 부모는 지극 정성으로 그 아이들을 위한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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