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음이 많아도 나에게 필요한 소리와 불필요한 소리를 걸러낼 수 있기에 그다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지만 남편은 그걸 너무 힘들어한다.
호주에 사는 십여 년 동안은 남편이 쇼핑을 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같이 쇼핑몰을 갔다 하더라도 남편은 입구 커피숖에서 커피를 마시며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내가 장을 보거나 쇼핑을 한 적이 대부분이었다.
연애를 하던 때 남편이 청바지를 사는 걸 처음 본 적이 있었는데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먼저 그는 쇼핑몰에서 청바지를 파는 곳을 향하여 곧장 직진한다.
그리고 가게에 들어서면 청바지가 있는 곳으로 다시 곧장 향한다.
그다음은 남자 청바지 코너로 곧장 직진.
그리곤 자기 사이즈 같아 보이는 것을 입어보지도 않고 대충 집어 들고 곧바로 사서 나왔다.
그리고 집에 와서 입어보고 턱도 없이 크니 그 후로 벨트를 매고 다녔고,
긴 청바지를 입다가 여름엔 가위로 잘라서 반바지를 만들어 입었다.
반바지를 사러 가게에 다시 한번 더 가는 것보다는 그러는 편이 훨씬 더 쉬웠을 테니.
결혼하고 나서도 남편은 옷을 입어보거나 신발을 신어보기를 거부했으므로 내가 쇼핑센터에 가서 대충 사이즈를 재어보고 사거나, 신발도 내가 신어보고 착화감을 대충 느낀 다음 맞을 것 같은 사이즈를 사곤 했다.
가끔 점원들은 "고객님, 그건 남성용 신발입니다."와 같은 얘기를 했다. ㅠ.ㅠ
이렇게 산 것들을 남편은 항상 다 맘에 든다고 했지만 가끔 반이나 한 치수가 컸던 신발, 옷 색깔이나 무늬가 자기 취향이 아니거나 착용감이 편하지 않은 것도 있었는데 절대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같이 가서 입어보고, 신어보고 사자고 할까 봐 그랬을 것이다. 그냥 그 옷이나 신발을 신지 않았다. 나는 그런 것을 보면서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별도리가 없어 그렇게 산 지가 십여 년이 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저히 그런 식으로 계속 내가 쇼핑을 할 수는 없어서, 쇼핑가는 연습을 해 보기로 했다.
"자, 오늘은 내 손을 꼭 잡고 쇼핑을 하러 갈 거야. 갔는데 만약 너무 스트레스받으면 아무것도 안 사도 되니까 집에 가자고 해. 그러면 바로 집으로 올 테니까. 알았지?"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조금씩... 쇼핑에 익숙해졌다. 어떤 때는 십 분만 더 있으면 되는데 너무 힘들어하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나 혼자 그다음 날 가서 그 해당 물건을 사 오기도 했다.
그렇게 연습하기를 몇 년.
이제는 (거의) 전혀 쇼핑하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가끔 힘들면 중간에 쉬면서 커피를 한 잔 하면서 에너지를 재충전한 다음 쇼핑을 계속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정말 큰 어려움이 없다.
2. 커피숖
예전에 어떤 학생분이 커피숖에 가면 다른 사람들의 말이 모두 동시에 다 들려서 상대방에게 집중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말씀을 하셔서 남편에게도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당연하지. 항상 다 들려."
"그래?.. 근데 왜 그런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이젠 익숙해서. 그냥 그러려니 하거든."
남편이 커피숖을 갈 때는 기준이 정해져 있다. 너무 가게가 작아서 주인이 자신을 알아보고 스몰토크를 걸어와도 안되고, 너무 커서 소음이 심해도 안 되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보이지 않는 듯 방해받지 않고 앉아있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한 번은 내가 커피가 맛있는 곳이라고 해서 갔는데 그 주인분이 그다음에 얼굴을 알아보시고는 서비스로 스콘을 주셨다고 했다. 그리고 남편은 그곳에 다시는 가지 않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한 번 익숙하게 된 곳은 계속 가는 경향도 있는데, 나와 함께 가던 동네 커피숖은 꽤 규모가 작지만 사람들이 늘 많아서 적당히 붐비고, 직원도 대부분 MZ세대여서인지 딱히 스몰토크를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간혹 주인분이 자신이 늘 주문하는 걸 기억하고는 '오늘도 치즈케이크와 라떼 고소한 맛인가요?'라고 묻는다고 한다. 하지만 허허 웃어넘긴다고 하는데, 여전히 발길을 끊지 않고 이틀에 한 번씩은 간다.
40대의 크리스 (Chris)
크리스는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은 아니고, 41살에 자폐스펙트럼과 ADHD 진단을 받고 비슷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유튜버다.
그는 영화관에 갔을 때 사람들이 먹는 팝콘의 소리가 너무 귀에 거슬려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바사삭바사삭 기분 좋은 내 입안의 팝콘소리가 내 옆에 있는 사람을 그토록 괴롭게 할 거라고 생각해 본 사람은 몇 명 안 되겠지만 이런 일상의 소음에 예민한 사람들이 가끔 있더라.
이를 misophonia라고 하고 한국어로는 청각과민증이라고 하는 것 같다. ADHD나 자폐스펙트럼이 있는 사람들 중에 청각과민증도 간혹 본다. 청각과민증이 있다 하여 모두 ADHD나 자폐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겹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고 한다.
크리스는 쇼핑센터의 가게를 지날 때마다 각기 다른 큰 음악소리가 자신의 뇌를 너무 힘들게 한다고도 했다.
가게에 들어갔는데 구경하거나 물건을 고르도록 가만히 두지 않고 이것저것 물으며 도와주려는 직원들이 있는데 그것 또한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해결책
내가 남편의 특징을 알고 난 후로는 그가 긴장하는 순간들이 눈에 잘 포착이 되었다. 이전에는 짜증을 쉽게 자주 낸다면서 툴툴거렸던 일이 이제는 그가 힘들어하는 안타까운 순간들로 전해졌다.
하지만 사람이 많은 곳에 계속해서 나 혼자만 다니고 싶지도 않았고, 그의 불안도 좀 줄여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즈음 애플이 무선 이어폰을 출시했다. 그 후로 남편은 외출 시에는 항상 그 이어폰을 끼고 외출했고, 그게 외부 소음에 대한 자극을 완화시켜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차나 위험한 상황에서 외부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 위험하지 않을까 늘 조금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다시 고민을 하다 찾게 된 것이 조깅할 때 많이 착용한다는, 귀 위에 거는 골전도 이어폰이었다! 외부 소리도 들리면서 동시에 자극도 완화해 주는 그 이어폰은 정말 중요한 그의 인생템이 되었다!